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텀스레드 (phantom thread) by 폴 토마스 앤더슨
*이 글엔 팬텀스레드 줄거리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팬텀스레드>의 남자 주인공 레오널드의 일상은 루틴으로 가득하다. 그는 정해진 시간에 일어나 정해진 순서대로 몸단장을 마치고 정해진 조리법대로 요리된 음식을 먹는다. 이 루틴에는 어떤 예외도 없다. 설령 그것을 비집고 들어오려 하는 존재가 사랑하는 연인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나아가 레오널드는 사랑이라는 명목 하에 상대방을 본인의 룰대로 재단하고 교정하려 드는 권위적인 모습까지 갖고 있다. 관객 또한 슥- 스치기만 해도 손에 독이 오를 것 같은 이 까탈스러운 남주인공에게 마음을 열기란 쉬운 일은 아니다. (그게 아무리 녹진 섹시한 다니엘 데이 루이스라 할지라도!) 하지만 레오널드가 느끼는 불안과 공포를 영 이해 못하는 건 아니다. 자신만의 루틴, 소중한 자기 영역을 지켜내지 못하는 순간 내 모든 세계가 무너져 내릴 것 같은 그 불안한 마음을 나도 너무잘 안다. 무릇 사랑이란 서로 다른 두 개체가 어울렁 더울렁 각자의 세계를 아름답게 침범해나가는 일이건만….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사랑을 하다 보면 누구나 ‘나만의 색을 잃지 않을까?’라는 공포에 훅 휩쓸리곤 하는 법이니까.
그런 면에서 여주인공 알마는 참 강하고 단단한 캐릭터다. 본인이 어떤 처지에 있는 지를 판단할 줄 알고, 그 판단에 따라 옳은 행동을 실천하는 자야말로 강한 사람이니까. 자칫 갑을관계로 치자면 ‘을’ 같아 보이는 구도에서 조차 알마는 자존을 내려놓지 않는다. 자신의 규칙에 더 이상 균열을 만들지 말고 차라리 자기를 떠나라고 주장하는 레오널드에게 어떤 ‘벌’을 처방해야 할지 알마는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 벌이란즉슨, 한없이 나약해진 모습으로 처절하게 알마의 품 안에 무너져내리는 일이다. 원하는 것을 쟁취하기 위해 알마가 서슴없이 행동하면서부터 영화의 장르는 잔잔 로맨스에서 긴장감 넘치는 ‘로맨서스펜스물’로 바뀌어버린다. 조금은 거침없는 그녀의 행동 때문에 영화 후반부로 갈수록 오히려 레오널드가 알마에게 쥐락펴락 이용당하기만 하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하지만 또다시 자신만의 규칙으로 철벽을 치며 아집을 부리는 레오널드가 제 스스로 알마 표 독버섯 오믈렛을 먹고 순순히 알마 품에 쓰러져 안기는 장면에서 깨달았다. 저 두 사람만의 규칙이 생겼구나. 그 규칙을 기반으로 하는 하나의 세계가 생겼구나. 저 둘은 사랑을 하고 있구나. 끙끙 앓으며 생사를 오가는 레오널드의 아슬아슬한 모습에서 끈끈한 관계의 안정감 같은 게 느껴진다는 사실이 참 아이러니하다.
우리 집 대문은 파란색 페인트 칠을 해놨는데, 사람이 드고 나는 오른쪽 문의 손잡이만 반들반들 구릿빛 속살을 드러내 놓고 있다. 수많은 세월 동안 제 홀로 사람 손을 탄 탓이다. 누군가의 드나듦으로 인해 벗겨질 칠은 결국 벗겨지게 되어있다. 그로 인해 드러나는 속살이 아름답든 추하든 간에, 것은 판단할 일이 아니다. 나 홀로 독야청정 이쁘게 빛나는 사랑 같은 건 없는가 보다 하고 산다. 겨울왕국에서 노래 부르듯 사랑은 열린 문(Love is an open door)이기만 하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문을 여는 손길, 그 손에 닿아 닳는 색, 그러면서 드러나는 속살까지 죄다 패키지로 사랑에 포함시키고 볼 일이다. 그 무시무시한 진실을 한 뼘도 가리지 않고서도 이렇게 세련된 영상과 이야기를 만들어낸 폴 토마스 앤더슨 감독이 새삼 대단하다. 그리고 <데어 윌 비 블러드>에서 고약하리만치 목표의식이 강한 꼬장꼬장한 노인을 연기해 낸 다니엘 데이 루이스가 그 특유의 고집 있어 보이는 비쥬얼을 이렇게 실크처럼 부드럽고 섬세한 고집스러움으로 풀어낸 것 또한 대단하다. 다방면으로 즐겁게 곱씹으며 볼만한 영화 <팬텀스레드>. 감독의 다음 영화가 나오길 기다리며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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