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월동 반달집 비혼 동거 기록
나는 잠들기 전부터 꿈을 꾼다. 눈을 감고 되고 싶은 것, 갖고 싶은 것을 잔뜩 상상하는 거다. 온 가족이 한 방에 이불을 펴고 쪼르르 줄지어 자던 열 두 살 때부터 생긴 버릇이다. 그때는 눈을 꼭 감고 커다란 책상과 침대가 있는 나만의 방을 상상하다 잠들곤 했다. 고3 때는 가고 싶은 대학에 다니는 나를, 취준생일 땐 가고 싶은 회사에 다니는 나를 상상했고 다이어트 중일 땐 군살 쫙 뺀 내 모습을 상상했다. 그리고 서울살이 10년에 다다르자 커다란 창문이 있는 방을 상상하게 됐다. 고양이와 눈이 마주치는 반지하 방의 쿰쿰한 창문 말고. 손 뻗으면 옆집 창문 열 수 있을 만큼 다닥다닥 붙은 연립주택의 무례한 창문 말고. 저 멀리 산이 보일 만큼 시야가 탁 트인 커다란 창문이 있는 집을 꿈꾸며 잠들었다.
그래서였을까? 함께 살 좋은 집을 구하면 같이 살아봐도 좋지 않겠냐고 설쌤에게 제안할 때 속으로 마음먹었다. 좋은 집이라면 창밖으로 산이 보여야 한다는 조건이 반드시 포함되어야 한다고. 그리고 그런 집을 구할 수만 있다면 당장 설쌤과 동거를 시작하겠다고. 물론 그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았기에 동거라는 큰 결정권을 그 다짐에 전가할 수 있었던 거다. 불가능하다는 걸 전제로 집을 찾기 시작했다. 위치, 구조, 높이 조건이 똑같은 집도 창밖으로 무엇이 보이느냐에 따라 비용이 천차만별로 달라지는 이 야박한 도시 '서울'에서 코딱지만 한 예산으로 풍경 좋은 집을 찾겠다니. 이런 바람을 품고 있다는 게 부끄러울 만큼 순진해보여서 그 누구에게도 감히 입 밖에 내지 못했다.
처음에는 인왕산이 있는 서촌 쪽에서 집을 검색하기 시작했다. 회사가 위치한 3호선 라인이기도 했고 어디서든 궁궐과 기와지붕이 보이는 그 지역 특유의 풍경에 마음을 홀라당 빼앗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핫하디 핫한 서촌에서 사회초년생이 살 만한 집 찾기란 전쟁터에서 갓 지은 떡 찾는 일만큼 어려운 일이었다. 예쁜 집은 가격이 비쌌고, 조건이 합리적이면 발견하기가 무섭게 계약이 완료되곤 했다. 몇 주간 매달렸던 서촌 로망은 결국 그렇게 납작하게 접혀버렸다. 그다음으로는 회사가 위치한 3호선 라인을 포기해야 했고, 그다음으로는 넓은 주방을 포기해야 했고, 그다음으로는 방 개수를 포기해야 했다. 그렇게 줄줄이 포기에 포기가 쌓여가는 와중에도 창문은 포기할 수 없었다. 난 매일 밤 눈을 감고 그 창문 앞에서 글도 쓰고 밥도 먹고 사랑도 쌓아나가고 있었다.
어느샌가 집 찾기는 ‘꿈의 창문’ 찾기로 변형 되어, 부동산 앱에서 매물 범위를 서울 전지역으로 놓고 산 옆에 위치한 매물은 전부 뒤져보기 시작했다. 어디가 되었든 창을 열었을 때 시원한 초록만 보이면 되겠다 싶었다. 이러다 서울의 동네란 동네는 다 꿰겠다 싶으면서 새삼 서울에 살아보고픈 좋은 집이 참 많다는 걸 느낀 날들이었다. 물론 그만큼 현실의 장벽 또한 많다는 걸 처절히 체감한 날들이었다. 질릴 만도 한데 서울이 좋았다. 서울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은 코웃음을 칠지 모르겠지만, 나는 진심으로 서울을 고향처럼 여기고 있었다. 사람도 사건도 사고도 너무 차고 넘쳐서 복잡하고 정신없는 서울. 역설적이게도 사람에 가려서, 혹은 일에 치어서 나 자신을 숨길 수 있는 서울이 내겐 안락하게만 느껴졌다.
나의 상경기는 고향인 대구로부터 도망의 역사였다. 학구열에 미쳐버린 부모들과 시집 잘 가야 인생이 편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이상한 여자아이들, 와이프에게 체중이 늘면 집에서 내쫓겠다 협박하는 남편들이 사는 도시, 대구. 어쩌면 매년 최고기온을 경신하는 찌는듯한 더위가 그나마 상식적으로 이해 가능한 특징 아닐까 싶은 곳. 어떻게든 대구를 벗어나야겠다는 오기로 가득했던 고등학생 시절, 나는 눈을 감지 않아도 절벽이 그려지곤 했다. 무언가에 쫓겨 결국 절벽 아래로 떨어지면 시꺼먼 어둠이 나를 꿀꺽 삼켜버릴 것만 같았다. 그 아득한 불안감에 종종 숨이 막혔고 쉬이 잠들 수 없는 날들이 이어졌다. 절벽 아래로 떨어지지 않기 위해 초인적인 힘을 끌어다 썼다. 겨우 서울로 도망쳐 왔을 때 여느 스무살처럼 총명하지 못하고 흐물흐물 불투명한 해파리처럼 세상을 부유한 것도 그런 탓이었을 것이다.
적어도 서울은 ‘다 같이’ 바쁘고 ‘다 같이’ 쪼들리고 ‘다 같이’ 애쓰는 모양이었다. 안락함으로 가는 길목에 놓인 허들은 높았지만 모두에게 같은 높이였다. 그 냉정한 공정성이 오히려 좋았다. 아무것도 가진 게 없었지만 주변의 친구들도 그런 나와 별반 다르지 않은 조건 속에 있었고 우린 마음껏 인생을 써 내려 가기만 하면 됐다. 덕분에 살 곳을 찾아 전전하는 와중에도 서울이 밉지 않았다. 가난하면 가난한 대로 살 곳이 있겠지. 그리고 그 서러움 알아주는 친구들이 늘 곁에 있으니까 괜찮았다. 당장은 삶을 함께 꾸려 나가보자 약속한 남자친구까지 있으니 더욱더 견딜 만 했다. 그래서 부동산 앱 뒤지는 일이 마냥 힘들지만은 않았다. 그리고 그런 마음의 노력이 통했던 걸까? 수많은 매물 중에 눈에 확 들어오는 썸네일을 보고 해당 게시글을 클릭해보았다. 나무로 지어진 오래된 주택, 거실에 나 있는 커다란 창문으로 남산과 띄엄띄엄 해방촌이 보이는 곳이었다. 동네는 이름하여 갈월동. 처음 보는 동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