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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베테랑 택시기사가 길을 잃었다.

by 이은


“아빠. 앞에 사고 났나 봐. 엄청 밀리는데? 30분은 걸리겠다.”


조수석에 앉은 나는 목을 주욱 빼고 저 멀리 뻗어 올라가는 도로를 주시했다. 정말 사고라도 난 건지 그곳은 말 그대로 꽉 막혀있었다. 흘깃 손목시계를 보았다. 남은 시간은 10분. 이 시간 이후에 교문을 통과하면 나는 지각을 한 탓에 7교시 이후 대걸레를 들고 징벌적 청소작업을 해야 할 테다.


“아이고, 이거 어떡하지. 우리 딸 늦겠네.”


하지만 걱정을 가득 담은 말과는 달리 아버지는 한껏 여유 있는 표정을 지으며 오른쪽으로 핸들을 꺾었고 우리는 곧 낯선 골목으로 진입했다. 다닥다닥 붙어있는 빌라 건물들이 창밖으로 빠르게 지나갔고, 양쪽에 틈 없이 주차된 차들 탓에 골목길은 꽤나 좁았지만 아버지는 그것이 무엇이 대수냐는 듯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요리조리 피해 갔다.


그리고 5분 뒤 나는 너무나도 쉽게 학교 교문 앞에 도착했다. 눈 앞에서 마법을 본 듯 우와, 하며 연신 감탄사를 내뱉는 나의 옆에서 아버지는 얼른 교실로 들어가라고 채근하듯 손을 흔들고는 이렇게 말했다.


“뭘 그렇게 놀라? 아빠는 베스트 드라이버였다구. 딸, 오늘도 파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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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 나의 아버지는 택시운전사였다. 회사택시 3년, 개인택시 3년 그리고 모범택시로 13년 도합 19년의 기나긴 경력을 가진 베스트 택시 드라이버. 노란 와이셔츠의 유니폼을 입고 오직 네 개의 바퀴로만 서울 구석구석 방방곡곡을 돌아다닌 아버지는 손님에게 안정된 승차감과 친절한 서비스를 제공해주는 것만으로도 이미 대한민국 1등 기사였다.


그렇다면 실력은 어땠을까, 말할 것도 없다. 손님이 강남에서 강북으로 이동해야 하는 순간 길이 막혀 걱정이라도 하면 마음속으로, 손님 마포대교는 무너졌나요? 돌아서 가면되지요호~,라고 빠르게 결론을 내리고 기어를 잡았다. 그렇게 고객의 니즈 충족을 넘어 감동까지 실현해버렸던 그였다.


택시를 하면서 아버지가 가장 좋아했던 손님의 유형은 바로 장거리 손님. 서울에서 인천을 가는 손님만 잡아도 오늘 장사는 다 끝났다는 마음이 들어 심장이 두근거리는데, 어느 날은 운 좋게 무려 서울에서 대구로 가는 손님을 태워 심장이 터져버릴 뻔했다.


그뿐인가, 장사 수완이 좋았던 아버지는 서울로 올라오는 그 길을 절대 빈차 그대로 돌아오지 않았다. 손님을 내려준 아버지는 택시를 몰고 곧장 대구터미널의 매표소로 향했다. 그리고는 서울행 버스 티켓을 사는 사람들을 유심히 쳐다보다 그에게 슬슬 다가가 어깨를 톡톡 두드리는 것이다.


“혹시, 서울..., 저렴하고 편하게 가고 싶지 않으세요?”


이 키 크고 하얀 사람은 어디서 나타난 거지, 손님의 표정에 의심의 기운이 솟았다. 그러면 아버지는 신뢰도 가득한 웃음(이라고 쓰고 자본주의 미소라고 읽는다.)을 짓고는 손으로 저 밖에 있는 자신의 택시를 가리켰다. 번호판에 당당히 ‘서울’이라고 써진 연두색 택시였다.


