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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까오스 이비 Oct 11. 2021

아빠가 왔어요.

결혼과 동시에 아내가 까순이를 임신했다.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나는 태교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다. 인간 지능 발달 측면에서도.  


인간 지능 발달은 유전적으로 타고난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과 주변 환경에서 배우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이른바 ‘선천 후천 논쟁 (nature nurture debate)’ 또는 ‘유전론 환경론 논쟁’이 있다.  


예를 들어 운동선수들의 자녀가 운동을 잘하는 이유가 운동을 잘하는 부모의 능력을 물려받아 잘하게 됐다고 주장하는 것이 선천 또는 유전론적인 관점이다. 이에 반해 후천, 환경론적인 관점은 부모가 운동하는 모습을  꾸준히 자주 보여줌으로써 아이들이 어려서부터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또 따라 하면서 잘하게 됐다는 것이다.  


신체적인 상태나 조건만 보더라도 유전적인 요소는 분명 사람마다 차이가 있으며 이러한 차이가 사람이 무엇을 배우고 행동하는데 영향을 주는 것은 틀림없는 것 같다. 하지만 유전적인 요소는 배우자를 선택하는 것 말고는 현재 법 테두리 안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또한 아무리 유전적으로 선호하는 배우자를 선택했다 하더라도 부모가 원하는 유전자를 가지고 아이가 태어난다는 보장도 할 수 없다. 현재까지 유전적인 요소는 마치 조물주가 점지해 주는 일종의 숙명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환경적인 요소는 맹모삼천지교의 사례에서도 알 수 있듯 아이가 자라고 성장하는 주변에 어떤 것들이 있느냐에 따라 아이의 지능과 능력 개발의 차이는 발생할 수 있다. 


당연한 얘기지만 아이에게 새로운 지능이나 능력이 생기기 위해서는 우선 그 지능이나 능력이 어떤 형태로든 아이 주변에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중에 관심 끄는 것은 감각 기관을 통해 익히게 되고, 그러한 과정을 통해 아이는 지능이나 능력이 생기는 것이다. 경험이나 노력을 통해서 건 유전적으로 물려받았건 간에 일단 아이가 가지고 있는 지식이나 능력에 따라 아이가 관심을 갖고 습득하는 대상 역시 다르게 되고 그것을 배우는 속도 또한 차이가 난다. 


변하지 않는 진리가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누구나 새로운 지능이나 능력이 생기거나 잘하기 위해서는 오랜 시간 반복 학습해야 한다는 것이다. 혹자는 만(萬) 시간이 필요하다고 한다. 새로운 지능이나 능력을 본인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그만큼 부단한 노력이 필요하다.  


그럼 아이는 언제부터 학습을 하는 것일까. 나는 태아 때부터라고 생각한다. 좀 더 과장해서 얘기하면 난자와 정자 때부터 학습하기 시작해서 난자가 정자를 선택할 때도 정자 상태를 보고 선택하며, 수정이 된 후에는 난자와 정자가 가진 서로의 지식을 공유하고 결합해서 학습을 계속한다고 생각한다. 


아내가 첫째를 임신했을 때, 나는 태명을 ‘까순’이라고 지었다. 태명이 예쁘면 삼신할미가 데려간다고 태명은 가급적 천하게 험하게 지으라는 소리를 어디선가 들은 것 같아서 그렇게 지었다. 그리고 매일 퇴근 후 까순이에게 말을 걸었다. 아빠가 왔다고, 오늘은 잘 지냈냐고. 


하지만 까순이에게 말을 걸 때 무턱대고 말부터 하지는 않았다. 까순이에게 들을 준비를 하라는 신호를 먼저 줬다. 이제부터 아빠가 까순이에게 말을 할 테니 잘 들으라고 말이다. 내가 사용했던 신호는 까순이에게 말을 하기 전에 아내의 배를 시계 방향으로 쓰다듬으며 “까순아 아빠야. 아빠가 왔어~”였다. 


그렇게 몇 번을 하다 갑자기 '계란이 왔어요 계란이~'라는 어렸을 때 계란 장수 아저씨의 목소리가 생각났다. 처음에는 장난으로 계란을 아빠로 바꿔 ‘아빠가 왔어요 아빠가’를 반복하다 ‘아빠가 왔어요’라는 노래를 만들게 되었다. 정말 우연히.



그렇게 나는 까순이가 태어나기 전에 매일 같이 이 노래를 불러줬다. 그리고 까순이는 건강하게 태어났다.  


“탯줄 자르시겠어요?”

“아! 네….”


드디어 나에게도 말로만 듣던 탯줄 자를 기회가 왔다. 탯줄 자를 때 큰 감동을 받았다는 소리를 하도 많이 들어서 잔뜩 기대를 하고 있었다. 간호사 선생님은 나에게 수술용 장갑을 끼게 한 후 가위를 줬다. 그리고 아내와 까순이가 연결된 긴 탯줄에 집게 2개를 집고 그 사이를 자르라고 했다. 나는 가운데를 잘랐다. ‘어라? 뭐야? 그냥 곱창 자르는 거 같은데…’ 실망이었다. 


병원에서 하루 밤을 보내고 다음날 아침. 출근길에 간호사 선생님에게 까순이를 보여달라고 했다. 잠시 후 선생님은 까순이를 안고 나에게 왔다.  


“까순아! 아빠야!” 

나는 까순이를 불렀다. 간호사 선생님이 옆에 있어서 약간 쑥스러웠지만 용기 내어 이름을 불렀다.


까순이는 내 말에 떠지지도 않은 눈을 꾸물꾸물하고 귀를 쫑긋 세운 후 고개를 천천히, 그것도 정말 아~주 천천히 나에게로 돌리는 것이었다. 까순이의 모습에 나는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뭐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따뜻한 무언가가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진짜로 아빠가 되었다는 것도. 


“아이가 아빠 목소리를 아는 것 같네요.”

간호사 선생님도 신기한 듯 웃으며 말했다. 

'ㅎㅎ.'


이 장면은 10여 년이 지난 지금도 눈에 선할 만큼 나에게는 큰 감동을 주었다. 


그리고 영유아 시기 내내 까순이에게 내가 만든 노래를 계속 불러줬다. 그래서 그런가 까순이가 첫 번째로 한 말은 다름 아닌 ‘아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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