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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자버 Sep 20. 2021

91살 주인집 할머니는 청바지에 스니커즈를 신으신다

갈월동 반달집 비혼 동거 기록

알게   열흘이  되지 않은 낯선 동네 갈월동, 그곳에 위치한 지어진  100년이 넘은 적산가옥, 그리고 그곳에서의 남자친구 설쌤과 처음 해보는 동거. 엇나가려면 아주 제대로 엇나갈 수도 있는   결정 앞에 나는  많은 쫄보가 되어 있었다. 나란 사람은 작은 결정 하나에도 몇날며칠 고민하고 어떤 일이 벌어질까를 수십번 시뮬레이션 돌려보는 성격의 소유자이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 나에게 결심의 용기를 불어넣어준 커다란 계기는 바로 주인집 할머니였다.


주인집 할머니로 말할  같으면 31년생(내가 가장 좋아하는 한국 작가 박완서와 동갑이시다), 무려 91세의 나이에 청바지와 스니커즈를 무리없이 소화하시고, 새하얗게  머리에 은은한 보랏빛을 염색하는 센스까지 겸비하신 분이다. 워낙 자세가 꼿꼿하셔서 아흔이 넘은 나이를 가늠하기 힘든 것은 물론 자신감 넘치는 자세 덕분에 패션도 더욱 센스 넘쳐 보이는 건 덤이다. 150cm 넘을랑 말랑하는 작은 키의 소유자이시지만 그럼에도 전혀 작다는 느낌을 허락하지 않는 당찬 말투를 가지셨다.



집 계약 전, 덜렁거리는 화장실 문이 마음에 들지 않아 할머니께 교체해달라고 요구했지만 나는 완전히 까였다. 문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굳이 세를 들지 않아도 된다는 할머니의 당당함 매료되어 여기까지 오게 됐다.  정도 다부진 분이 50년이라는  세월 동안 공들여 관리한 집이라면  문제 없이   있지 않을까하는 근거 있는 믿음 차올랐기 때문이다. 백  집과 거기서 반백년을 사신 백살 가까운 노인 분을 보고 가장 먼저 드는 생각 ‘젊다'라는 건 아이러니하지만 정확한 표현이었. 낡으려면 충분히 낡고도 남았을 것들 사이에서 여전히 반짝반짝 빛나는 그녀를 젊다는 말 아니면 뭐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  빨아 먹는 흡혈귀 마냥 이 집에 찰싹 빌붙어 ‘젊은 감각 빨아 먹을 생각에 난 그저 신이 났다.


그런데 이사 가기 전 번거로운 사건이 터지고 말았다. 워낙 오래되기도 했고 2년이나 거주자 없이 비워둔 공간이다 보니 보일러가 고장나 있었던 것이다. 우린 알아서 문제를 해결해보겠다는 심산으로 심부름 앱에 냅다 수리 문의를 넣었다. 용케 연락이 닿은 정비공 무료로 보일러를 진단해주겠다며 다짜고짜 집부터 찾아왔다. 자신만만하게 보일러 곳곳을 해집 정비공은 갑자기 “? , …” 같은 나와선   감탄사만 잔뜩 뱉더니 결국에는 보일러를 아주 망가트려놓고 말았다. 그걸 지켜보고 있던 우리도 “? , …” 하며 당황만 하고 있었다. 집 밖으로  꼬여가는 냄새가 났던걸까? 어버버 하는 사이 주인 할머니께서 현장으로 다급히 출동해오셨다.