아버지는 그 자리에서 서울행 고속버스 대기손님 4명을 꼬셨다. 당시에는 합승이 가능한 시대였고, 아버지는 자신의 택시 안에 단 하나의 빈자리도 허용하지 않은 채 고속도로를 질주했다. 본인은 빈차로 안 돌아가서 좋고, 손님은 편하고 저렴하게 가서 좋고! 이게 바로 상생이지! 그리고 지갑이 빵빵해진 그 날은 당당한 발걸음으로 아내와 아이들에게 종이봉투에 든 고소한 통닭을 내밀 수 있는 그런 날이었다.


실력, 적성, 운까지. 이 정도면 자신은 택시기사를 하기 위해 태어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아버지는 80년대에서부터 90년대 중반까지 서울의 도로를 달리고 또 달렸다. 그리고 마침내 꼬박꼬박 부어놓은 청약이 터져 엘리베이터가 있는 아파트에 당첨이 되었을 때 대출도 없이 당당히 입주할 수 있었다.


영업을 하지 않는 휴무날은 아내와 세 아이 들을 택시에 태웠다. 아빠, 우리 오늘은 여기 가요!라고 눈이 댕그란 둘째가 재잘재잘 떠들어대면 아버지는 알았다, 딸아. 그리로 가마 하며 운전대를 잡았고, 아내가 은주 아빠, 오늘은 저리로 가볼까요.라고 하면 그래요, 그렇게 하죠라고 답하며 그리로 방향을 틀었다. 어린이대공원에서 동물들을 보고 남산타워로 가 케이블카에 몸을 실었던 평온한 나날들.


그리고 퇴근 후, 집에 들어가면 예쁜 아내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세 아이들이 자신의 앞에 서있었던 찬란한 날들이 눈부시게 펼쳐졌다. 아아, 이게 천국일까? 너무나도 완벽한 삶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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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랬던 아버지는 1995년, 자필로 서명을 마친 서류를 공무원에게 내밀었다. 창백한 아버지의 얼굴과는 달리 공무원의 표정은 아무것에 지나지않았다.


“택시 폐업신고서네요. 본인 맞으시죠.”

“네.”


갑작스럽게 본인에게 심장병이 찾아온 이후, 아버지는 수술대에 누웠고 병원생활을 이어갔다. 나는 어릴 적, 엄마와 두 언니들의 손을 잡고 쫄래쫄래 부천 세종병원 내부를 뛰어다녔다. 나는 아버지가 입맛이 없는지 입에도 대지 않은, 그 일말의 간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병원밥의 뚜껑을 열어 너무나도 해맑게 먹어치웠다.


나의 해맑음이 아버지의 눈에 밟혀서였을까, 아니면 해볼만큼 해보고 싶어서였을까, 또 그것도 아니면 빛났던 자신의 과거에 미련이 남았던 것일까. 아버지는 퇴원 후 다시 한번 택시 운전대를 잡았었다. 그러나 마치 자신이 마주한 인생처럼 운전대는 맘대로 잡혀주지 않았다. 숨이 차오르고, 체력이 되지 않았으며, 원래 힘이 없었던 다리가 더 말을 안 들었다. 결국 1995년, 아버지의 말이었던 택시는 다른 주인을 찾아갔다.


“여기, 주문하신 우동 한 그릇 나왔습니다.”


세월이 흘러, 경제적 가장의 역할을 어머니에게 내어주게 되었을 때 몸이 조금 나아진 아버지는 행운분식 안에서 서빙을 도와주고, 음식의 재료를 사기 위해 시장을 봐주었으며, 장사를 끝내고 녹초가 된 아내를 차로 이끌어 집에 데려다 주는 일 따위를 했다. 그러나 어쩔 수없이 하루는 머리가, 하루는 다리가, 하루는 가슴이 아픈 아버지는 여전히 그런 사람이었다.


