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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자버 Dec 29. 2021

우린 어쩌면 헤어져야 행복할 운명

갈월동 반달집 비혼 동거 기록

우린 헤어져야 해. 헤어져야 잘 살아.


신림동 원룸촌의 새벽 3시. 방에서 집어 던진 물건들로 잔뜩 어수선해진 복도. 싸우다 울고불고 진이 다 빠진 우리는 멍하니 서서 서로를 바라보며 말했다.  우리는 한 공간에서 부대끼며 살 깜냥이 안 되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이미 평생을 함께 살아왔고 앞으로도 어쩔 수 없이 함께 살아야 하는 사정 또한 알고 있었다. 그렇게 멍하니 씩씩 대다 슬슬 추위가 찾아오고 더이상 할말도 사라지고 분위기도 어색해지자 우리는 말없이 복도에 널브러진 물건들을 주섬주섬 주워 집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다음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각자의 학교로 등교했다. 대구에서 갓 상경한 대학생이었던 나와 연년생 언니의 첫 자취생활은 그런 전쟁같은 날들의 연속이었다.



함께 보낸 시간이 길고, 부대낌의 거리가 가까울수록 그 사람을 더 잘 이해하고 진심으로 포용할 수 있게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세상에는 그런 관계도 있는 것 같다. 부딪히면 부딪힐수록 둥글게 마모되는 게 아니라 파바박 스파크만 튀는 관계. 사랑이 깊어서 상처도 깊은 관계. 나와 언니의 관계가 딱 그랬다. 우린 너무 다른 존재였다.  용감하게 세상을 탐험하는 언니가 멋지고 자랑스러웠지만, 그런 종잡을 수 없음이 때론 걱정스러웠고 심지어 증오스럽기까지 했다. 나이가 들수록 언니의 자유분방함은 불안한 변수가 되어 나를 괴롭혀왔다. 어떻게든 언니를 휘어잡고 컨트롤 하고픈 욕망이 내 안에 점점 크기를 키워가고 있었다.


따로 살면 좋았겠지만 그런 바람까지 반영하기에 서울의 집값은 만만치 않았다. 그나마 방이라도 따로 쓸 수 있는 반지하 자취방을 구해 살게 됐다. 무언가 되고는 싶은데 가진 건 없어 초조하고 예민했던 20대 초, 그야말로 청춘의 활기로 가득했던 때다. 빨리 자리를 잡아 돈 버는 사람이 될 생각을 하는 나에게 언니는 계획도 대책도 없이 마냥 신난 철없는 망아지처럼 보였다. 언니는 내게 눈엣가시였고 난 언니에게 숨막히는 감시관이었다. 이런 두 사람이 부닥치는 거실은 늘 전쟁터, 각자의 방은 휴전지일 수 밖에. 우린 정전기가 통하듯 수시로 부딪혔고 따갑게 싸웠다.


그날 밤도 술자리에 나간 언니는 자유로운 영혼답게 새벽 한 시가 되도록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늘상 있는 일이었던지라 별 생각 없이 잠자리에 드려는 찰나 별안간 똑똑똑 노크 소리와 함께 “계세요? 경찰입니다. OOO(언니 이름) 씨 댁 맞죠?” 하는 정중한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 아니겠는가. 화들짝 놀라 문을 열었더니 드디어 집을 찾았다며 안도하는 경찰 두 분의 어깨에 흐물흐물 떡이 된 언니가 척 하니 걸쳐져 있었다. 무슨 일이라도 당한 걸까, 아연실색이 된 내게 경찰이 땀을 닦으며 설명했다.


“술에 취해 길을 잃고 헤매시길래 저희가 겨우겨우 주소를 알아내서 찾아왔습니다.”


