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J의 사랑
커피를 미지근하게 마시는 사람은 무조건 피하는 게 좋다. 카페에서 커피를 주문할 때, ‘뜨거운 아메리카노에 얼음 세 개만 띄워주세요.’ 하는 부류의 사람 말이다. 뜨거운 커피를 시켜놓고 크레마*가 다 사라지도록, 뜨거운 김이 뭉게뭉게 흩어지도록 방치해 놓는 사람. 남들은 음료를 다 마셔 빨대로 잔 밑바닥을 긁고 있는데 자기 혼자 느긋하게 뜨거운 커피가 식기를 기다리는 사람. 그 사람은 심성이 고-약할 가능성 백 퍼센트, 아니 이백 퍼센트다. 수년간 관찰 끝에 어느 온도에서 커피가 입 안쪽의 여린 피부를 거슬리지 않게 하면서도 미약하게 남아있는 온기가 원두의 향을 코까지 밀어 올려주는지를 파악한 사람. 좋고 싫음이 너무 명백해서 좀처럼 완고한 취향의 궁전 대문을 열어주지 않는 사람 말이다. 이런 인간들은 대개 자기만의 규칙이 많아 예민하고 이기적이고 심지어 잘 삐치기 마련이다. 어떻게 아냐고?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이런 사람도 절대로 피하는 게 좋다. 필통에 똑같은 종류의 펜인데 굵기만 다른 것으로 한가득 갖고 있는 사람. 이런 사람은 취향도 완고하지만, 심지어 우유부단할 가능성까지 있다. 아니, 우유부단하다. 이 사람이 글을 쓸 땐 아주 진풍경이 벌어진다. 일단 종이에 닿는 펜촉의 질감이 마음에 들 때까지 필통에서 펜을 꺼내 들었다 다시 넣기를 적게는 세 번, 많게는 일고여덟 번 반복한다. 겨우 펜을 골랐다면 그게 시작이다. 펜이 미끈거려 모음이 정지선을 지키지 못하고 주욱 밀려 나가기라도 하면...! 종이가 생각보다 뻑뻑해 얇은 펜촉이 종이 표면에 걸려 넘어지기라도 하면...! 이 사람은 고새 마음이 싱숭생숭해져서는 또다시 필통을 뒤지기 시작한다. 완벽한 순간을 위해 만발의 준비를 해놓지 못하면 초조해하는 사람. 매일 타는 출근길 버스에 오를 때조차 여름엔 울창한 나무가 보이는 왼쪽 창가에, 가을엔 자줏빛 핑크뮬리가 잘 보이는 오른쪽 창가에 앉기로 계획하고 기어코 그 풍경들을 얻어내고 마는 사람. 아, 생각만 해도 피곤하고 지친다. 이런 사람을 왜 피해야 하냐고? 말해 뭐해~ 묻고 따질 일도 아니다.
이런 사람은 또 어떤가. 회사에서 퇴근하고 피곤함에 절어 있는 와중에도 당장 불어오는 바람의 선선한 정도가 너무 좋다며 근처 공원으로 달리러 나가는 사람. 좋은 기회가 찾아오면 만사 제쳐두고 그걸 붙잡기 위해 앞뒤 계산 안 하는 사람. 듣자마자 ‘참 비호감이구나’ 판단했겠지만, 굳이 피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해주자면 이런 사람의 충동에 휘둘리다가는 몸과 마음 죄다 거덜 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이 사람이 오지랖까지 타고났다면… 정말 난리도 아닐 거다. 그 좋은 기회를 함께 나눠야 한다며 당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본인의 충동 여행에 동행하기를 강요할 게 뻔하다!
그런데 이런 사람이 갑자기 당신의 커피 마시는 속도에 맞추겠다며 뜨거운 김이 펄펄 나는 커피를 후릅 마셔 버린다거나, 당신과 있을 때만큼은 김가네에서 모르고 들고 온 모나미 펜 갖고도 문장들을 척척 써 내려간다거나 한다면…. 당신은 아주 곤란한 상황에 부닥쳤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평소와는 다른 저 모든 행동들은 그 사람이 당신을 좋아한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자신이 일궈 놓은 규칙에 당신이 균열을 만들 때마다 그 사람은 기쁨의 비명을 꺅꺅 내지를 것이다. 규칙들에 아주 그냥 금이 가고 무너져내려 그곳에 당신을 초대할 자리가 만들어지기를 바라고 있을지도 모른다. 당신이라는 커다란 목적 앞에 사사로운 수단 따위 신경 쓰지 않게 된 자신의 모습에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을 모습이 눈에 선하다.
만약 당신이 죽어도 그 사람 마음을 받아주기 싫다면 일찌감치 난색을 보이는 게 좋다. 그런데 아주 조금이라도, 아주 쪼끔 이라도 그 사람에게 흥미가 있다면, 그 고약한 사람의 관심과 애정을 한 번쯤 받아보는 것도… 인생 길게 봤을 때 그리 나쁜 일은 아닐 것 같다. 좋고 싫음이 분명한 그 사람은 자신이 당신을 좋아한다는 그 이유 하나만으로 온 세상에 ‘당신이 좋은 사람’임을 증명해내고 말 테니까. 심지어 당신이 있어 꽃들이 피는 거고, 당신의 마음이 울렁거리기 때문에 노을이 빨간 거고, 당신이 그런 게 느끼기 때문에 소라에서는 파도 소리가 들리는 거라고 뻔뻔하고, 똑똑하게 설명해내고 말 테니까.
그래서 내가 뭘 안다고 자꾸 이 사람을 피해라 말라 하고 있냐고? 그건 사실 말이다. 아, 잠깐! 아까 내려놓은 커피가 이제야 적당히 식은 것 같다. 커피 한 모금만 마시고 말해주겠다. 하~ 혀가 편안해하는 이 적당한 온도! 딱 좋다니까. 아, 그래서 내가 어떻게 이런 사실들을 알게 됐냐면 말이다. 아, 잠깐! 글을 쓰다 보니 펜이 아무래도 너무 굵은 것 같다. 잠깐... 어디... 보자... 그래! 이게 딱 맞다. 그래서 하던 말을 계속하자면, 내가 꼭 그런 유형의 사람이어서 그런 건 진짜 절대 아니고. 아, 잠깐! 지금 바람이 너무 좋아서 딱 30분만 뛰고 와야겠다. 딱 30분만 기다리면 뛰고 와서 글을 마무리하도록 하겠다.
*크레마
추출된 에스프레소 원액 위의 황금색 거품층으로 추출된 지 3~4분이 지나면 사라지므로 커피의 신선도를 판단하는 척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