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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매 사이에도 지켜야 할
선이 있다.

by 이은

세상에는 엄연히 넘지 말아야 할 선이 존재한다. 일본이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고 우긴다든지, 식사자리에 같이 앉아있는 사람들이 부먹파인지 찍먹파인지 물어보지도 않은 채 자기 멋대로 탕수육에 소스를 부어버리는 일은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일이다.


그렇다면 자매 사이에 넘지 말아야 할 선은 무엇일까? 바로 옷이다. 혹자는 '아니, 자매 사이에 옷이야 서로 나눠 입고 그러면 되는 거 아닌가'라고 아주 쉽게 생각할 수 있다. 그래, 백번 양보해서 그럴 수 있다고 치자. 그렇다면 이 경우는 어떠한가? 내가 아직 개시도 안 한 옷을 누군가 허락도 맡지 않고 입고 나갔다면? 이건 아주 중요한 문제다. 특히나 이 혈연관계에서는.


동생이 언니의 옷을 그렇게 입었다면 엄청난 하극상이 일어난 것이고 언니가 동생의 옷을 그렇게 마음대로 다루었다면 권력남용 및 인권모독으로 볼 수 있다. 나는 이런 비참한 일이 우리 집에서 그것도 아침 댓바람부터 일어났다는 사실이 참 씁쓸할 뿐이다. 그러니까 나는 아직도, 그때를 생각하면 마치 엑소시스트의 주인공이 된 것 마냥 침대에서 앉았다 누웠다를 반복하며 분노를 삼킨다. 이것 보세요, 지나가는 사람들. 내 말을 들어보시라.






나는 여자치고는 유난히 키가 크다. 특히 다리가 매우 긴 탓에 아시안핏에 맞춰진 우리나라 브랜드나 동대문시장 같은 곳에서는 바지를 살 수 없었다. 이상하게 그것들을 내 몸에 걸치면 밭 중간에 서있는 허수아비가 입은 옷마냥 전부 다 촌스러운 칠부바지가 되어버렸으며 새 옷임에도 불구하고 누군가에게 얻어 입은 듯하였다. 지금은 해외 SPA 브랜드들이 긴 기장의 바지를 마켓에서 꽤 많이 선보이고 있고 저렴하기까지 해서 별 걱정은 없지만 대학생 시절까지만 해도 전혀 그렇지 않았다. 또, 주머니 사정 또한 좋지 않았고 내 눈에는 브랜드 옷들의 가격은 터무니없이 비싸 보이기까지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큰 맘을 먹고 매장에 들어갔다. 아직도 생각난다. 베이지색 슬랙스였는데 시착을 해보니 복숭아뼈까지 내려오는 기장이 딱 좋아 기분이 좋았다. 나는 슬며시 허리춤에 있는 택을 들었다. 역시나, 문제는 가격. 그때의 나는 어린 대학생이었으니 티셔츠도 만 원짜리만 골라서 입었을 때였는데, 내가 예상한 금액보다 훌쩍 넘어선 상태였다. 아, 이걸 어쩌지 하며 생각하던 나는 오랜 고민 끝에 '질 좋은 옷은 오래 입는다'라는 합리적인 의식의 흐름을 억지로 만들어낸 뒤 카운터로 향했다. 집으로 온 나는 쇼핑백에서 바지를 꺼내 슬쩍 내 몸에 대보고는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고, 아이를 다루는 듯한 조심스러운 손짓으로 고이 접어 옷장에 개켜두었다. 적어도 나에게 그것은 구찌님이셨고 샤넬님이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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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뒤, 주말. 나는 아침부터 비몽사몽한 의식을 붙잡고 터덜터덜 거실로 나왔다. 소파에 앉아 KBS1의 남북의 창이라는 프로그램을 통해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보고 있는 큰언니와 아버지 중간에 자리를 잡았다. 오랜만에 집에 온 형부는 거실 바닥에 앉아 가만히 핸드폰을 하고 있었고 방문 사이로 출근 준비를 하는 작은언니가 머리를 말리는지 드라이 소리가 가득 새어 나오고 있었다.


