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의 의도는 어떤 식으로 전해질까?
의도가 전해진다는 것은 무언가로부터 생겨나는 자신의 사유를 체감하는 과정이다. 아무런 배경지식 없이 공간이나 대상을 마주할 때, 그로부터 생기는 감상은 철저히 나의 주관적 해석과 감정에 달려있다. 물론 이러한 해석이 가능한 이유는 타인들의 수많은 의도가 만들어낸 결과물들을 학습하거나 저장했기 때문이다.
창작자가 정해놓은 색깔, 재질, 여백 등은 우리에게 주어진 조건이다. 우리는 그것들에 자유로운 시선을 대입한다. 그 순간 만들어진 조건 혹은 환경은 새로운 개념과 정체성으로 해석될 수 있다. 따라서 의도가 전해지고 느껴지는 방식은 사람들의 경험만큼이나 다양하다. 누군가의 사유와 그 사유를 접하는 개인이 많을수록 더 많은 감상이 생기고 새로운 사유로 이어지는 흐름이다. 그중에서도 하나의 대상을 놓고 긍정적 표현이나 공통된 감상들이 발생된다면 그 의도는 꽤나 적절히 전달된 것일지도 모른다.
공간을 둘러보는 필자의 경우 우선적으로 전반적인 색감에서 느껴지는 감정을 주목한다. 이후에 나를 둘러싸는 공간감, 즉 높낮음과 여백의 부피를 체감한다. 이후 벽면이나 창문 혹은 기물들의 외관과 배치에서 드러나는 선을 관찰한다. 수직, 수평, 곡선 등의 조화로운(때로는 조화롭지 않은) 구성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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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위치는 종로구 서촌 필운동, 맞은편 광화문 쪽 커다란 빌딩 숲의 도심 규모와는 달리 작고 친근한 모습을 갖는다. 키가 낮은 건물들 사이로 적잖게 다니는 것은 차량이 아닌 사람들, 도로의 폭이 비교적 좁기 때문에 많은 교통량이 지나지 않는다. 현대 도시의 속도와 소음 대신 사람의 걸음과 말소리가 들려오는 거리이다.
경복궁역 인근에 위치한 먹자골목을 따라 올라가다 보면 하나의 회색 건물이 보인다. 엘리베이터의 도움 없이 걸어 올라 오늘의 목적지에 이른다. 궤도(櫃道)라는 이름의 공간이다. 흔히 사용하는 궤도(軌道)의 한자어와는 표현이 다르지만 우리가 아는 일반적인 의미를 대입해도 큰 문제는 없다. 앞으로의 설명과 사진들이 적절한 부연설명이 되어줄 것이다.
흑색이 갖는 무게감을 중심으로 무채색의 조합이 부드럽게 묻어나는 공간이다. 자연광은 환경에 따라 변화하며 은은함과 명확한 밝음을 오간다. 공간의 상부 구조를 이루는 천장과 벽면은 흰색 페인트로 차분한 톤을 맞추었다. 특히 스테인리스, 아크릴, 나무의 소재가 눈에 띈다. 각 기물들이 갖는 고유한 질감과 결이 빛을 받아 드러난다. 빛의 변화에 따라 우리의 시선을 사로잡는 섬세한 감각이다.
필자는 이 단순하되 밀도 있는 공간을 하나의 무대로 이해한다. 그 이유는 이들이 전하는 가치와 서비스 동선이 마치 하나의 공연처럼 표현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해석은 다음의 세 가지 관점에 녹아들어 있다. '음악, 작명, 구도'이다. 먼저 간단히 요약하자면, 공간과의 첫 접점에서 은은한 음악이 우리에게 스민다. 이어서 독특한 작명의 이야기가 담긴 메뉴라는 작품을 고른 후, 작품이 만들어지는 중앙 무대를 구경한다. 마지막으로 설계된 동선과 구도를 따라 우리에게 전달되는 흐름이다.
엠비언트 뮤직(음악)
첫 번째로 해당 공간을 읽어냄에 있어 주요한 분위기를 조성하는 요소는 음악이다. 고요한 듯 날카롭고, 추상적이며 미래적인 특징의 엠비언트 뮤직이 재생된다. 차분한 옷을 입은 공간의 성격을 우주로 끌어들여 유영하듯 내부의 곳곳에 울려 퍼진다. 또한 독특한 음성은 지금 내가 마시는 공기의 분위기마저 바꾸는 힘을 갖는다. 주위를 맴도는 음악이 우리의 시간과 시각적 경험에 신비로운 막을 덧씌운다. 앞으로 진행될 이야기의 초반 흐름을 확실하게 잡아주는 길잡이인 것이다.
이야기의 음료 (작명)
컵의 온도감까지 섬세히 맞추어 제공되는 음료들엔 각각의 개성이 담겨있었다. 내용물을 감싸는 잔부터 특별히 부여된 이름이 그러하다. 지금까지 방문했던 카페들 중 메뉴를 소개하는 경우는 이번이 처음이다. 이곳만의 고유한 메세지가 있기 때문이다.
