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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 메리 크리스마스

by 마루


어떤 소리는 듣게 되면 심장이 짓이겨지는 듯한 반응이 나타날 때가 있다. 기억의 창고에 저장된 뇌관을 건드려 증폭되는 것일 테다. 넓게 퍼져있는 기억 속에 육신이 느낄 수 있는 모든 감각들이 예민하게 자극되기를 기다리고 있다. 시각으로, 향기로, 촉감으로, 소리로, 맛으로, 기억의 형태에 저장되어 언젠가 마취가 풀리듯 발산한다. 추억을 떠올릴 때 그 모든 것이 이따금씩 발현될 것이다.


바이올린을 배운 적이 있다. 어느 센터에서 기회가 생겨 짧은 기간 동안 배우게 됐다. 사실 강의 속도가 빠르게 진행되는 탓에 재미보다는 벅찬 느낌이 다소 있었다. 그래도 아등바등 다른 사람들을 따라가려고 노력을 기울였던 것 같다. 흥미로워서라기보다는 시간 속에 타고 흐르는 직진 본능의 어떤 힘에 의해 앞으로 밀고 나간 것이다. 누군가 앞에서 나를 감고 있는 줄을 잡아당기는 것 마냥, 조급함이 든 것일까. 나를 제외한 다른 이들은 이미 먼저 배우고 있었기에 꽤나 잘하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난 민폐가 되지 말자는 생각으로 그들의 배에 함께 올라탄 것이다.

시간이 조금 지난 어느 날 겨울의 초입에 다다랐을 때 듣게 된 말이 있다. 한 교회에서 크리스마스 날 작은 공연을 열게 됐는데, 참여할 수 있겠냐고. 그것은 형식적인 질문이었을 뿐 다 같이 참여하여 열심히 준비해 보자는 분위기였다. 뒤늦게 시작한 것에, 실력이 뒷받침되지 않는 것에 부담이 되었다. 그러나 이 또한 암묵적인 동의로 하여금 나를 잡아당기는 줄이 팽팽하여 어쩔 도리가 없이, 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었다. 준비를 착실히 차근차근하는 동안 대망의 당일 날이 된다. 긴장되고 떨리는 마음이었지만 다행히 실수 없이 공연이 흘러갔던 것 같다. 작은 공연이지만 어떤 무대든 떨리긴 매한가지다. 짧은 시간의 준비 과정 속에서 생기는 불안감도 한몫하지 않았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잡아당기는 줄의 팽팽함 덕분에 배에서 하선하지 않고 무사히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지 않았나 싶다.


가끔씩 바이올린 소리가 들려오면, 특히 이맘때쯤 교회에서 연주하는 소리가 들릴 때면 귀의 자극에 이끌려 그 시간으로 되돌아간 듯 기억에 잠시 머문다. 지금은 다 잊어버린 연주법이기에 녹슨 실력만 남았을 뿐이지만 그때의 당돌하고 힘찬 마음만큼은 여전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 건 무슨 이유에서 일까. 배에 올라타 함께 연주했던 사람들과의 기억, 그리고 도착지까지 이탈하지 않고 거침없이 해내려는 의지와 모험심. 그 모든 것이 내게 묶여 있는 줄을 다시 한번 당겨줬으면 하는 바람이 아닐까. 어떤 것이든 다시 하면 잘할 것 같다고 입을 모아 말하기도 하지만 무엇이든 그건 쉽지 않음을 안다. 당면한 그 순간에 집중하고 나아가는 끈기는 오직 그 순간에만 느낄 수 있는 특권이자 행운이니까. 이젠 똑같을 수 없지만 마취된 감각과 감정이 풀리면 언제든 만날 수 있다. 호기롭게도 팽팽한 줄의 느낌과 두려움에도 배에서 이탈하지 않은 모습을. 크리스마스가 다가올 즈음이면 떠오른다. 크리스마스 날 교회에서 울리는 연주 소리가 들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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