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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까오스 이비 Feb 02. 2022

세상에는 약속이 너무 많아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에는 매우 많은 약속들이 있다. 개인들이 한 소소한 약속부터 국가 통치나 체제 유지를 위한 각종 법. 국가와 국가 간의 하는 각종 협약이나 규약 등 그 이름이나 형태, 구속력은 다르지만, 우리가 한 사회에 태어나 살아가기 위해서는 그 사회의 수많은 약속들을 잘 지켜야만 정상적인 삶을 살 수 있다. 


우리가 이렇게 많은 약속을 하면서 사는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누구나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하고 싶은 일을 하려고 하는 것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한다. 


한번 생각해 보자. 

서로 다른 두 사람이 서로 하고 싶은 일을 하려고 하는데 공교롭게도 이 두 사람의 일이 서로 상충되어 방해가 된다면 이 두 사람은 과연 어떻게 해야 할까. 아마도 이 두 사람이 각자 하고 싶은 것을 최대한 오랫동안 많이 하기 위해서는 상호 합의하에 규칙을 정하는 방법이 가장 좋은 방법일 것이다.  


예를 들면 피아노를 치고 싶은 두 사람이 서로 동시에 피아노를 치고 싶을 때, 가위바위보를 통해 먼저 피아노를 칠 사람을 정한 뒤, 10분씩 돌아가면서 치는 규칙을 정함으로써 피아노를 치고 싶은 두 사람의 욕구를 어느 정도는 충족할 수 있다.  


하지만 사회생활은 이 두 사람만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많은 구성원들이 가지고 있는 다양한 욕구를 해결하려다 보니 가벼운 약속부터 무거운 형벌이 존재하는 법으로 까지 발전하게 된 것이다. 


약속은 시대나 상황에 따라 새로 만들어지기도 하고 수정 보완되다 더 이상 필요 없으면 폐기되는 등 그 나름의 생명 주기가 있다. 따라서 아이들이 이 사회에서 독립적인 객체로 잘 살기 위해서는 기존에 있는 약속을 잘 지키는 것도 중요하지만 상황에 맞게 약속을 새로 정하고, 변경하고, 없애는 것도 할 줄 알아야 한다.  


새로운 약속을 정하고 변경하고 폐기하는 활동을 평소 주변 사람들과 생활하면서 자연스럽게 체득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일 것이다. 하지만 저출산과 사교육 등으로 아이 스스로 형제자매나 또래 친구들과의 놀이를 통해서 자연스럽게 경험할 수 있는 기회가 과거에 비해 상대적으로 줄어들었다. 그래서 과거에 비해 부모들의 역할이 더욱 중요하게 되었다. 


그럼 현재 환경이 왜 과거에 비해 아이들이 사회생활을 위해 필요한 약속의 생명주기를 자연스럽게 체험하기 힘들어진 것일까?  


예를 들어 설명하면, 가정에서 아이들이 가장 차지하고 싶은 것은 아마도 엄마의 옆자리 일 것이다. 외동일 때는 언제든지 엄마의 옆자리를 차지할 수 있기 때문에 엄마의 옆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어떠한 노력도 할 필요 없이 단지 엄마의 옆에 앉거나 눕거나 서기만 하면 된다. 가끔 아빠가 조금 거슬릴 때도 있지만 아빠를 챙겨주거나 양보하는 여유도 보여줄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여유들로 엄마, 아빠 심지어 양가 할머니, 할아버지로부터 원하는 것을 손쉽게 얻을 수도 있다. 


하지만 형제자매가 하나 둘 늘어날 때마다 엄마 옆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치열한 다툼이 발생한다. 그리고 아빠에게 양보하는 여유조차 보일 겨를 없이, 각자 위치에 따라 윽박지르거나 칭얼거리는 방법을 쓰기도 하고 돌아가면서 엄마 옆자리를 차지하는 등 각자 상황이나 상태에 따라 타협을 하면서 각자 하고 싶은 것을 하는 방법을 자연스럽게 터득하게 된다. 


