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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색내기 따위가 집안내력이라니

by 이은

어느 평화로운 일요일 오후였다. 남편은 사회인 농구모임을 나갔고, 소파 위에 널브러진 채 핸드폰만 쥐고 있는 내 주변에는 강아지 두 마리만이 유유히 맴돌 뿐이었다. 화면에 검지 손가락을 툭툭 쳐대며 유튜브 화면을 보고 있는데 그 너머로 바구니에 산처럼 쌓인 욕실 앞 빨래들이 보였다.


속에서 숨이 하, 하고 터졌다. 그렇지, 아무리 주말이라도 세상이 나를 이렇게 평화롭게 놔둘 리가 없지. 평일에 나의 몸을 둘러싼 저 시체 같은 옷들에게 새 생명을 부여해주어야 나도 다음 주에 평탄한 회사생활을 이어갈 수 있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소파에서 굳은 몸을 일으켰다.


세탁기의 버튼을 누르고 베란다 문을 닫으며 터덜터덜 걸어 나왔다. 그런데 이번에는 설거지통에 엄청나게 쌓인 그릇들이 나에게 인사를 했다. 어서 와, 이런 방대한 양은 처음이지? 이제 조금만 더 미루면 초파리들이 너와 함께할 거야.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직장인이라면 응당 주말에 미뤄둔 집안일과 일방적인 데이트를 해야 하는 운명 아니겠니. 이리 와 그릇들아, 언니가 사정없이 놀아줄게. 하며 싱크대 앞으로 다가갔다. 그나저나, 이게 다 돈이었으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생각도 잠시, 그저 빨리 해치우고 싶은 나는 핸드폰으로 다비치의 8282를 틀고 열심히 소리를 지르며 전투적으로 그릇을 닦기 시작했다.



Give me a call, baby baby! 지금 바로 전화 줘. 날, 울리지 마. 너어어어-!



얼마 후, 나는 다시 한번 소파에 축 늘어졌다. 베란다에는 방금까지 내가 욕을 하며 널은 빨래가 보였다. 빨래로 시작해 빨래로 마감한 집안일. 조금 지쳐 살짝 눈을 붙이려는데 귓가에 반가운 도어록 소리가 들렸다. 잠시 뒤 농구복을 입은 채 땀이 범벅된 남편이 집안으로 저벅저벅 들어서고 있었다. 나는 늘 그렇듯 남표언-, 하며 그를 불렀고 그동안의 나의 시간을 마치 알아달라는 어린애처럼 굴기 시작했다.



오빠, 나 오빠 없는 동안 설거지도 하고, 빨래도 돌리고, 빨래도 널었어. 그리고 인덕션도 닦았어! 아, 그리고 빨래도 갰어! 이제 오빠는 월화수목금 다른 색의 팬티를 입을 수 있다구!

아이고, 그랬어? 같이하지 왜 혼자 했어. 고마워.

오빠, 나 배고파.

알았어. 뭐 해줄까? 삼겹살? 제육볶음?

둘 다.

콜.







오랜만에 남편과 함께 친정으로 향했다. 문을 열자마자 맛있는 냄새가 벌써 내 후각을 자극하기 시작했다. 나는 거실에 있는 큰언니와 형부, 그리고 아버지에게 후딱 인사를 하고는 잽싸게 부엌으로 향했다. 킁킁, 이건 분명히 우리 엄마 닭볶음탕 냄새인데라는 생각도 잠시, 역시나 그녀가 가스레인지 앞에서 국자를 들고는 닭볶음탕의 간을 보는 것이 아닌가. 오 마이 갓, 이 얼마나 오랜만에 맛보는 김여사의 닭볶음탕인가! 만세!


곧이어 옹기종기 식구들이 모여 앉은 식탁 가운데로 엄마가 큰 냄비를 턱 하니 올렸고, 뚜껑을 올리자 뜨거운 김이 경쟁하듯 올라갔다. 그것도 잠시 백종원도 모자라 백종원 할아버지도 울고 갈 닭볶음탕이 우리의 시선을 붙잡았다. 그리고 다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다리든 날개든 하나씩 접시로 옮겨 만찬을 즐기기 시작했고, 우리는 대화를 이어갔다.



