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월동 반달집 비혼 동거 기록
넉살 좋은 설쌤은 어느새 집주인 할머니에게 ‘그림 그리는 설선생’이라는 애칭으로 불리고 있었다. 집주인 할머니는 우리가 세 들어 살 집에 전에는 글 쓰는 사람, 통역하는 사람, 음악 하는 사람 등이 거쳐 갔었다며 집에 창작가의 그렇고 그런 기운이 있다는 또 다른 증거를 찾은 것 마냥 기뻐하셨다. 남자친구는 그런 할머니께 집 근처 시장과 남산 풍경을 그린 포스터를 선물했고 할머니는 아침마다 거실 창문 한 번, 벽에 걸린 포스터 한번 번갈아 구경하는 것이 일과가 됐다며 매우 흡족해하셨다. 그런 덕분이었을까? 비록 세 들어 사는 집이지만 우리 마음대로 집을 꾸며도 된다는 통 큰 허락이 떨어졌다. 그림 조공 없이도 그런 것에 연연하실 분은 아니었을 것 같지만, 설쌤의 재주와 넉살이 괜시리 든든하게 느껴졌다.
그런데 꾸미는 건 둘째치고 워낙 오래된 집인데다 사람이 살지 않은 지 2년이나 된 터라 손 볼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낡디 낡은 창문 틈새 모헤어가 손을 대자마자 파스스 하고 바스라져 바람에 날아갔을 때 느낀 허망함이란. 그건 앞으로 헤쳐나가야 할 어마어마한 대청소와 수리의 서막이었다. 청소 업체를 부를까 하는 유혹을 몇 번이나 이겨내고, 둘이 함께니까 할 수 있지 않겠냐는 설쌤의 의욕에 힘입어 나도 청소의 의지를 애써 끌어냈다. 누런 천장을 걸레질 하다가 뚝뚝 떨어지는 뗏국물을 얼굴로 받아내는 건 그리 유쾌한 체험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그래도 집 곳곳을 쓸고 닦으며 내 두 손으로 직접 집의 생김새를 익히는 일은 소중한 경험이었다. 방의 윤곽선을 이루고 있는 나무 틀을 더듬으며 한 걸음, 한 걸음 집 안을 몇 바퀴 돌아보기도 했다. 방마다 천장 고저가 워낙 제각각이라 문 지방만 넘으면 계속해서 색다른 풍경이 펼쳐졌다. 반듯한 네모 상자 같은 아파트에서는 누릴 수 없는 묘미였다.
땟국물을 지워낸 집은 제법 사람 사는 집의 구색을 갖춰나가고 있었다. 그러고나니 이젠 집을 어떻게 꾸며야 살맛 날까하는 궁리로 머리가 바빠지기 시작했다. 그중에서도 제일 고민스러웠던 건 침실로 쓸 작은 방의 벽 색깔이었다. 다른 방에 비해서 얼룩이 많이 져 있어 페인트칠이 필수였고 천장이 제일 낮은 곳이라 답답한 느낌도 있어서 제일 먼저 손보고 싶은 곳이었다. 붉은 기가 도는 나무 프레임과 어울리면서도 너무 무난하지 않은 색으로 칠하고 싶다고 생각만 했을 뿐, 구체적으로 확 끌리는 색이 없어 곤란했다. ‘개성 있으면서도 주변과 잘 어울리는’ 이라니, 쉽게 떠오를 리가 없는 조건의 색이긴 했다. 그렇게 나는 퇴근만 하면 매일같이 갈월동 집에 들러 청소를 했고, 그날의 청소 할당량을 마친 뒤 빈 방을 보며 상상의 나래를 펼쳐보곤 했다. 어떤 색으로 칠하면 좋을까? 그렇게 밤 늦도록 고민할 필요까진 없었다는 걸 그때는 몰랐다.
주말에도 짬을 내 이른 아침 집에 들렀다가 우연히 침실 창가로 들어오는 따뜻하고 노란 아침 볕을 보게 된 거다, 드디어. 벽에 비친 아침 볕이 형광에 가까울 만큼 새빨갛게 타올랐다가 서서히 뽀얀 주황빛으로, 이내 따스한 노란빛으로 변하는 풍경을 가만히 바라만 보고 있었다. 동향집의 겨울 아침에만 볼 수 있는 선물 같은 순간이었다. 그리고 그때 바로 방을 무슨 색으로 칠할지 결단이 섰다.
“설쌤, 우리 침실을 노란색으로 칠하는 건 어때?”
