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분히 전하는 건축적 진심, 슬라브
건축에서 쓰이는 용어로 철근과 콘크리트를 합하여 만들어진 바닥 혹은 판을 의미한다. 우리가 밟고 서 있는 바닥이 바로 슬라브인 것이다. 반면 건물이 2층 이상 올라갈 경우, 우리의 머리 위에 있는 천장 역시 슬라브가 된다. 위층의 바닥이 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바닥도 되고 천장도 되는 슬라브, 하지만 주된 개념은 바닥으로써 무언가를 받쳐 올린다는 목적에 있다. 기둥과 같이 안정성을 담당하는 주 요소인 것이다. 또한 슬라브를 검색해보면 인테리어 시공 현장이나 업체 홍보와 관련된 정보들이 나온다. 여전히 전문적인 영역에서 다루어지는 개념이고 널리 대중화되지 않은 듯한 모양이다.
반면 오늘 소개할 공간은 해당 단어를 상호명으로 차용했다. 슬라브라는 전문적인 용어를 카페의 이름으로 사용한 이유는 무엇일까? 필자 개인의 추측으로는 건축적 개념과 그에 얽힌 본인들의 공간 정체성을 널리 알리려는 의도로 보인다. 인테리어 스튜디오 인디살롱에서 만든 공간으로 과거 당구장이었던 공간을 새롭게 탈바꿈하여 운영 중이다.
특히 마포역 근처 사람들이 북적이는 재래시장 거리와 젊은 사람들이 찾는 망리단길의 접점에 위치해 있다. 카페 근처에서 감각적 인테리어의 신세대 상권과 기성세대의 옛 시장 상권이 공존하는 흥미로운 지역 생태계를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건축적 감각을 입힌 공간, 슬라브를 들여다보도록 하자.
안쪽으로 뻗은 공간을 따라 위치한 검은색의 곡면 테이블이 시선의 중심을 잡는다. 이름은 오아시스 테이블, 아래의 사진과 같이 여러 조각을 이어 붙인 아이디어의 결과물이다. 각 판들이 만나는 접점은 섬세한 마감 덕분에 거의 티가 나지 않는다. 등고선의 윤곽 혹은 아메바의 모양에서 영감을 얻은 듯한 흥미로운 외관이다.
마치 커다란 대륙이 분할되기 전의 모습과 같은 테이블은 연결의 개념을 전한다. 그 이유는 사람들이 합석하게 되기 때문이다. 보통 나누어진 테이블에 앉아 서로를 멀리 하는 경우와 달리, 차분히 마련된 탁상 위에서 모두의 모습을 공유하는 간접적 연결이 이루어진다. (물론 좌석 간의 적당한 거리는 확보된다.) 따라서 슬라브를 방문하는 사람들은 공동체적 앉음의 행위가 주는 은근하고 느슨한 연대를 겪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본 공간이 주는 가장 큰 매력이라고 생각한다.
벽면에 위치한 물건들은 쓰임새가 다양하다. 건축 작업에서 실제로 쓰인 재료를 가져다 놓거나, 직원의 취향이 담긴 물품과 판매용 리빙 제품 등 종합적인 집합소의 역할을 하는 벽장이다.
또한 가운데에 내부가 보이는 문이 하나 있는데, 실제 작업실로 쓰이는 안쪽 공간을 드러냈다. 완성된 결과물만을 보여주는 강박 대신 여유를 갖고 제작하는 과정을 공간의 한 부분으로 공개한다. 이러한 일의 흔적은 공간 이미지를 대중에게 보다 가깝고 친근하게 보여줄 수 있는 요소로 작용할 것이다.
라틴어 Domus: 집 + Innovation: 혁신의 조합으로 1차 세계대전 이후 저렴한 비용으로 집을 대량 생산하기 위해 건축가 르꼬르뷔지에가 고안한 개념이다. 건물의 하중을 벽이 아닌 기둥으로 분산시켜 벽면의 활용을 자유롭게 하는 건축 방법이다. 따라서 사방에 벽을 설치할 필요 없이 큰 창을 내거나 통유리를 벽면으로 사용해 다양한 표현을 할 수 있게 된다. 예를 들어 빌라와 아파트의 필로티 구조가 그러하다. 벽 없이 기둥이 무게를 지탱하는 구조이므로 1층에 개방된 주차장이나 입구를 만들 수 있는 것이다. 또한 다수의 현대 건물들이 이 시스템을 사용하고 있다.
슬라브는 이러한 돔ㆍ이노 시스템을 하나의 디저트 메뉴로 풀어낸다. 애플 크럼블로 흙바닥을 깔고 파이지로 슬라브를 구성, 바닐라 치즈 요거트를 기둥으로 구현한 것이다. 그리고 디저트를 받쳐주는 격자무늬 매트는 건축학도들이 주로 쓰는 칼판이다. 건축적 진심이 넘쳐나는 컨셉과 의도이다.
글을 쓰는 지금에 와서 다시 생각해보는 점이 있다면, 슬라브를 운영 중인 지하공간 역시 돔-이노 시스템의 적용을 받고 있다는 점이다. 보이지 않는 내부의 기둥들이 지상의 하중을 버티고 있음이 그러하다. 이러한 건축적 개념을 디저트뿐만 아니라 해당 공간의 존재 방식에서도 찾아볼 수 있음을 주목하게 된다.
슬라브가 전하는 건축적 의미와 가치를 종합해보면 결국 '바닥 위에서 일어나는 연대'가 아닌가 싶다. 공간의 가장 기본이 되는 슬라브 위에서 사람들을 모으고 관계하게끔 만드는 것이다. 슬라브는 결국 이들의 진심이 구현된 실제적 형태이다. 이 곳을 방문하게 된다면 그 안에 담긴 은유적 요소들을 탐구해보시길 바란다.
장소: 슬라브
위치: 서울 마포구 포은로 87 지하 1층
시간: 12:00 - 20:00 (화요일 휴무)
연락처: 0507-1492-15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