단호한 표정을 한 채 등장한 주인집 할머니를 본 엉터리 정비공은 당황하기 시작했다. 뭐라고 항변을 해야겠다고 직감한 그는 보일러가 오래 돼서 그렇다는둥 누가 손을 댔어도 일어날 일이었다는둥 주저리 주저리 변명을 늘여놓기 시작했다. 그런 정비공을 집에 들인 우리도 모종의 책임감을 느끼며 묵묵히 입을 다물고 곁눈질로 할머니 눈치만 살피고 있었다. 그날도 청바지에 스니커즈를 신고  할머니는  그래도 꼿꼿한 허리에  손을  꽂으셔서  위엄 있는 자세로  구차한 변명을 구구절절 듣고만 계셨다. 배짱이 콩알 반쪽 만도 못한 우리는 계약서 도장이 마르기도 전에 귀한 집에 문제를 일으킨 것 같아 심장이 쪼그라질 대로 쪼그라들고 있었는데...


됐고!


할머니는 단칼 같은 불호령으로 어처구니 없는 상황의 맥을 탁! 끊는 것 아니겠는가. 정비공의 말을 한 마디라도 더 듣고 있으면 알레르기가 돋을 것처럼 단단히 질려있는 표정이셨다.  불호령과 함께 시시비비를 가리는 지저분한 싸움이 금방이라도 터질 것만 같았다. 그런데 그 직후 할머니 입에서 나온 멘트에 나는 신선하고도 신선한 충격을 받고 말았다. 



한푼도 물어내라고 안 할 테니까 어디를 어떻게 건드렸는지나 솔직하게 말하세요.
그래야 제대로 수리를 할 수 있으니까요.


다그침이었지만 예의 있었고 배려심이 묻어난 말이었다. 혹시 고장난 보일러 수리 비용을 덤탱이 쓸까봐 노심초사 하던 정비공은 웬걸, 바른 대로 불기만 하면 곱게 보내주겠다는 말에 마음이 누그러지면서도 민망하기도 했는지 이래저래 복잡한 표정으로 고분고분 보일러의 상태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생각지 못한 전개에 놀랐지만 무엇보다 할머니의   아량에 더욱 놀랐다할머니는 단순히 일의 시시비비를 가리는 경지를 넘어서 언제 아량을 베풀고 언제 카리스마를 부려야 할지를 정확히 알고 컨트롤 하고 계셨다. 말하자면  순간 할머니는 캡짱 멋있었고 나는 홀딱 반해버렸다는 이야기다.


엉터리 정비공은 흐지부지 자리를 뜨고 새로운 정비공  분이 찾아오셨다. 할머니는 집에 문제가 생기면 우선 본인에게 이야기 하라고, 본인이  집에 생길  있는 문제는  꿰고 있고 그럴  어디에 연락해야 하는지도  알고 있다고 타이르듯 우리에게 말씀하셨다. 그러고 보니 새로 오신 정비공도 할머니와 구면이신  했다. 할머니가 젊은이~ 젊은이~ 하고 부르셔서 눈치 못 챘는데 알고보니 그 젊은이 정비공은 70대 노인이셨다. 우리보다 나이가  ,  배는 많은 분들이 몸이 늙는 것보다 마음이 늙는  문제라며,  안하고 놀기만 하면 마음이 늙고 쳐져서  된다는 대화를 주거니 받거니 하는데 그걸 듣고 있는 몸만 젊은 젊은이 둘은 그저 뜨끔할 수밖에 없었다.


뚝딱뚝딱 정비공의 손을 거치니 보일러는 금세 제대로 작동하기 시작했다. 우웅- 부드럽게 집 전체를 감싸는 보일러의 낮은 진동 소리가 이렇게 평화로웠? 완전히 고물이   알았던 보일러는  시간  일어난 난리는 나 몰라라 시치미를  떼고 잘만 돌아갔다.


큰 돈 나간 날에는 아예 돈을 확 써버려야 해.
내가 오래 살아보니 그런 게 있어!


