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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자버 Sep 20. 2021

91살 주인집 할머니는 청바지에 스니커즈를 신으신다

갈월동 반달집 동거 기록 #3

용산구 갈월동. 91살의 집주인 할머니가 계신 100년 된 적산가옥에서 남자친구와의 동거 생활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저희 집의 별칭은 반달집입니다.


알게 된 지 열흘이 채 되지 않은 낯선 동네 갈월동, 그곳에 위치한 지어진 지 100년이 넘은 적산가옥, 그리고 그곳에서의 남자친구와 처음 해보는 동거. 돈으로건 시간으로건 엇나가려면 아주 제대로 엇나갈 수도 있는 이 큰 결정 앞에서 나는 그다지 갈팡질팡하지 않았다. 작은 결정 하나에도 몇날며칠 고민하고, 어떤 일이 벌어질까를 수십번 시뮬레이션 돌려보는 내가 어찌 이리도 큰 일을 단박에 저지르기로 결심할 수 있었는지, 스스로도 참 의문이었다. 근거 없이는 좀처럼 자신감을 발휘하지 못하는 나같은 사람의 어느 구석에서 이 대담함이 발휘되었을까?


집에 들어가 살기도 전에 내 맘을 설레게 한 멋진 거실 창문 뷰 때문이었을까? 에이~ 난 그렇게 낭만에 죽고 못 사는 타입은 아니다. 그럼 남자친구와의 깊고 단단한 사랑 때문이었을까? 음, 난 휘발되는 감정표현보다 차라리 실체도 있고 효력도 있는 문서화 된 약속을 볼 때 마음이 두근두근거리는 편이다. 아니면 일백년 한국 근현대사가 고스란히 녹아있어 땅 위에 서있는 역사책 같은 적산가옥의 흥미로움에 이끌려서였을까? 뭐, 그런 건 그냥 유튜브에서 썸네일 제목으로만 보고 넘어가도 충분하지 않나?


그렇다. 나는 이다지도 의심 많고 보수적인 인간이다. 이런 나의 마음을 사로잡은 건 의외로 주인집 할머니였다. 주인집 할머니로 말할 것 같으면 31년생(내가 가장 좋아하는 한국 작가 박완서와 동갑이시다.), 무려 91세의 나이에 청바지와 스니커즈를 무리없이 소화하시고 새하얗게 샌 머리에 은은한 보랏빛을 염색하셨다. 그리고 그 센스 있는 패션을 더욱 돋보이게 하는 건 바로 꼿꼿하고 자신감 넘치는 자세. 150이 넘을랑 말랑 작은 키에도 그가 전혀 작게 보이지 않게 하는 한 치 물러남 없는 당찬 말투는 덤이다.  



집에 들어가기 전, 화장실 문이 마음에 들지 않아 교체해달라고 할머니께 요구했을 때, 문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세를 들지 않아도 된다고 당차게 나를 ‘까셨던’ 모습에 매료되어 나는 여기까지 오게 됐다. 이 정도 다부진 분이 50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공들여 관리한 집이라면 별 문제 없이 살 수 있지 않을까하는 (내 생각으로는) 근거 있는 믿음이랄까 감이랄까…가 있었다. 100년 된 집과 거기서 반백년을 사신 백살 가까운 노인 분을 보고 가장 강하게 느껴지는 감각이 ‘젊다’라는 사실은 아이러니한 걸까? 아니면 오히려 낡으려면 충분히 낡고도 남았을 것들 사이에서 여전히 반짝반짝 빛나는 할머니만의 특유의 당참이 두드러지게 젊어 보이는 건 당연한 일인 걸까? 정확히 구분할 순 없었지만 난 피 빨아 먹는 흡혈귀 마냥 이 집에 찰싹 빌붙어 집에 흐르는 ‘젊은 감각’을 빨아 먹을 생각에 추릅 입맛을 다지고 있었다.


아직 본격적으로 집에 들어가 살기 전, 할머니의 매력에 크게 감탄했던 사건이 하나 있었다. 워낙 오래된 집이기도 하고 2년이나 사람이 살지 않고 비워둔 공간이라 보일러가 고장난 것이 사건의 발단이었고, 할머니께 곧이 곧대로 문제를 말씀 드리는 게 우선 순위였는데, 알아서 일을 해결해보겠다고 어찌저찌 연락이 닿은 엉터리 정비공을 집에 들인 나와 남자친구의 판단이 불찰이었다. 정비공은 무료로 보일러를 진단해주겠다며 불쑥 집부터 찾아왔다. 그런데 문제를 파악하겠다며 보일러 곳곳을 해집어 놓던 정비공은 “어? 음, 하…”와 같은 나와선 안 될 감탄사만 잔뜩 뱉더니 결국 보일러를 아주 망가트려놓고 말았다. 그걸 지켜보고 있던 우리도 “어? 음, 하…” 하며 당황만 하고 있는데 집 안에서 일 꼬여가는 냄새가 났는지 주인 할머니께서 현장으로 급히 출동하셨다.


