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00 + 7800 내가 산 샐러드 금액을 계산하면 요즘 샐러드 만원이 우습다는 시대에 그리 큰 손실은 아니다.
14600원과 내 퇴근 지연 소요 시간 30분, 그래 뭐 누군가 실수로 가져갔든 어쨌든 이 건 샐러드 재료 자체에 내가 주인이라는 표식이 있는 것도 아니고 알 수가 없다.내 이름을 적은 메모는 여기서 별 소용 없었다.
공유 오피스 냉장고에 이름을 써서 담으면 내 것이 온전히 보장될거라고 너무 믿어서인지, 단 2시간 반 만에 내 샐러드 2통이 감쪽 같이 사라진 것이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투명 비닐에 위 연어 아래 닭가슴살 아스파라거스, 색이 다른 샐러드 소스까지 두 통 담겨서 배가 고프고도 남을 그 시간에 너무나 그 사람을 유혹했을 것이다.
이제와서 CCTV로 그 분을 찾은들 추궁할 수도 없을테고, 다시 내 놓으라고 하기엔 안 사면 그만일 거다.
애초에 자기 돈으로 사 먹을 거면 남의 이름이 버젓이 적힌 샐러드는 왜 가져갔겠나. 기부 한 셈 치자.
이미 그의 내장을 차근 차근 지나며 알뜰하게 영양가가 있는 부분들은 온 몸에 좋은 기운을 제대로 뿜어줬을 거다. 내장 기관과 근육과 혈액에 녹여져 좋은 건 쏙쏙 알차게 흡수되고왠지 기분도 좋았을 것이다. 소화도 아주 잘 되어 이미 그 것이 되고도 남았을 거다.
샐러드 실종 사건은 발생 24시간이 조금 안 된 지금 다시 말하는 것도 좀 황당한 기분이 드는데, "눈 뜨고 코 베이는 사건" 까지는 아니더라도 내내 이상한 기분을 선사했다.
이 곳은 저녁 6시 이후 많이들 퇴근하고 커뮤니티 매니저님들도 마찬가지로 퇴장한다. 사람들이 북적이던 아침과 대비되는 고요한 밤이 되고 난 뒤에는 더더욱 주인 없는 광장 같은 편안함이 감도는 넓은 라운지라 저녁 늦은 시간에는 공기마저 차분하고 공간에 머무는 소수의 사람들의 모습을 봐도 굉장히 여유롭다.
그 틈을 타서 냉장고를 열다니, 이제까지 생각해 본 적 없는 일인데 호되게 당했다.
나 그렇게 큰 일을 안 겪고 살았나봐. 이런 일에 놀라다니.
그러니까 사건을 요약하자면 이렇다.
1. 2023.4.4
유난히 이 구역 인기 샐러드 가게의 "샐러드 비치 냉장고"가 텅텅 비어보이는 화요일, 오후 5시 샐러드 2개를 사서 투명 봉투에 들고 공유 오피스에 왔다. 냉장고 안에 "내 이름을 잘 적어서" 넣었다. 집에 가서 샐러드를 맛있게 먹어야지 생각하고, 열심히 일을 했다.
2.
오후 7시 반, 이제 퇴근하려고 공유 오피스 냉장고 문을 열었는데 아무리 봐도 내 샐러드 봉투가 안 보인다. 내가 요즘 깜빡하기도 하니 혹시 내 자리에 가져다두고 잊은 건가 다시 내 기억을 잠시 의심하며 사무실로 갔다.
3.
아직 공유오피스 측 확인 사항은 회신 받지 않아서 밝힐 수 없으나 "정황상 굉장히 의심이 가지만, 물증이 없어 애매한, 일반적인 매너로 보기에는 어색한 행동을 하시는 분을 목격"했다.
대체로 조용히 쉬거나 일하는 그 시간에 그 분의 모습은 어딘가 급해 보이기도 하고, 위치도 자연스럽지 않아 가장 튀어보였다. (반대로 완전히 오해일 수 있으니 착각이라고 일단 결론 내리기로 했다.)
4. 2023.4.5
CCTV는 돌려볼 수는 있지만, 무슨 물건도 아니고 샐러드는 어쩔 수 없다고 한다. 그래 포기하자.
5.
되게 이상한 것 하나, 노트북 받침대가 냉장고 안에 이틀째 들어있다. 어제 내 샐러드를 넣을 때는 사실 신경 써서 보지 않아서 난 이게 언제부터 여기서 쾌적하게 자리를 잡았는지는 모른다. 다만, 내 샐러드를 잃고 나서부터는 냉장고 구석 구석을 굉장히 유심히 보게 되었고, 그래서 눈에 띄었다. 난 오늘도 내 샐러드가 사라진 냉장고 문을 오전과 저녁에 한 번씩 열어보았다.
누군가에게 선택된 그 샐러드가 돌아오는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다만, 여전히 의문의 노트북 받침대는 검은 가방에 감싸여서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살면서 노트북 받침대를 냉장고를 열었을 때 만난 적은 없어서 굉장히 미스테리한 기분이 든다.
증거라도 남겨야 할 것 같아서 각종 사진을 그 때 남겨두었는데, 이제 브런치에 올리고 싹 잊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