아흔 넘은 할머니께서 말씀하시니 고개가 절로 끄덕여졌다. 점심 턱을 쏘겠다는 할머니의 호쾌한 제안이었다. 할머니를 따라 도착한 곳은 동네 칼국수집. 칼국수집 할머니 80 노인이셨다. 갈월동의 연륜이 만만치 않다는 걸 느낄 수 있는 대목이다. 칼국수집 할머니는 귀가   들리시는지 메뉴를 말해도 못 들으시고 바짝 다가가 어깨를 두드리자 그제야 고개를 돌려 주문을 받으셨다. 주인집 할머니께서 “할머니가 귀가   들리셔!” 하며 본인보다  살은 어린 노인을 할머니라 부르는 모습이 반박할 수 없도록 귀여웠다나이를 무력화시키는 할머니의 통통 튀는 매력에 또 한번 반해버렸다. 나보다  살이라도 많은 사람 앞에서 불쑥 솟는 젊음부심이랄까, 얄팍한 으스댐도 주인집 할머니 앞에선 힘없이 고꾸라졌다. 오히려  으스댐은 “니가 정말 젊다고 생가하니?”라는 날카로운 물음표로 변신해서는 마음을 콕콕 자극했다.


적게 먹어야 오래 살아.
그리고 여럿이서 먹을 때 욕심 내봤자야.
남 더 주고 미움 덜 받는 게 나아.


본인 칼국수를 설쌤 그릇에 계속 퍼주는 할머니를 보며, 우리더러 일찍 죽으라는 건가 하며 괜히 삐죽거리는 마음도 솟았다만, 그냥 오늘은 젊음으로만 따지자면 할머니께 완패 했구나 싶어 순수하게 웃음이 났다. 90대에 30 둘을 이기셨으니, 이런 할머니가 젊었을 적엔  얼마나 날고 기고 다 하셨을까. 할머니는 초등학생  혼자 공부하겠다고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셨던 이야기부터 여자로써는 대한민국 최초로 1 보통 운전면허를  이야기, 그리고 숙명여대 교수로 재직하며 있었던 수많은 인연과 일화들을 얘기해주시며 본인의 찬란했던 때를 살짝이나마 엿보게 해주셨다. 그렇게 스쳐 듣기만 해도 부지런하셨을 것이며, 열정적이었을 것이며, 거침없는 도전으로 가득했을 할머니의 젊은 날들이 눈에 선했다. 꺼내도 꺼내도 끝이 없을  같은 이야기는 설쌤이 먹어도 먹어도 줄지 않는 칼국수를 겨우  비워내고 나서야 겨우 끝이났다.


식사를 끝내고 돌아와 집을 보니, 이거 웬 보통 부지런 떠는 사람은 결코 감당할 수 없을  많이 가는 천덕꾸러기 하나가 떡하니  있는 기분이었다.  정말 주인    만났구나?  중의 2, 2 중에서도 절반만 우리 차지였지만 어쨌든 그만큼도 우리가 책임지고 가꾸며 살아가야 하는 부분이었다. 만약 집이 시들기 시작하면 그건 우리 마음이 늙어가기 시작했다는 신호일 게. 반면 집을 잘 운영한다면 낡아도 늙지 않을  있는 인생의 비밀을 깨달을지도 모는다. 오래됐지만 구석구석 빛이 나는  집과 나이 들었지만 활력 넘치는 할머니의 존재가  증거였다. 무서운 경고가  것이냐, 달콤한 비밀이  것이냐는 역시 에게 달린 거겠지? 물론  집에 들어와 사는 것 만으로 현명하게 나이들 수 있겠다는 착각어린 뿌듯함에 이미 잔뜩 취해있긴 했지만 말이다. 어쩌면  얕은 뿌듯함이 낯선 갈월동의 100  집에서 남자친구와의 동거를 겁나지 않게 해주는 구체적 실체였을지도 모르겠다. 음, 이렇게 말하고 보니   무모한가?


확실한 건 동거를 마음먹은 그날, 마음먹은 대로 행동한 그날 만큼은 난 확실히 젊었다는 거다. 소식하고 남들에게 미움 받지 않으며 오래오래 살다가 문득 꺼내보고 싶은 젊은 날 중 하루가 그렇게 지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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