집 안에 늘 아픈 사람이 있다는 것. 평범한 가정이 보기에는 그 자체가 특별한 일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정작 그 안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그저 일상의 한 부분에 불과할 뿐이다. 아버지는 365일 아프다라는 말을 달고 살았다. 우리 세 자매에게 그 아프다는 말은 어느새 점점 무뎌져 오늘은 좀 덥네요, 오늘은 좀 춥네요. 같은 그저 그런 말처럼 들리기 시작했다.


오히려 우리의 눈에는 엄마가 아버지의 약값을 벌고 자식을 키우느라 행운분식을 지키며 고생하는 사람이었고, 아버지는 그냥 집에 있는 사람으로 비쳤다. 그러니까 엄마가 고생하는 건 그리고 엄마가 어쩌다 아픈 건 다른 가정들과는 달리 돈을 벌지 못하는 아버지의 유책이 크다는 마음이 슬슬 피어났으며 우리 세 자매는 조금씩 엄마를 챙기는 반면 아픈 아버지는 돌아보지 않게 되었다.


우리는 아빠, 오늘은 여기로 가요 라고 했던 과거와 달리 아빠, 왜 오늘은 여기로 갔어? 내가 그렇게 하지 말라고 했잖아, 아빠는 대체 뭐 하는 거야.라는 식으로 현재를 살아가기 시작했다. 우리는 그 과정에서 서로 분노하고, 외면하고, 또 왜 우리는 이렇게 살아야 하는 걸까라고 울기도 하며 서로에게 주고받은 상처를 마음한켠에 켜켜이 쌓아올려갔다.


그럴 때마다 엄마는 무던히 노력했다. 아버지가 집에 없는 틈을 타 우리 세자매를 불러 그의 찬란한 과거와 감내했던 희생과 아버지의 역할과 자리에 대해 상기시켜주곤했던 것이다.


큰애랑 작은애, 그리고 막내까지 이리 다 와봐. 너네, 아버지 무시하지 마. 아버지는 아버지야. 너네 이렇게 사는 거 너희가 알아서 큰 것 같니? 결코 아니야. 아버지가 지금은 편찮으시지만 예전에는 택시 하면서 우리 가족 다 먹여 살렸어. 입 네 개를 먹여 살리는 게 쉬울 것 같아? 맥이기만 했니? 매일같이 일하면서 아파트 한 채도 장만하고, 너네 학교, 학원 다 보냈어.

그리고 지금도 그래. 아버지 없으면 가게 안 돌아가. 시장 봐주는 게 그렇게 쉬운 일도 아니고, 엄마 힘들 때 도와주기도 잘 도와줘. 다시 한번 말하지만, 아버지 무시하지 마. 아버지는 아버지야.




가끔 운전을 하다보면 나도 모르게 익숙한 길을 지나쳐 이상한 길로 들어설 때가 있다. 설상가상 어느 이름도 모르는 동네로 흘러들어가 네비게이션까지 먹통이 되는 순간을 직면하곤 한다. 그러면 나는 내 자신에게 너무나도 화가난다. 왜 그 길을 그냥 지나쳤는지, 왜 같은 길을 뱅뱅 도는지 이유를 모르는 이유로 자괴감에 사로잡히는 것이다.


인생이란 놈은 참 얄궂어서 우리를 어느 날 갑자기 낯선 길로 인도해버리고는 본인은 모른 척 숨어버린다. 그래서 많은 이들은 길을 잃는다. 그건 베테랑 택시 드라이버였던 우리 아버지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제와 생각해보니 우리는 그런 아버지를 두고 뒷좌석에 앉아 왜 제대로 가지 못하냐고 마구 몰아친 사람들이었다. 충분히 스스로에게 귀책을 물었던 사람에게 말이다.


우리는 왜 아버지에게 괜찮다, 이해한다, 힘들었겠다라는 말을 하지 못했을까. 대체 무엇때문에. 그리고 왜 이제야 나는 예순이 넘은 아버지의 작은 어깨가 눈에 들어오는걸까. 아버지는 아버지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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