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소는 숫자부터 시작한다
좁은 곳에서 넓은 곳으로 확산되는 주소 표기법
1960년대 중반, 국민학교 1학년을 마치고 형이 먼저 가있는 서울로 나도 유학 보내졌다.
전화가 귀하던 시절이었고, 선친 사무실에 업무용 전화가 있었지만 서울 셋집에는 전화가 없는 시절이었다.
그래서 서울과 본가 사이에 연락할 일은 주로 편지를 이용했고 아주 긴급한 일이 있을 때에는 전보를 이용했다.
지금은 봉투에 주소를 가로로 적지만 그때는 세로로 적는 시절이었다.
집으로 보는 편지에 형은 아버지 이름을 적는 것이 아니라 형 자신의 이름을 적고는 本第入納(본제입납)이라고 적는 것을 보았다.
이상했다.
집으로 가는 편지에 왜 아버지 이름이 아니라 형 자신의 이름을 적는 것일까?
그리고 한자로 적은 이 ‘본제입납’은 또 뭐란 말인가?
그 이유는 이렇다.
우리네 옛날 정서로는 아버지나 어머니의 이름을 적거나 입에 올리는 것은 금기시되는 일이다.
그래서 홍길동의 아들에게
“부친 함자가 어떻게 되시냐?”
하고 물으면 그 아들은
“홍길동입니다.”
라고 말할 수 없고
“길자(字) 동자(字)입니다.”
라고 답하게 된다.
윗사람 이름을 입에 올리지 않는 것은 집으로 편지를 보낼 때에도 마찬가지다.
이몽룡과 혼인하여 한양으로 간 성춘향이 고향 남원의 어머니 월매에게 편지를 쓸 때에도 겉봉에 <월매 귀하>라고 쓸 수 없고 <성춘향 본제입납>이라고 적는다는 말이다.
여기서 ‘본제입납’은 ‘(우리) 집으로 가는 (편지)’라는 뜻이다.
이건 모두 옛날에 있었던 일이고 지금은 이렇게 쓰는 사람이 있을까 싶다.
편지를 종이에 쓴다는 것 자체가 낯설어진 이 시절에...
각설하고, 우리와 미국의 주소 적는 법에 차이가 있다.
우리 청와대 주소는
03048
서울특별시 종로구 청와대로 1
이다.
맨 앞의 03048은 우편번호.
미국의 백악관(the White House) 주소는
1600 Pennsylvania Avenue NW
Washington, DC 20500
이다.
맨 뒤의 20500은 우편번호(zip code).
NW는 워싱턴 디씨의 북서(North West) 구역이라는 뜻.
여기서 알 수 있듯이 우리는 넓은 범위에서 좁은 범위로 좁혀나가면서 주소를 적는다.
서울특별시 > 종로구 > 청와대로 > 1
반대로 미국은 좁은 범위에서 넓은 범위로 넓혀나가면서 주소를 적는다.
1600 < Pennsylvania Avenue < NW < Washington, DC
번지를 먼저 말하는 미국식 주소 표기법이 나는 아직도 어색하다.
주소만 보거나 들어서 그 위치를 상상할 때에도 나는 넓은 곳을 먼저 생각한 후, 넓은 곳에서 좁은 곳으로 좁혀나가는 것이 편리하다.
청와대의 경우
서울특별시를 먼저 머리에 그려 넣은 후,
그 서울의 한 부분인 종로구로 범위를 좁히고,
종로구에서 청와대로로 간 후,
청와대로에서 1번지를 가는 것이 쉽다.
백악관은 1600번지를 먼저 봐도 이 1600번지가 어디에 있는 것인지 길 이름이 나올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길 이름이 나와도 이게 어느 도시의 길인지 알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도시가 나와도 이게 어느 주에 있는 것인지 알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결국 마지막의 주가 나올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내게는 무척 불편하다.
미국에서 주소를 그렇게 표기하는 데는 무슨 이유가 있을 터인데 아직 알아내지 못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