망종 - 24절기 중 하나로 씨앗을 뿌리기에 적합한 절기, 오픈 준비를 해당 시기에 맞추어 시작했음을 표현
이탈 - 커피와 티 종류를 벗어난 독창적인 블렌딩, 흔히 보는 카페 메뉴의 평균값을 벗어났다는 의도
결실 - 식물이 오랜 시간 끝에 열매를 맺듯, 우리의 삶과 결실에 관련지어 일련의 의미를 상상하게 함
이러한 스토리텔링은 맛이라는 감각적 경험 위에 상상의 가치를 더한다. 원재료나 맛의 특징을 먼저 내세우지 않고, 이야기를 전하는 방식은 최근 콘텐츠 시대에 결을 맞춘 의도로 보이기도 한다. 뛰어난 제품의 질만으로 승부를 보는 곳들도 있지만, 실물 위에 자신의 시선을 부가하여 감각을 파는 일은 현대의 상업이자 예술이다. 주체적인 생각을 과감하게 선택한 사례이다. 심지어 인스타 계정에도 '문인'이라는 단어를 통해 브랜드 정체성을 알리고 있다.
진심의 무대 (구도)
테이블 좌석은 창가와 구석 그리고 중앙에 고르게 놓여 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중앙의 아크릴 테이블, 투명한 재질의 아크릴 판이 흔히 보는 시대에서 이렇게 거대한 부피로 디자인된 기물은 새로운 존재감을 표한다. 궤도를 방문하는 모든 이들이 흥미롭게 바라볼 시각성이자 공간 컨셉을 완성하는 핵심 매개체이다.
주문을 받는 카운터와 바는 바닥에서 한 단 높이 있다. 그 옆의 커다란 LCD 스크린에는 달의 형상이 떠 있고, 색깔과 모양이 바뀌는 등 미디어 아트가 전시된다. 그러한 배경 앞의 브루잉 바에서 커피를 내리고, 바리스타의 모습은 마치 무대에서 공연을 하는 듯한 이미지가 만들어진다. 음악과 영상이 암시하는 무언의 추상성에 브루잉이라는 실질적 행위를 결합시킨다. 이후 완성된 작품은 관객들에게 전달된다. 전달자는 무대 아래로 내려와 원형 아크릴 테이블을 따라 객석으로 향한다. 몇 가지 메세지가 담긴 네임카드와 함께 마시는 방법을 설명하는 흐름으로 마무리된다.
공연의 시작과 끝을 연결 짓는 구조의 중심에 위치한 아크릴 테이블은 가치를 전하는 컨베이어 벨트다. 브랜딩과 컨셉이라는 무형적 개념을 메뉴와 기물이라는 실질적 형태에 녹여내어 전달한다. 진심과 의도를 전달함에 있어 그 해법을 완성도 높은 디자인으로 제시하는 빼어난 감각에 조용히 박수를 보낸다.
반면 한 가지 의문은 아크릴 테이블의 안쪽 자리를 비워둔 점이다. 상업적으로 유휴공간이 발생하는 것인데, 무언가를 채워 넣거나 동선의 역할을 하지도 않는다. 공간감을 확보하기 위한 예술적 선택으로 보인다. 상업적 욕심을 줄이고 공간 경험에 초점을 맞춘 의도가 다시 한번 드러나는 지점이다.
한 단 높이 있는 곳에서 작품을 준비하고 객석과 마주한 무대에서 공연을 펼친 후 한 계단 내려와 관객들에게 작은 의도를 전달한다
공간을 이리저리 관찰하다 보니 테이블 높이의 검은색 가벽의 존재가 궁금해졌다. 벽면과는 떨어져 있고 바닥과는 붙어 있는 형태인 벽 앞의 벽이다. 이렇게 되면 가용한 내부 면적이 줄어들고 실제 벽 사이의 공간은 비게 된다. 의도는 무엇일까? 보이지 않는 기능이 숨어있을 수도 있지만, 필자는 공간의 톤을 맞추기 위함으로 해석한다. 사진에서 보이듯 벽면의 색깔은 흰색이다. 따라서 공간의 하단부에 검은색으로 안정감을 주기 위해 가벽을 세운 것이다. 혹시 모를 미완성의 심상을 보완하려는 세심함이었으리라.
사랑과 평화를 전하는 메세지 저녁 시간대의 방문도 좋은 선택지가 된다. 어둑함이 전반을 감싸지만 온난한 조명이 곳곳을 밝힌다. 차분한 상태로 선명한 집중을 할 수 있는 내부 분위기가 형성된다. 독창적인 궤도를 듣고, 보고, 사유해보시라.
장소: 궤도(櫃道)
시간: 12pm - 11pm / 월 1회 비정기 휴무(인스타 참고)
위치: 서울 종로구 필운대로 9-2 3층
연락처: 02-231-12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