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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과 우체부

아직 살 만한 세상, 참 아름다운 세상

1월과 2월이 자리바꿈 하는 즈음에 이번 겨울 들어 처음 눈 다운 눈이 내렸다. 눈이 내려도 우체부는 우편물을 배달한다. 눈 내리면 그 눈 맞으면서, 비 내리면 그 비 맞으면서, 바람 불면 그 바람 맞으면서 우편물을 배달한다. 그게 우체부다. Mails Never Stop, 이게 우체국의 기본 태도이고.




그런데 우편물을 배달할 수 없는 경우도 있기는 하다. 허리케인이나 토네이도가 닥쳐서 지역 전체가 마비되는 경우다. 마찬가지로 눈도 너무 많이 와서 지역 전체가 마비된다면 우편물을 배달하지 않는다. 배달하지 않는 게 아니라 배달할 수가 없는 것이다.




눈이 왔을 때 어느 집은 배달이 되고 어느 집은 배달되지 않는 경우가 있다. 지역 전체가 아니라 집집마다 배달 사정이 다른 것이다. 이것은 각 우체부의 ‘안전’과 관련된다. 우체부는 최선을 다해 우편물을 배달하려고 노력하지만 우체부의 ‘안전’이 확보되지 않으면 우편물을 배달하지 않는다. 눈 예보가 있거나 눈 내린 다음날은 우체국 관리자들이 우체부에게 운전할 때와 걸을 때의 ‘안전’에 관해 누누이 강조한다.


우편물을 배달하기 위해 자동차로 언덕을 올라가야 하는데 그 언덕길에 눈이 쌓여서 올라갈 수 없는 경우라면 그 언덕 위에 있는 집 전부가 우편물을 받지 못한다. 미국은 자동차 없으면 못 사는 나라이니까 그 언덕길의 주민 차량의 이동을 위해서 눈은 곧 치워지기에 대개 그다음 날이면 우편물이 배달된다.




어느 겨울 눈 내린 다음날에 무리해서 언덕길을 올라가다가 바퀴가 헛돌면서 미끄러진 적이 있었다. 앞으로 가려고 하면 헛바퀴 돌면서 뒤로 미끄러지는 진땀 나는 상황. 하마터면 길가에 세워 둔 동네 주민의 차량을 받을 뻔했다. 이런저런 방법을 시도해본 후 더 이상은 무모하다고 판단하여 우체국에 전화를 해서 구조를 받은 적이 있다.


그 후로는 눈 내리거나, 눈 내린 직후에는 조금이라도 위험할 것 같으면 언덕길은 올라가지 않는다. 사고를 내지 않으면 오늘만 배달 못하고 내일부터는 계속 배달할 수 있지만, 사고를 내면 내일부터 당분간 배달을 하지 못하게 되니 사고를 피하는 것이 모두에게 좋은 일이다.


언덕길은 올라가는 길이든 내려가는 길이든 같다. 위험하면 우체부는 가지 않는다.


(우체부가 근무 중 차량 사고를 내면 그 즉시 우체국 차량 운전이 금지되고, 우체부 교육기관인 Carrier Academy에서 운전에 관한 재교육을 받은 후에야 다시 우체국 차량을 운전할 수 있다. 그동안에도 우편물 배달은 하지만 이루 말할 수 없는 불편을 겪는다. 그 불편은 다른 기회로 미룬다.)




또 다른 경우가 있다. 자동차가 다니는 길은 괜찮은데, 그 길에서 집의 우편함까지 가는 길이 안전하지 않은 경우다. 길에서 집의 우편함까지 가는 길에 눈을 안 치운 집이 그런 경우다. 눈을 안 치워도 우편함까지 안전하게 갔다 올 수 있다면 우체부는 우편물을 배달한다.


어느 겨울 눈 내린 다음 일주일 넘게 우편물을 배달하지 못한 집이 있었다. 그 집을 뺀 나머지 집들은 눈 그친 후 즉시 우편물을 받았다. 그런데 그 집은 찻길에서 우편함까지 가는 거의 10미터 정도의 길이 빙판이 되어있었다. 게다가 우편함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다섯 개 정도의 계단을 올라야 하는데 거기에도 빙판이 되어있었다. 눈 내린 후 그 눈을 치우지 않았기 때문에 낮에는 햇살에 살짝 녹았다가 밤이 되어 기온이 빙점 아래로 떨어지면서 빙판이 된 것이다. 빙판길은 눈 쌓인 길보다 훨씬 위험하다. 그래서 그 집에는 우편물을 배달하지 못했다. 이 역시 ‘안전’ 문제이기 때문이다.


사실 그 집은 노인분만 사시는 것이라서 눈이 그쳤어도 그 즉시 눈을 치울 수 없는 사정이 있었다. 그래서 어떤 경우에는 눈 그치고 난 후에  이웃의 젊은이들이 노인분만 사는 집의 눈을 치워주는 아름다운 광경을 보기도 한다. 한 번은 40대 아버지가 중고등학생 딸, 아들과 함께 옆집 할아버지네 눈을 치워주는 모습을 보았는데, 그날은 하루 종일 따스한 가슴으로 우편물을 배달했다. 아직은 살 만한 세상.




종합 정리하면 이렇다.

우체부는 날씨와 상관없이 우편물을 배달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한다.

그런데 우체부의 안전이 문제가 되면 우편물을 배달하지 않는다. 안전이 확보되면 우편물을 배달한다.

그러므로 눈 내리더라도 우체부가 우편물을 안전하게 배달할 수 있는 환경이라면 우편물을 받을 수 있다.




이번처럼 눈이 제법 내리면 전에 겪었던 일이 떠오른다.

 

눈 내린 다음날 우편물 배달을 갔더니 의도적으로 앞뜰에 쌓인 눈을 치워 둔 것을 발견했다. 자기네 집 우편물 배달한 다음에 어떤 경로로 옆집으로 가는지를 알기에 우체부를 위해 옆집으로 가는 길에 쌓인 눈을 우정 치운 것이다. 우체부를 위한 배려에 감동, 물밀듯이 밀려오는 감동의 물결.



눈 내린 다음에는 안전상 이유로 걷는 속도가 떨어져서 평상시보다 시간이 더 걸리는데 이렇게 길을 치워주면 시간도 절약되고 안전에 관한 부담도 덜고 해서 우체부로서는 고맙기 짝이 없는 것이다.


이런 집들은 만나면 고맙다는 생각만 하는 게 아니라 짧은 축복의 기도를 한다. 눈 내리는 겨울뿐만 아니라 봄, 여름, 가을에도 이 집에 우편물을 배달할 때면 짧은 축복의 기도를 한다. 타인을 위한 마음 씀씀이가 고맙지 않은가 말이다.




실제로는 더 많은 사람들이 우체부를 위해 눈을 치워주었는데 사진으로 남은 것이 두 집 밖에 없어서 아쉽다.


어찌 되었거나 참 아름다운 세상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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