또래들과 놀이를 통해서도 마찬가지다. 

요즘 아이들은 유치원 때부터 각종 학원에 다니느라 또래 아이들과 놀 시간이 과거에 비해 상대적으로 줄어들었다. 어떤 부모들은 또래들과 놀리기 위해 학원에 보낸다고 하는데, 학원에서는 학원이라는 제약 때문에 또래들과 놀이를 통해서 스스로 체험하는데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좀 더 쉽게 설명하자면 학교나 학원에서 아이들끼리 다툼이 발생하면 아이들끼리 해결하기보다는 미리 정해진 규칙이나 선생님에 의해서 해결될 가능성이 높다.


과거 내가 초등학교를 다닐 때 방과 후 학교 운동장에서 반 대항 축구를 했던 경험이 있다. 동시에 다른 반 아이들도 운동장에서 축구 등 다른 놀이들을 했다. 많은 아이들이 한정된 좁은 공간에 있다 보니 그만큼 변수가 많았고 그때마다 시시비비를 가리기 위한 논쟁도 많이 했다. 심한 경우 몸싸움으로 까지 번지기도 했지만 결국 나름의 규칙을 정해 또다시 축구를 했던 기억이 있다. 


이런 과정 등을 겪으면서 축구라는 기본 규칙도 물론 익히고 따랐지만 축구를 하기 위해 우리들만의 규칙을 정하면서 자연스럽게 사회생활에 필요한 요소들을 체득할 수 있었다. 물론 축구뿐만 아니라 야구, 오징어 놀이, 구슬치기, 땅따먹기, 고무줄놀이, 술래잡기 등 동내마다 상황마다 조금은 다른 규칙을 만들어 놀았다. 


이렇듯 과거에는 또래들과 많은 놀이를 통해 자연스럽게 사회생활에 필요한 약속의 생명주기를 골고루 체득할 수 있었다. 


그럼 과거와 다른 상황에서 요즘 부모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  

우선 아이에게 부모를 포함하여 ‘어느 누구나 하고 싶은 것은 있고, 그것들을 하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알려줘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부모는 아이가 하고 싶어 하는 것을 무조건 들어주어서는 안 되고, 아이들을 위해서 일방적으로 무조건 포기해서도 안 된다. 마치 형제자매나 또래 아이들이 늘 하는 것처럼 부모들도 똑같이 행동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래야 부모와 아이 모두 하고 싶은 것을 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 지에 대한 대화를 시작할 수 있게 된다.


만약 대화를 통해 가정에서 필요한 적절한 규칙을 정했다면, 그 규칙을 지키도록 가족 모두 노력해야 한다. 단 한 명의 예외 없이 가족 모두 그 규칙을 지켰을 때에만 규칙을 만든 의미가 있고, 아이에게 학습을 하는 의미가 있는 것이니 규칙을 만드는 것에만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으면 한다. 


형제자매를 포함한 또래 아이들 간의 놀이에서 부모는 가급적 간섭하지 말아야 한다. 아이들끼리 서로 의견 충돌이 있더라도 스스로 해결할 수 있도록 기다려 줘야 한다. 만약 아이들 간의 충돌이 발생할 때마다 부모가 간섭을 하게 된다면 아이들은 스스로 해결하기보다는 의견 충돌이 발생할 때마다 부모에게 해결해 달라고 요구하고 부모의 해결 방법이 마음 들지 않으면 찡찡거리는 행동도 하게 된다. 


그렇다고 무력 충돌이 발생할 수도 있는데 마냥 기다릴 수만도 없는 것이 현실이다. 따라서 아이를 잘 아는 부모가 상황을 보고 적절히 수위조절을 하는 것이 필요하다. 다만 아이가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또한 그렇게 한 행동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래서 앞으로 어떻게 했으면 좋겠는지, 다음에 또 그런 상황이 발생하면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지 등에 대해 대화를 하다 보면 해결점을 찾을 수 있다. 그리고 해결점 중에 하나가 바로 약속을 정하는 것이 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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