나 - 닭볶음탕 너무 맛있다, 엄마.

엄마 - 응, 많이 먹어. 이서방도 많이 먹고. 이거 너네 온다고 내가 가게에서 재료 가지고 와서 다 한 거야.

남편 - 네, 장모님. 잘 먹겠습니다.

큰언니 - 은주야, 나도 매제 온다고 어제 이 집 싸악 치워놓은 거 너는 모르지? 이곳저곳 쓸고 닦고, 정리 다하고 그랬는데 아빠는 하나도 안 했어. 아빠는 오히려 왜 물건을 괜히 이곳에서 저곳으로 치워가지고 찾기 힘들게 하냐고 막 짜증을 내는 거야.

아빠 - 나도 며칠 전에 내가 수건 싸악 삶고, 빨래도 널고 개고 다 했다.

나 - 어우, 다들 시끄러워 증말. 엄마, 내가 오는 길에 상가 앞에 과일 파는 고릴라에서 복숭아 사 왔거든. 시식해보니까 맛있더라. 꼭 먹어.

엄마 - 거기 맛있지. 뭐하러 사 왔어. 돈도 없으면서.

아빠 - 그럼, 밥 먹고 복숭아 깎아 먹으면 되겠다.

큰언니 - 나 다섯 개만 가져갈게. 우리 아들이 복숭아를 너무 좋아해. 엄마 이 갓김치는 뭐야. 갓김치 너무 맛있다.

엄마 - 응, 갈 때 가져가.



일관성이라는 건 찾아볼 수 없고, 자기 하고 싶은 말만 가득한 대화들이 오고 갔다. 그동안 아버지는 닭뼈를 발라 내 접시에 살코기를 놔주었고, 나는 자연스레 그것을 받아먹고 있었는데 흘깃 옆으로 시선을 던지니 자기 혼자 무엇이 그렇게 웃기는지 방실방실 미소를 짓고 있는 남편이 보였다. 나는 남편이 닭볶음탕이 매우 맛있어서 실성을 했나 보다,라고 생각하며 마저 살코기를 뜯었다.


이런저런 일상적인 대화가 오고 간 다음 우리 가족은 텔레비전 앞에 둘러앉아 복숭아를 깎아먹었다. 그리고 그간 행운 분식의 고마운 손님들과 서운한 손님들을 이야기한다거나 우리 세 자매의 흑역사를 재조명하는 등의 따위로 시간을 보냈다. 저녁이 되고 해가 지자, 남편과 나는 인사를 하고 집을 나섰다. 두 손에는 엄마가 싸준 물김치와 과일들이 또 한가득이었다.


사이드미러로 우리를 향해 손을 흔드는 엄마 아빠를 뒤로하고 계산동을 떠났다. 계산동은 고속도로와 바로 맞닿아있어 출발한 지 5분도 지나지 않아 마을의 품에서 너무나도 서운하게 벗어난다. 때로는 그 사통팔달 교통의 요지라는 게 참 싫을 때가 있다. 올림픽대로로 진입한 뒤 쏠듯이 직행하던 차가 어느새 슬슬 속도를 줄이고 있었다. 연속적으로 줄을 선 가로등과 전방을 막아선 무채색 차들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빨간 브레이크등이 만연히 우리 앞에 수놓아졌다. 잠자코 있던 내가 적막을 깨고 남편에게 말을 걸었다.



오빠, 닭볶음탕 맛있었지?