침실을 노란색으로 칠해놓고 사는 사람이 있을까? 너무 과한 것 같기도, 너무 유치한 것 같기도 해서 망설여졌지만, 설쌤도 왠지 좋은 생각이라고 했다. 이제야 말할 수 있게 됐다. “침실은 노란색이다!” 예쁜 아침 볕을 벽에 그대로 담은 듯한 따뜻한 노란색 침실이라면 매일매일 꿀 같은 잠을 잘 수 있지 않을까? 서로 원하는 색이 달라서 싸우기라도 할까 봐 걱정했는데 그 과정이 순조롭게 넘어가서 다행이었다. 머리에 떠올렸던 이상적인 노란색을 현실 세계에서 구하는 그다음 과정이 조금 고생스러웠을 뿐. 논현동 가구 거리에 있는 페인트집을 두 세 번 왔다 갔다 한 끝에 원하던 노란색을 만들 수 있었다. 100년 된 나무 프레임의 귀한 빛깔이 상하지 않도록 꼼꼼히 마스킹한 다음, 롤러에 페인트를 푹 적셔 벽에 노랗고 기다란 선 하나를 처음 그었을 때의 짜릿함을 잊을 수 없다. 내 마음대로 내가 원하는 색으로 내가 살 방을 페인트칠하는 자유로움. 아주 오래전부터 꿈꾸던 것이었다.
어린 시절, 온 가족이 한 방에 나란히 이불을 펴고 옹기종기 모여 잠을 청해야 했던 때가 있었다. 아빠 코 고는 소리가 너무 가까워 잠을 설칠 때는 잠들지 않은 채로 눈을 감고 속으로 소원을 빌었다. ‘나만의 방을 갖게 해주세요. 음, 예쁜 책상 하나도 있으면 좋구요.’ 매일 똑같은 소원을 빌었고 어떤 방이 좋을까 상상하다 보면 금방 잠들 수 있었다. 그리고 어쩌다 혼자 집을 지키는 순간이 오면, 낮은 탁상 밑에 기어들어 가 낙서를 했다. 주로 언니에 대한 욕과 좋아하는 만화 캐릭터 같은 것을 그렸다. 온 가족이 다 함께 공유하는 코딱지만 한 집에서 나라는 존재를 욱여넣을 자리라곤 그곳밖에 없었으니까. 공동체가 가장 많이 머리 맞대고 모이는 오브제의 바로 아랫면에 나만의 은밀한 사생활을 문신처럼 새겨놓았다는 쾌감이 엄청났다. 그 좁은 탁상 아래에서 낙서하다가 스륵 잠이 들어 생애 처음으로 가위에 눌리기도 하고 나중에는 탁상 밑면이 낙서로 빽빽해서 더는 그릴 자리도 남지 않게 됐었지, 아마.
아래위로 쓱쓱 반복적인 페인트칠을 하다 보니 생각에 빠져 지나간 어린시절 탁상 아래까지 의식이 흘러가고 말았다. ‘자기만의 방을 갖고 싶어 하던 열두 살 어린애가 이렇게 자라서 방을 꾸미고 있다니, 대단하군.’이라며 조금 우쭐해 하기도 하면서 말이다. 문득 옆을 보니 설쌤도 묵묵히 페인트칠하고 있었다. 몸은 고되지만 그래도 속으론 벅차오른 듯한 표정. 하얀 벽을 노랑으로 채우며 설쌤은 이 집에 대해 어떤 꿈을 꾸고 있을까? 애써 물어보진 않았다. 함께 이뤄나가면 되니까. 그렇게 페인트칠을 하다 보니 시간이 너무 늦어져, 아직은 어수선한 그 집에서 대충 이부자리만 펴고 자고 가기로 했다. 방에는 간이 조명 하나와 나중에 걸고 싶다며 설쌤이 가져온 그림 액자 하나만 달랑 놓여있었다. 그런데도 내가 페인트칠한 방 한가운데에 누워있으니 마음이 그렇게 넉넉할 수가 없었다.
“설쌤, 갈월동이 무슨 뜻이지?”
설레서 그런지 잠도 오지 않고 괜히 동네 이름의 유래가 궁금해졌다. 칡을 캐는 갈월 도사가 살던 곳이라 갈월동이라던가? 생각보다 허무맹랑한 동네 이름이 약간은 시시하게 느껴졌다고 말하면, 그건 너무 외지인의 오만인가? 그래도 여차저차한 사연으로 얽힌 이름이 좀더 흥미로울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도 ‘월’이 들어가서 그런가 계속 달이 떠올랐다. 그럼 ‘갈’은 갈망한다는 뜻을 써서, 우리 집은 보름달이 되고 싶은 반달이 사는 곳, ‘갈월동 반달집’이 되면 어떨까? 둘이 합쳐 하나의 보름달이 되고 싶을 수도 있고, 아니면 각자가 보름달이 되길 바라는 꿈 많은 반달 둘일 수도 있는 거다. 아직 대단한 무언가가 되진 않았지만 꿈으로 그 빈 자리를 채워나간다는 의미에서 갈월동 반달집이라는 이름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그렇게 노란색으로 가득한 방에서 노란 반달 두 개를 떠올리며 나는 정말이지 따뜻한 마음으로 잠들 수 있었다. 그렇게 반달집에서의 첫날밤이 지나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