엉터리 정비공은 할머니가 등장하자 뭐라고 항변을 해야겠다고 느꼈는지 “보일러가 오래 돼서 그렇다, 누가 손을 댔어도 일어날 일이다.” 주저리 주저리 변명을 늘여놓기 시작했다. 그런 정비공을 집에 들인 우리도 모종의 책임감을 느끼며 묵묵히 입을 다물고 곁눈질로 할머니 눈치만 살피고 있었다. 그날도 청바지에 스니커즈를 신고 온 할머니는 안 그래도 꼿꼿한 허리에 양 손을 척 꽂으셔서 더 위엄 있는 자세로 그 구차한 변명을 구구절절 듣고 계셨다. 배짱이 콩알 반쪽 만도 못한 우리는 본격적으로 집에 세들어 살기도 전에 문제를 일으킨 것 같아서 마음이 조마조마 했다.


됐고!


할머니는 정비공의 말을 한마디라도 더 듣고 있으면 몸에 알레르기가 돋을 것 같아 못 견디겠다는 듯 단칼 같은 불호령으로 어처구니 없는 상황의 맥을 일단 끊어놓으셨다. 이 불호령과 함께 각자의 책임 소재를 따지는 지저분한 싸움이 시작되겠구나 하는 생각에 나는 더욱 더 마음이 졸아들었다.



한푼도 물어내라고 안 할 테니까 어디를 어떻게 건드렸는지나 솔직하게 말하세요.
그래야 제대로 수리를 할 수 있으니까요.


할머니의 말은 단호했지만 예의 있었고, 다그치긴 했지만 배려가 있었다. 정비공은 혹시라도 고장난 보일러 수리 비용을 덤탱이 쓸까봐 노심초사 했는데 웬걸, 바른 대로 불기만 하면 곱게 보내주겠다는 말에 마음이 누그러지면서도 민망하기도 했는지 이래저래 복잡한 표정으로 고분고분 보일러의 상태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생각지 못한 전개에 놀랐지만 난 뭣보다 할머니의 통 큰 아량에 더 크게 놀랐다. 내가 나이 먹으면서 겨우 할 수 있게 된 건 옳냐 그르냐 따지는 일 정도다. 그런데 할머니는 결국 일이 잘 풀리려면 언제 아량을 베풀고 카리스마를 부려야 할지 수도꼭지 돌리듯 완급조절을 하고 계셨다. 다시 말하자면 할머니는 그 순간 캡짱 멋있었고 나는 홀딱 반해버렸다는 이야기다.


결국 보일러를 고치기 위해 새로운 정비공 두 분이 방문했다. 할머니는 타이르듯 우리에게 집에 문제가 생기면 본인에게 먼저 이야기 하라고, 본인이 이 집에 생길 수 있는 문제는 다 꿰고 있고 그럴 때 어디에 연락해야 하는지도 다 알고 있다고 말씀하셨다. 그러고 보니 정비공분들도 할머니와 구면이신 듯 했다. 할머니는 정비공 분들을 ‘젊은이’라고 부르셨지만 그분들도 70대의 나이로만 따지자면 지긋한 노인이셨다. 우리보다 나이가 두 배, 세 배는 많은 분들이 ‘몸이 늙는 것보다 마음이 늙는 게 문제’라며 일 안하고 놀기만 하면 마음이 늙고 쳐져서 안 된다고 주거니 받거니 이야기 하는 것을 들으며 몸은 아직 젊은데 마음이 젊은지는 알쏭달쏭한 두 젊은이는 다소 뜨끔할 수밖에 없었다.


돈이 아쉬워 일하는 게 아니라는 정비공 분들의 말씀에서 허세가 전혀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보일러는 제대로 작동하기 시작했다. 우웅- 돌아가는 보일러 소리가 이렇게 듣기 좋은 거였나? 완전히 고물이 된 줄 알았던 보일러는 몇 시간 전 일어난 난리에 대해 시치미를 뚝 떼고 잘만 돌아갔다.