응, 정말 맛있더라. 나 두 그릇 비웠잖아. 너무 배불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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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배가 부른 지 인상까지 쓰며 자신의 배에 두 손을 올리고는 이야기를 하던 남편이 갑자기 무슨 생각이 났는지 풉, 하고 웃기 시작했다. 나는 영문을 몰라 남편을 쳐다보기만 할 뿐이었다. 닭볶음탕에 두 그릇을 먹어치운 것이 웃긴 건가? 아니면 자신의 남산만 한 배가 웃긴 건가? 그걸 이제 알았나? 당최 뭐가 웃긴 건지 몰라 '왜요, 왜 웃는 건데'라고 물어보며 남편의 대답을 채근하기 시작했다. 남편은 웃음을 겨우 멈추고 입을 열었다.



아니, 평소에도 은주 네가 오늘은 설거지를 했다는 둥, 빨래를 개었다는 둥 이런 이야기를 일기 쓰듯이 나에게 이야기를 하는 편이잖아.

응, 그렇지.

오늘 느낀 건데 다들 성향이 비슷하신 것 같아. 자신들이 무슨 일을 했는지 모두 다 스스로 말씀하시잖아.



정말 우리 가족이 그랬나. 나는 오늘 스스로가 지나온 시간들을 천천히 복기하기 시작했다. 잘 생각나지 않는 기억을 더듬더듬 만져보니 곧 어느 지점에서 혼자 식탁에서 미소를 짓던 남편이 생각났고 낮에 나누었던 가족들의 대화가 생각났다. 아아, 그거였구나. 누가 묻지도 않았는데 집을 전부 치웠다는 큰언니, 빨래를 삶았다는 아버지, 이에 지지 않는다는 듯이 달달한 복숭아를 사 왔다고 기어코 말하는 나까지. 그러고 보니 주말에 열심히 집안일을 하고 오빠한테 무엇을 했는지 말해야 직성이 풀리는 나의 습관과 꼭 닮아있었다.



"그러고 보니, 우리 가족 정말 자연스럽게 생색을 잘 내는 편이네. 이것도 집안 내력인가? 진짜 웃기다."



어떻게 집안 내력이 생색내기가 될 수 있는 건지 남편과 이야기를 나누며 어이가 없어 웃음이 터졌다. 정말로 우리 집의 모든 가족 구성원은 누가 알아보고 먼저 칭찬을 해주기도 전에 자신의 성과를 먼저 고백했다. 그리고 오늘 식사자리에는 없었지만 작은언니는 이보다 더하면 더한 생색의 대가였다. 나는 남편의 옆에서 무언가 대단한 발견을 했다는 듯이 놀라워하고, 또 그런 우리 가족이 귀여워서 올림픽대로를 타는 내내 신기해하며 웃었다.



그러다 문득, 우리 가족이 왜 그런 습관을 가지게 되었을까라는 궁금증이 몰려왔다. 어렴풋이 어렸을 적을 생각해보면 우리 아버지 또한 묵묵하게 택시만 운전하셨지 이렇게 생색을 내는 편은 아니었는데 말이다. 그때, 한참 생각에 잠겨있던 나의 머릿속에 초등학교 시절의 장면 하나가 스쳐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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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청소기 돌리고 빨래 널을 테니, 둘째 너는 설거지하고, 막내는 빨래 개.”


초등학교 2학년 무렵이었나, 당시 고등학생이었던 큰언니는 꼭 작은언니와 내가 텔레비전에 한참 빠져있을 때 예고도 없이 일어나서 저런 말을 했다. 다 끝나가는 드라마도 다음 편 예고가 없으면 시청자들의 원성을 사는데, 언니는 왜?


아니, 그리고 민주주의 사회에서 이게 말이 되는 일인가? 치우고 싶은 사람이 치우면 되지, 왜 우리는 항상 같이 치워야 하는 건지, 그것도 큰언니가 치우고 싶은 타이밍에만 맞추어서! 그녀의 의지대로만 따라야 하는 이 질서가 무너진 가정이 정말 정상적인 가정인지 늘 궁금했지만 난 그냥 구석에서 조용히 그녀의 명령을 실행하며 빨래를 갤뿐이었다. 작은언니는 안 한다는 소리는 안 했지만, 괜히 심통이 나는지 뭐라도 한마디 거들며 큰언니에게 대들기 일쑤였다.



