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월동 반달집 비혼 동거 기록
조급하고 불안한 마음에 잠을 못 이루는 밤이었다. 그러니까 스물 아홉의 초입에 서 있던 나는마음에 여유를 가지는 방법을 고민하고 있었다. 생각을 처언, 처언, 히이 하면 되나아? 아니면 행동을 느.. 리.. 게.. 하.. 면.. 되.. 나..? 차라리 다른 생각을 하자. 마음을 편하게 해줄 평화로운 풍경을 상상하자. 정신없이 흘러가던 세상이 멈추고 목적 없이 재촉하던 박동 소리는 잦아들도록.
그런데 아무리 생각의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려도 불안은 멈출 줄을 몰랐다. 사실, 이미 알고 있었다. 이 불안한 마음을 잠재우기 위해서는 불안함 그 자체를 들여다봐야 한다는 걸. 그것도 아주 디테일하게 톺아봐야 한다는 걸. 자꾸자꾸 말을 거는 불안의 목소리에 이제 귀를 기울여야 했지만, 나는 괜히 정신을 분주하게 만들어 그 소리를 무시해왔다. 그런데 이젠 소란스런 일상 소음을 뚫고도 소리가 또렷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너 서른 돼서 불안하지?
끄덕. 너무 잘해내고 싶어서 불안한 나이 서른. 그리고 그 나이가 목전에 닥쳤다. 난 아직 준비된 게 하나도 없는 것 같은데? 하지만 인생은 분명히 결정적인 분수령을 지나고 있었다. 왜 아무도 통행을 막아서지 않는 걸까? 이건 너무 낯설고 거북하잖아! 이렇게 쉽게 서른살이 되어버려도 괜찮나? 아니면 진작에 준비해야 했을 자격을 놓쳐서 알게 모르게 낙오자 신세가 되어있는 건 아닌가? 서른이 되어야 할 해의 1월 1일에 나이 요정 같은 게 나타나서 “죄송하지만 마자버님은 자격 불충분으로 스물 열 살이 되었음을 알려드립니다.” 와 같은 헛소리를 하는 게 아닐까? 디테일을 들켜버린 불안감은 머릿속에서 연쇄 폭발을 일으키며 점점 더 목소리를 키워갔다.
어릴 때는 삶이 찰흙같았다. 생각한 대로 삶을 주무르면 원하는 모양이 나왔다. 그러다 입학과 취업의 문턱에 선 학생 신분이 되자 삶은 나무 오르기와 같았다. 오르고자 하는 꼭대기만 바라보면 됐고 열악한 조건마저 디딤돌 삼아 오르고 또 오를 수 있는 에너지랄 게 있었다. 그리고 이십대의 끝에 다다르자 산다는 게 흐르는 강물 같다. 나는 어느새 아주아주 큰 흐름의 한 줄기가 되어있었다.
내가 어찌 나 홀로 ‘나’이겠는가. 나를 이루고 있는 이 세상, 이 타이밍, 이 사람들 없이 내가 어찌 ‘나’이겠는가. 강물이 아무리 의지를 갖고 흘러도 하늘로 솟을 수도, 산꼭대기로 역류할 수도 없는 일인 것처럼 주어진 큰 흐름을 따를 수 밖에 없다는 걸 잘 안다. 물고기 떼가 찾아오면 내가 물고기인가 싶고, 낙엽이 우수수 떨어져 뒤덮으면 내가 가을인가 싶고, 그렇게 하루하루 다른 마음가짐으로 사는 거다. 지금 당장 내가 어디에 있는지, 얼마 만큼 흘러 왔는지 알 수 없지만 확실한 사실 한 가지는 끊임없이 흐르고 있다는 사실. 이 불확실성과 시시때때의 충동으로 가득한 게 인생이라는 걸 이젠 너무 너무 잘 아는 거다.
그래서 불안했다. 이대로 흘러가기만 할까봐. 흐르는 강물이 의지를 가지면 무엇이 바뀔까? 그건 아마 미세한 흔적을 하나 남기는 정도일 것이다. 몇 십년을 세차게 흐르고 나서야, 어 뭐가 좀 바뀌었나? 싶은 정도의 미세한 흔적. 그 흔적이 쌓이고 쌓여 흐름의 방향을 틀 수도, 계곡의 깊이를 더할 수도, 아무 변화도 없을 수도 있는 일. 커브 길도 돌아가는 와중엔 직선처럼 보이듯이 시간이 흘러 문득 뒤돌아 봤을 때에서야 굽이굽이 흘러왔구나 싶은 정도의 흔적.
스물 아홉의 초입에 선 나는 그 흔적을 남겨야 한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그러자 불안은 잠잠해지고 꿈틀꿈틀 계산 머리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스물 아홉의 내가 서른이 되기 전에 바꾸고 싶은 것이 있다면 그건 뭘까?” 2020년, 나에게 몰아친 격변의 시작이 바로 이 질문이었다. 나는 주변을 돌아보기 시작했다. 바꾸고 싶은 것. 다시 말하면 환경을 바꿔서 내가 이르고 싶은 상태. 아주 막연하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강물의 흐름이 아주 미묘하게 바뀌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