이윽고, 나의 시야로 출근 준비를 끝낸 작은언니가 들어왔다. 은근히 옷에 관심이 많았던 터라 오늘은 언니가 출근룩으로 무슨 옷을 입었나 하고 아래위로 스캔을 하는데, 어디서 많이 본 바지가 눈에 띄었다. 그녀의 발을 살짝 덮은 베이지색 슬랙스.



설마, 저거 내거니? 내가 내 손을 벌벌 떨면서 세종대왕 몇 개를 옷가게 카운터에 내밀고 산 내 거?

내가 개시도 안 한 내 바지?



나는 내 속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화산재의 기운을 느꼈다. 이런 나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언니는 거실에 있는 전신 거울 이곳저곳에 자신의 몸을 비추고 있었다. 아아, 그러고 보니 케이블채널에서 하는 뷰티 프로그램 겟잇뷰티에서 그랬지. 패션은 당당한 애티튜드가 필요하다고. 그런데, 그건 자기 옷을 입고나 그래야 하는 거 아니요? 거, 동생 옷 입고 그러는 거는 좀 반칙 아니오, 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그래, 침착하자. 사실상 선을 먼저 넘은 건 언니지만 아직 밖으로 나가지 않았고 충분히 합의할 수 있는 시간이 있다고 생각했다. 나는 채널을 돌리던 리모컨을 꼬옥 쥐며 말했다.



- 언니, 그 바지 나 아직 한 번도 안 입었어. 벗어.

- 야, 나 지금 출근이다. 조용히 해라.



이런 신발끈, 지금 나랑 전쟁하자는 거지. 뭔가 심상치 않음을 느꼈는지 가만히 핸드폰을 보고 있던 형부가 우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렇지만 정작 당사자인 작은언니는 내 말이 귓전에도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난 다시 한번 경고사격에 들어갔다.



- 언니, 나 그 바지 단 한 번도

- 야. 시끄럽다고. 출근한다고. 나 지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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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안녕하십니까. 여기는 행운 분식 배 여자 격투기 중계 현장입니다. 행운 분식의 둘째 딸 대 막내딸 이은주, 이은주 대 둘째 딸. 감독님은 오늘 경기, 어떻게 보십니까?



아주 흥미로운 경기예요. 일단 둘째 딸 선수 이력이 상당하지 않습니까? 신촌 모 여대의 체육학과를 졸업하고, 현재 취미로는 태권도 수련 중인 걸로 알고 있어요. 바로 어제 초록띠를 땄다고 들떠있었는데, 과연 어떤 태권도 스킬을 쓸지 귀추가 주목됩니다.



맞습니다. 감독님. 제가 알기로는 둘째 딸 선수는 초등학교 때 육상선수 이력도 있는 걸로 알고 있는데요. 그에 반해서 이은주 선수 어떻습니까.



사실 이은주 선수는 키 빼고는 이렇다 내세울 게 없는 선수인데요. 체격도 글쎄요. 별명이 젓가락, 뼈다귀, 이쑤시개 등등인 걸로 보아서는 뭐 그렇게 위협적이지는 않고요. 아, 둘째 딸 선수와 비슷한 태권도 이력은 있네요. 그런데 이게..., 초등학교 시절 태권도를 하면서 노란띠를 땄지만 당시 심사과정에서 특혜의혹이 불거졌어요. 거의 학원 관장이 봐주다시피 해서 딴 수준이라는 설이 있습니다. 특히나 이런 격투기 하고는 아주 거리가 먼데 무슨 뚝심으로 링 위에 올라왔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어쨌든 반전이 있을 수도 있는 것 아닙니까? 말씀드리는 순간 둘째 딸 선수! 이은주 선수의 머리채를 잡았어요. 이은주 선수 역시나 이곳저곳 흔들리네요. 거의 태풍 맞은 나무 수준입니다.