나 설거지 싫어. 언니가 해. 내가 빨리 널 꺼야.

그럼 네가 청소기도 돌려.

싫어!




어린 나는 늘 반복되는 저들의 싸움을 지긋지긋하게 지켜보며 자랐다. 이럴 경우 결국 큰언니는 빨래 널기를 양보하고 설거지와 청소기 돌리기를 가져왔으며, 작은언니는 저 하고 싶은 것을 하다가 결국 귀찮아지면 나한테 스스로의 할 일을 미루는 쪽으로 결론이 났다. 그렇게 우리는 늘 한바탕 하고 부모님이 안 계시는 집을 싹 치우고 나서 다시 텔레비전을 보았다. 그러고 나서 엄마와 아버지가 퇴근하고 들어오면 언니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입을 열어 합창했다.



“엄마, 우리가 집 싹 치워놨어.”

"엄마, 내가 빨래 갰어."

"엄마, 나는 설거지했어."

"엄마, 집에 먼지가 얼마나 많았는지 알아? 청소기 싹 돌리고 난리도 아니었어. 우리 한 시간이나 청소했어."



우리가 둥지 안 아기새들처럼 짹짹대며 엄마에게 무엇을 했다고 입을 벌렸고, 그녀는 지친 기색으로 슬쩍 미소를 지으며 이 말만 하고 안방으로 들어갔다.



“아이고, 깨끗하네. 잘했어.”



비단, 우리만 그런 건 아니었다. 아프신 아버지도 그랬다. 매번 경제적 가장인 엄마에게 오늘 아침 작은애랑 은주 밥 해맥여서 학교 보냈다, 은주 학교를 태워다 주고 왔다, 오늘은 베란다 청소를 했다 등의 이야기를 습관적으로 엄마 앞에서 꺼내시곤 했다. 그러면 엄마는 그저 응, 잘했네요.라는 답만 해줄 뿐이었다. 그녀의 별다를 게 없는 반응에도 아버지와 우리 세 자매는 계속 저런 행동을 반복했다. 그리고 지금 생각해보면, 그건 우리와 엄마만의 언어와 같았다. 우리는 이런 말을 하고 싶은 게 아니었을까.



엄마, 힘들죠? 엄마가 없어도 우리 집은 잘 굴러가고 있으니 이 곳의 살림은 신경 쓰지 말고 행운 분식의 자리를 잘 지켜주세요. 집에 와서 편하게 쉬며 재충전하시고요.

여보, 내가 할 수 있는 게 겨우 이것밖에 없지만, 이거라도 열심히 해볼게. 아이들은 걱정 말어.








몇 달 전인가, 엄마가 옆집 빵집 사장님과 한참 이야기 중인 것을 엿듣게 되었는데 대략 이런 내용이었다.


빵 사장, 요 며칠 전에 집에 가서 청소기를 돌리려고 했는데 아무리 찾아봐도 이걸 어떻게 켜는지 모르겠는 거야, 아 그래서 포기했지. 아이고, 집에 가면 정말 아무것도 몰라. 심지어 거기서는 가스레인지 켜는 방법도 모르겠어. 분식집에서만 있으니 뭘 아나. 난 그 집에만 20년 살았는데 하이 고오, 우리 집이지만 참 우리 집을 몰라. 어쩔 때는 불 켜는 방법도 모르겠다니까.


그 말을 듣고, 제일 먼저 든 생각은 참 다행이다, 라는 것이었다. 난 행운 분식을 지키는 엄마가 집안에서 살림까지 하며 청소기 돌리는 법마저 알았다면 정말 슬펐을 거다. 그리고 우리 가족은 오늘도 여전히 각자의 위치에서 무언가를 하고 누군가에게 생색을 낼 거다.


생색내기 따위가 집안내력이라니.

그래도, 이런 집안 내력이라면 꽤 괜찮은 편 아닐까.




<작가의 말>

남편은 집안내력이 아니라 집안'매력'이라고 하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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