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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자버 Apr 05. 2022

“나 남자친구랑 살 거야” 콩가루집안 막내의 동거 선언

갈월동 반달집 비혼 동거 기록


A와 B는 각자의 절친 결혼식에 방문했다가 서로를 처음 발견했다. 그리고 피로연에서 동시에 눈이 맞았다. 그로부터 두 사람이 결혼에 이르기까지는 세 달 정도 밖에 걸리지 않았다. 그 사이 두 사람은 데이트 겸 재미삼아 궁합을 봤다. 점쟁이는 "큰 아이 낳고 잘먹고 잘살거다." 라고 했고 A는 그 내용을 정성스럽게 일기장에 기록해두었다. 점쟁이 말대로 두 사람은 결혼 하고 딱 1년 뒤 예쁜 첫째 딸을 낳았고 얼마 안 가 연년생 둘째 딸까지 낳았다. 그리고 딱 13년이 걸렸다. 두 사람이 결혼 생활의 종지부를 찍기까지. A와 B의 둘째 딸은 어느 해인가 장롱 속에서 발견한 일기장을 꺼내 읽으며 두 사람의 궁합 얘기에 낄낄 거렸다. 어느 두 사람 간의 지켜내지 못한 약속의 결과물이 자기 자신이라는 사실에 깊은 씁쓸함을 느끼며.


한 번 연애를 했다하면 4년, 5년 씩 만나고, 첫눈에 느끼는 호감을 잘 믿지 않고, 집요하게 사람에 대해 의심하고 파고드는 '고약한 나'의 탄생 배경엔 아무래도 엄마와 아빠의 러브스토리가 차지하는 지분이 매우 크다. 타고난 성향은 차치하고서라도 말이다. 그들의 사랑이 사랑이 아니었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 같다. 다만, 사랑에 빠졌다고 해서 결혼까지 갈 필요는 없지 않았을까. 덕분에 어린 시절부터 사랑의 끝이 꼭 결혼이 아니어도 된다는 값진 교훈을 얻었다. 고된 경험의 정수가 자연스레 뼈에 스몄다고 해야할까나. 갑작스러울 수도 있는 설쌤과의 동거가 마치 오래 전부터 예견되어있던 일처럼 느껴지는 건 '결혼이라는 실수'의 대를 잇지 않기 위해 부던히 노력해 온 나의 삶의 이력에 걸맞는 행보였기 때문일 것이다. 


드디어 가족들에게도 설쌤과의 동거를 밝힐 때가 왔다. 엄마와 아빠는 따로 살지만 언니와 나는 붙어사는 터라 끈끈한 느낌이 조금이나마 있었는데, 동거를 시작하면 우리 네 가족은 각자가 각자의 집에서 따로 떨어져 사는 영락없는 콩가루 집안이 될 예정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동거 커밍아웃 전 여러모로 속이 메스꺼워 왔다. 반대에 부딪칠까봐 두려운 건 아니었다. 가족의 의견이 이러거나 저러거나 내 결정을 이행할 생각이었으니까. 그렇다기보다는 내가 던질 돌멩이 하나가 일으킬 파장이 어떤 모양일지 가늠 조차 되지 않는 게 두려웠다. 어물쩍 아무도 몰래 동거를 할 수도 있었지만 그건 싫었다. 나쁜 일을 저지르는 것도 아니잖아. 가족의 인정만이 내가 넘어야 하는 허들은 아니잖아. 이미 집은 구해졌고 이삿날은 다가오고 있었다. 더이상 미룰 수 없이 컴컴한 우물 속으로 돌을 던질 시간이었다. 가족들은 각각 다음과 같은 반응이었다.


#언니 / 7년째 자취 메이트

"아, 그래? 언제 나갈 건데?"

언니는 7년 간 함께 살아온 동생에게 이별을 선고받은 사람 치고 덤덤하게 말했다. 자다가도 문득 외로워지면 내 침대로 파고드는 여리고 여린 사람이 저렇게 아무렇지 않을 수 있나? 예상치 못한 반응에 오히려 놀란 건 나였다. 조금은 서운할 지경. 듣자 하니 언니는 설쌤과 나의 연애 기간이 길어지면서 자연스럽게 나와의 이별을 준비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렇게 놀랍거나 슬프진 않다고 했다. 그래, 나 또한 해방감이 우선이긴 했다. 언니와 지지고 볶은 지난한 몇 년을 뒤로하고 이제야 떠날 수 있다니. 언니가 혼자 살아갈 앞으로의 시간이 신나기만을, 그 시간이 인생의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드는 변곡점이 되기를 바랐다. 내가 이삿날을 잡기가 무섭게 언니는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별 선언을 한지 며칠 지나지 않아 집 앞에 차곡차곡 쌓여가는 <오늘의집> 택배 상자를 보며 깨달았다. 언니가 '나 홀로 라이프'를 무척 기대하고 있다는 사실을. 언니, 나와의 이별을 조금은 천천히 즐겨주어도 되지 않았을까?


#아빠 / 경상도 남자

"아빠, 나 이제 남자 친구랑 같이 살 거야."