네, 역시나 경기가 예상대로 둘째 딸 선수 위주로 흘러가네요. 감독님, 경기장 옆으로 보이는 저 슬로모션 화면 좀 설명해주시죠.



아 저 화면이요? 경기는 이은주 선수가 출근 준비를 하는 둘째 딸 선수에게 먼저 팔뚝을 잡고 놔주지 않는 것으로 시작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저렇게 마구 흔들리는 이은주 선수가 무슨 깡으로 팔뚝을 먼저 잡고 흔들었는지 모르겠네요. 하룻강아지 범무서운지 모르죠, 어려서 용감한가 봅니다.



아, 네 말씀드리는 순간, 이은주 선수 긴 팔을 쭉 뻗어 둘째딸 선수 머리채를 잡았어요. 발도 막 들어서 둘째딸 선수 엉덩이를 때리는데 뭐 그렇게 타격감은 없네요. 율동 수준인가요? 소녀시대의 소원을 말해봐 안무 같기도 한데요!






어느새 정신을 차려보니 작은언니와 나 중간에는 형부가 큰 숨을 쉬며 자리 잡고 있었고, 작은언니는 엉망이 된 머리를 쓸어 넘기며 나를 노려보았다. 나도 지지 않고 언니를 쏘아보았는데 출근시간이 다 된 탓에 그녀는 자기 화를 주체하지 못하고 소리를 막 지르더니 쌩하고 돌아서 현관문을 열고 나갔다. 내 바지를 기어코 벗지 않은 채.


이 사달을 모두 목격한 아버지는 남북의 창에서 본 남북관계보다 더 나쁜 우리를 돌아보며 자동차 키를 쥐었다. 그리고 사라져 버린 작은언니를 찾기 위해 나갔다. 현관문이 닫히자마자 형부와 큰언니가 지켜보는 가운데 나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엉엉 울었다.



내 베이지색 슬렉스으으, 엉엉, 나 저거 진짜 한 번도 안 입었단 말이야, 흑흑. 저거 비싼 거란 말이야아아.



큰언니는 싸움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겨진 늘어진 티셔츠를 입은 나를 일으켜 주었고, 엉망이 된 머리도 정리해주었다. 그러나 나의 울음은 뭐가 그렇게 서러운지 멈추지 않았다. 사실 한두 번이 아니었던 것이다. 작은언니는 큰언니 옷도 입고 나의 옷도 입었는데 유난히 내 옷을 입을 때는 매너가 없었다. 입고 빨지도 않은 채 그냥 아무 데나 툭 던져놓는 것은 기본이고, 심지어 말도 안 하고 입었다.


내일 내가 저 옷을 입어야 하니 빨래를 하라고 하면 네 옷을 네가 빨아야지 왜 언니를 시키냐고 말하는 아주 낯이 두꺼운 사람이었다. 그러다가도 내가 자기 옷을 입으면 난리가 났다. 드라이를 헤오라는 둥 다리미질을 하라는 둥. 아무튼 이렇듯 우리에게 옷 싸움은 세상의 모든 자매가 그러하듯이 어렸을 때부터 해왔던, 그래서 아주 오래된 역사와 유구한 전통을 자랑하는 예민한 문제였는데 그 날 언니가 나의 샤넬님이자 구찌님을 넘보기 시작한 순간 무의식적으로 팔뚝을 잡아버린 것이었다.


내가 어느 정도 진정이 되었을 때, 형부는 크게 한숨을 쉬며 뒷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조심스럽게 내 앞으로 오만 원을 내밀었다. 처제, 이거 가지고 바지 새로 사, 라면서. 나는 서러움의 딸꾹질을 하면서 그것을 그대로 주머니에 넣었다. 그러나 차마 이 말은 하지 못했다. 형부. 고마워요. 우리 언니랑 나랑 싸운 건데 왜 형부가 돈을 주는지는 모르겠어요. 근데 형부, 그거 오만 구천구백 원짜리라서 사려면 살짝 모잘라요. 그래도 감사해요.






<작가의 말>

9,900원 내놔. 바지 사야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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