‘이 미친X이 하다 하다 경찰한테 잡혀 와?!’ 경찰분들께 정말 감사해 머리를 몇 번이나 숙이며 언니를 건네받으면서도 속으로는 쌍욕이란 쌍욕을 내뱉고 있었다.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언니를 바닥에 눕혔는데 그제야 언니 손에 봉지 하나가 들려있는 것이 보였다.  “자버가.. 좋아하는.. 계림원.. 누룽지 통닭….” 비몽사몽 중얼거리며 언니가 내려놓은 봉지 안에는 진짜로 다 식은 누룽지 통닭 한 마리가 들어있었다. 술이 떡이 돼 인사불성이 됐으면 집이나 제대로 찾아올 것이지 누룽지 통닭 따위를 사온 언니의 배려 넘치는 미련함에 머리끝까지 화가 나 그만 이성을 잃고 말았다. 방바닥에 누워있는 언니의 뺨을 짝, 짝 소리가 나게 때리며 “이 썩을 X아! 정신 차려, 이 썩을 X아!’ 했다. 그런데 언니는 얼마나 취했는지 아픈 줄도 모르고 잠만 잘 뿐이었다.



특유의 넉살과 사람 좋은 에너지로 인망도 두텁히고 재미난 도전도 많이 하며 살아온 언니. 하지만 동생에게 그런 아름다운 면들은 기억에 잘 새겨지지 않고 휘발된다. 내게 언니란 그저 운이 좋아서 지금까지 잘 살아남았지, 그 과정 중에 한 스텝이라도 꼬였으면 목숨이 오락가락할 수도 있었던 위태로운 존재일 뿐이다. 난 그런 언니를 컨트롤하려고 험한 비난을 일삼는 족쇄가 되기를 자청해왔다. 언니를 사랑한다. 그런데 너무너무 사랑해서 문제다. 술에 너무 취해서 자기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주제에 동생 먹이려고 통닭을 사오는 그 마음이 너무 고맙고 귀엽고 가엽고 화난다. 이 사랑스러운 망나니를 어떻게 고쳐 쓰지? 정말 골치 아픈 문제였다.


그런데 내 눈에만 언니가 망나니로 보이는 걸까? 언니와 언니 친구들과 함께 식사를 할 기회가 생겼다. 그 자리에서 언니는 전체 분위기를 주도하면서도 소외된 사람을 살뜰히 챙기는 멋진 사회인 그 자체였다. 내겐 무척 낯선 모습이었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익숙한 모습인 듯 했고, 내가 평소에 언니를 불안하고 위태롭게 본 것과 정반대로 사람들은 언니의 주도 하에 모든 것을 믿고 맡기고 있었다. 철렁 하고 몇 번 가슴이 내려앉았다. '이 멋진 사람을 나는 대체 얼마나 우습게 여긴 거야.' 미안한 마음에 언니 얼굴을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꽤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언니의 언니다운 모습들이 드문드문 떠올랐다. 고등학생 때 돈을 벌어보겠다고 피잣집에서 알바를 하고 그 얼마 되지도 않는 돈에서 동생 쓰라고 용돈을 따로 쥐어주던 모습 같은 거…


맞아. 우린 헤어져야 잘 살아.


서른 살이 되기 전에 꼭 바꾸고 싶은 것? 그건 언니와의 헤어짐이었다. 내 시야에 들어오는 언니는 어쩔 수 없는 걱정거리였다. 내가 안 보는 곳에서 아무리 멋지게 살더라도 말이다. 그런 내게 숨막혀 쪼여 살기에 언니는 더 멋지게 빛나야 하는 사람이었다. 서로의 숨통을 트이기 위한 해답은 서로 시야에서 멀어지는 것 밖에 없었다. 함께 사는 것 외엔 방법이 없다고만 생각했는데, 한 번 의문을 갖고 보니 그건 그저 관성적으로 굳어진 생각일 뿐이었다. 오랫동안 간절히 바랬지만 차마 실행에 옮길 수 없었던 일, 따로 사는 일을 언니에게 제안해보면 어떨까? 머리가 굴러가면서 두근두근 마음까지 설레왔다. 그리고 뒤이어 아찔한 아이디어 하나가 떠올랐다. 어쩌면 나, 남자친구랑 같이 살아봐도 괜찮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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