내 마음대로 남자친구와의 동거를 결심한 주제에 그래도 아빠에게 만큼은 허락을 받아야지 하는 마음이 있었다. 그런데 내 입에서 나온 말의 모양새를 다시 보아하니 허락을 기다리는 게 아니라 일방적인 통보였다. 아빠의 생각이 어떻든 간에 전혀 연연하지 않겠다는 방패 같은 태도가 도를 지나쳐 선빵을 날리고 말았다. 내 인생의 중요한 결정에 목소리를 낼 권한을 주지 않는 것. 그건 내가 엄마와 아빠에게 내릴 수 있는 가장 큰 형벌이자 나름의 복수였다. 그런데 막상 아빠는 아무 대답이 없었다. 마음이 초조해진 건 내쪽이었다. '어차피 좋은 가정환경의 표본이 되어주지도 못했잖아!' 찰싹, 뺨이라도 맞은 사람처럼 앙칼진 대사를 내뱉는 혼자만의 드라마는 이미 다음 컷으로 넘어가고 있었는데 말이다. 한참이 지나서야 툭 떨어진 "그래라."하는 한마디에 화들짝 놀랐다. 허락을 받으려던 건 아닌데 기다렸던 대답을 들은 것 같아 마음이 놓였다. 그런데 생각할수록 기분이 찝찝한 것이, 어쩌면 호되게 혼나더라도 보통의 아빠들이 하는 지나친 걱정을 받아보고 싶었던 걸지도 모르겠다. “절대 안된다!”하는 불호령이나 “아무리 그래도 동거는 좀 그렇지 않냐?”하는 전형적이고 막무가내의 걱정 같은 거. 하지만 이번에도 아빠는 시시하게 한 발 물러서고 말았다. 마치 그 정도가 역할의 한계라는 것을 익히 알고 있기라도 한 듯이.


#엄마 / 사랑 가득 낭만주의자

"엄마, 나 남자친구랑 살아보려고."

엄마는 아빠와는 또 달랐다. 엄마와 나 사이는 조금 가볍다. 언제나 엉뚱하고 나에 대한 사랑으로 가득한 엄마. 엄마는 내가 무슨 결정을 하든 응원해주겠지 하는 맥 빠진 믿음이 있다. 아니나 다를까, "그래, 자버가 고른 사람이면 좋은 사람이겠지?" 하며 밝게 대답 해주는 엄마. 나는 뻔히 예상한 그 대답에 아주 아주, 아주 조금은 실망했다. 아빠의 대답을 들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이래라저래라 하면 버럭 화부터 낼 거면서, 막상 자유를 쥐어주면 내가 어떻게 돼도 아무 상관 없단 뜻으로 들려서 마음이 뒤틀린다. 하지만 그런 이유로 우울에 잠기거나 열을 올리기에 나는 너무 씩씩하다. 괜한 긁어 부스럼으로 시간을 축이기보단 내게 주어진 자유를 만끽하기로 했다. 그런데 엄마가 웬일로 첨언을 한다. "동거는 괜찮은데 결혼은 꼭 깊이 생각해보렴." 엄마여서 할 수 있는 말 같기도 하고 엄마가 할 자격 없는 말처럼도 느껴져 어안이 벙벙해지는 문장이었다. 응, 엄마보다는 깊게 생각해보고 결혼할거야! (라고 속으로만 생각했다) 내 안에는 여전히 부모를 원망하는 사춘기 소녀가 생생하게 살아있다.


#나 / 돌다리 수백 번 두드려보고 건너는 조심쟁이

"자버야, 너 이제 동거 시작하는 거야."

그리고 가장 중요한 '나 자신'에게 동의를 구할 차례가 왔다. 가족들이야 내가 남자친구와 살든 초록피부 외계인과 살든 크게 왈가왈부하지 않을 것이란 건 진작에 알고 있었다. 문제는 보편과 상식을 잣대로 나를 바라볼 평범한 세상 사람들이었다. 어떻게 동거를 시작하게 됐는지, 왜 결혼을 하진 않는지, 나중에 싸우게 되면 어떻게 할지. 대답을 찾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린 질문들과 겪어보지 않고선 답을 알 수 없는 질문들까지. 평범하지 않은 것에 대한 평범한 사람들의 의문 다발은 그것이 평범한 얼굴을 하고 있어서 더욱 위협적이다. 나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그런 질문을 받아낼 자신이 있냐고. 그리고 솔직한 마음은 '자신 없다'였다. 누군가 내 사랑하는 사람과의 살림살이에 대해 꼬치꼬치 질문해오면 매번 뜨끔할 것 같고 매번 주눅 들 것 같다. 나에게 있는 건 신뢰하는 사람과 앞으로 함께 살아가 보자는 그 사람과의 약속뿐. 그리고 왠지 잘 해낼 수 있을 것 같은 근거 가득한 자신감까지. 그걸 바탕으로 함께 살아가는 날들이 평범한 얼굴들에게 할 수 있는 대답이 될 예정이다. 이제 닥치는 대로 겪어볼 일만 남았다.


내게 듣고 싶은 답은 이미 정해져있었고 나는 그 답을 현실 속에서 마주할 씩씩함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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