큰 돈 나간 날에는 아예 돈을 확 써버려야 해.
내가 오래 살아보니 그런 게 있어!


라고 아흔 한 살 할머니께서 말씀하시니 그저 고개가 끄덕여졌다. 그렇게 나와 남자친구는 할머니를 따라서 동네 칼국수 집에 늦은 점심을 얻어 먹으러 따라나섰다. 갈월동이라는 동네의 연륜은 대단하구나 싶게도 칼국수집 주인분도 80대 노인이셨다. 혼자 가게를 운영하시는데 귀가 잘 안 들리시는지 주인 할머니가 바짝 다가가 어깨를 두드리자 그제야 고개를 돌려 주문을 받으셨다. “할머니가 귀가 잘 안 들리셔!” 하며 본인보다 열 살은 어린 노인을 할머니라 부르는 모습이 반박불가로 귀여웠다. 나도 저렇게 나이를 무력화시킬 단단한 매력을 지녔으면… 하고 자꾸자꾸 바라게 됐다. 나보다 한 살이라도 많은 사람 앞에서 불쑥 솟는 어림에 대한 자부심이랄까 얄팍한 으스댐이 주인집 할머니 앞에선 자꾸 팍 고꾸라졌다. 오히려 그 으스댐은 “니가 정말 젊다고 생가하니?”라는 날카로운 물음표로 변질 돼 마음을 갉아댔다.


적게 먹어야 오래 살아.
그리고 여럿이서 먹을 때 욕심 내봤자야.
남 더 주고 미움 덜 받는 게 나아.


하시며 본인 칼국수를 계속 남자친구 그릇에 퍼주는 할머니를 보며, 우리 더러 일찍 죽으라는 건가 하며 괜히 삐죽거리는 마음도 솟았다만, 그냥 오늘은 젊음 대결로는 할머니께 완패 했구나 싶어 순수하게 웃음이 났다. 90대에도 30대 둘을 이기셨으니, 이런 할머니가 젊었을 적엔 또 얼마나 날아다니셨겠는가. 초등학생 때 혼자 공부하겠다고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셨던 이야기부터 여자로써는 대한민국 최초로 1종 보통 운전면허를 딴 이야기까지, 그리고 숙명여대 교수로 재직하며 있었던 수많은 인연과 일화들을 얘기해주시며 본인의 찬란했던 시절을 살짝이나마 엿보게 해주셨다. 그렇게 스쳐 듣기만 해도 부지런하셨을 것이며, 열정적이었을 것이며, 거침없는 젊은 날이었을 것이 눈에 선했다. 꺼내도 꺼내도 끝이 없을 것 같은 이야기는 남자친구가 먹어도 먹어도 줄지 않는 칼국수를 겨우 다 비워내고 나서야 끝이났다.


식사를 끝내고 돌아와 집을 보니, 커다란 규모하며 거기에 딸린 정원까지 보통 부지런 떠는 사람은 결코 살 수 없는 손 많이 가는 왠 천덕꾸러기가 떡하니 서 있는 기분이었다. 너 정말 주인 한 번 잘 만났구나? 그 중의 2층, 2층 중에서도 절반만 우리 차지였지만 어쨌든 그만큼도 우리가 가꾸며 살아가야 하는 입장으로서 각오를 단단히 하게 됐다. 집이 시들기 시작하면 그건 우리가 마음부터 늙어가기 시작했다는 신호로 받아들여질 것 같았다. 하지만 그걸 달리 해석해, 낡아도 늙지 않을 수 있는 인생의 비밀을 나만 알게 된 것만 같은 묘한 쾌감도 있었다. 오래됐지만 구석구석 빛이 나는 이 집과 할머니의 존재가 그 증거였다. 무서운 경고가 될 것이냐, 달콤한 비밀이 될 것이냐는 역시 나의 실천에 달린 거겠지? 어쨌든 난 이 집에 들어와 살게 된 그 자체로 이미 실천의 반은 먹고 들어간 것 같은 얕은 뿌듯함에 이미 취해있었다. 바로 이 얕은 뿌듯함이 낯선 갈월동의 100년 된 집에서 남자친구와 동거를 겁나지 않게 해주는 구체적 실체였던 것이다. 이렇게 말하고 보니 나 좀 무모한가?


확실한 건 동거를 마음먹은 그날, 마음먹은 대로 행동한 그날 만큼은 난 확실히 젊었다. 앞으로 소식하고 남들에게 미움 받지 않으며 오래오래 살다가 문득 꺼내보고 싶은 젊은 날 중 하나가 될 그런 날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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