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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자버 Jun 12. 2022

비혼 커플 동거, 그 문란함과 적나라함에 대하여

갈월동 반달집 비혼 동거 기록

"이런 질문 해도 되는지 모르겠는데..." 회사 점심시간, 직장 동료 한 분이 조심스럽게 운을 뗐다.


남자친구분이랑 침실도 같이 쓰는 거예요?


나는 빵 웃음을 터트리며 대답했다. “네, 당연하죠. 저희 각방 쓸 만큼 여유롭지 않아요!”

회사에서도 나의 동거 라이프는 공공연하게 알려진 사실이다. 긁어 부스럼인 일이라는 걸 알지만 도저히 동거 사실을 오픈하지 않고는 나의 언행에 일관성을 유지할 수 없어서 자의 반, 타의 반으로 공개 동거(?)를 하게 됐다. 그 사실을 처음 접한 사람들의 흔들리는 동공 속에서 나는 망설임을 읽는다. 수많은 질문이 떠오르지만, 수위를 조절하느라 차마 입을 떼지 못하는 복잡한 머릿속이 훤히 보인달까. 불발된 질문들은 분명 직장 동료분이 내게 건넨 질문과 같은 부류였을 것이다. 대한민국에서 결혼 안 한 남녀의 동거란, 결혼도 안 한 것들이 매일 밤 한 이불 덮고 자는 삶 정도로 일축되고 마는 것이 현실이니까, 이해한다.


“부모님도 아시냐?”, “나중에 헤어지면 흠 아니냐?”, “여자 쪽은 손해 아니냐?”라는 동거인을 대상으로 하는 질문들엔 한국 동거가 풍기는 특유의 ‘문란한 분위기’를 기저에 깔고 있다. 단지 남자친구와 동거한다는 사실을 밝혔을 뿐인데 “피임은 어떻게 하냐?”, “성관계에 이상 전선은 없냐?”라는 선 넘는 질문을 던지는 사람들을 보면서 ‘동거하는 사람 = 성적으로 오픈된 사람’이라는 선입견이 만연하다는 걸 느낀다. 혼전 성관계를 쉬쉬하는 사회 분위기도 있거니와 마음 놓고 관계를 맺을 장소도 부족한 탓에, 둘만 있을 수 있는 공간만 가면 ‘섹스를 해야 한다.’라는 강박을 학습하게 된 한국 커플들의 슬픈 현실을 고스란히 반영한 현상 아닐까. 그래서 연인끼리 낮이고 밤이고 무기한 함께 할 수 있는 동거는 자유로운 성생활을 보장해주는 터전처럼만 여겨지는 거다. 이제는 섹슈얼한 프레임에서 벗어나고픈 비혼 동거인으로서 자꾸만 침실로 집중되는 동거 무경험자들의 시선을 다른 곳으로 분산시킬 의무감을 느낀다.


사랑하는 두 연인이 적나라하게 보여줄 수 있는 것의 끝은 알몸이 아니다. 다른 이와 같이 살다 보면 내 살갗 아래, 까도 까도 새롭게 발견되는 수백 겹의 내면이 존재한다는 걸 알게 된다. 상대방이 보게 되면 깜짝 놀라 도망가지 않을까 싶은 모습들. 그것은 때론 악취가 나고 꼴사나우며 찌질하고 엽기적이기까지 하다. 혼자 사는 것의 장점은 남몰래 흘려보내고 싶은 것들을 마음껏 흘려보낼 수 있다는 것. 같이 사는 일의 무서운 점은 딱 그 반대다. 감추고 싶은 면들도 결국엔 들키기 마련이니까. 그 적나라한 모습들은 하수구 밑바닥에서, 변기 뒤 구석에서, 안방 모서리에서 발견되곤 한다. 그러니 동거의 낯 뜨거운 본질은 침실보다는 부엌과 화장실, 그리고 예상치 못한 음침한 어떤 구석에 존재한다고 해야 맞는 말 아닐까?


뿡, 뿡, 빵, 빵

적나라한 것중에 그래도 방귀는 귀엽다. 설쌤과 나는 언제 텄는지 기억도 나지 않을 정도로 자연스럽게 서로 방귀를 텄다. 처음엔 부끄러움이란 것이 있었는데 이젠 소리만큼 방귀를 대하는 태도도 뻔뻔하다. 올라가고 내려가고 재밌는 음가가 있는 방귀 소리가 들려오면 상대방은 그 방귀 소리에 꼭 응답해준다. “혹시 나 불렀어요? 오늘 목소리가 곱네요.” 이 세상에 사랑스럽게 느껴지는 방귀 소리가 하나쯤 존재한다는 사실은 나를 행복하게 한다. 어디 가서 절대 자랑할 수 없는 특권 아닌 특권이랄까. 서로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 생리 현상을 참아가며 노력하는 모습도 예쁘지만, 내가 너를 이만큼이나 지독하게 사랑하고 있구나를 확인할 수 있는 지금의 모습도 예쁘다. 하지만 가끔, 아주 가끔, 도저히 사랑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녀석이 나오려 할 때가 있다. 그럴 때는 몰래 숨어서 뀐다. 아직 설쌤의 사랑의 크기를 그렇게까지 극단적인 방법으로 테스트하고 싶진 않다.


정말 곤란한 건 내가 어딘가 흘려놓은 부산물이 내 눈엔 보이지 않는 경우다. 배수구에 남아있는 음식물 찌꺼기나 하수구에 뭉쳐있는 머리카락, 방문 아래 깔린 양말 같은 것들. 귀엽기보다는 엽기적인 장면들. 지난 세월 동안 제대로 여물지 못한 내 부족한 생활력의 밑천이 드러나는 순간들. 흠을 보는 건 항상 더 깔끔한 쪽이다. 다시 말하자면 언제나 설쌤이 나의 흠을 발견한다는 뜻이다. 내가 치워야지, 치워야지 했던 머리카락 뭉치가 어느 날 사라졌을 때, 내일 해야지 했던 설거지가 다 되어 있을 때, 한꺼번에 정리해야지 했던 옷들이 가지런히 걸려있을 때 간담이 서늘해진다. 나에게 뭐라고 지적할까 말까 고민하다가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코를 꽉 틀어막고 ‘그냥 내가 해버리고 말지’ 하며 내 부산물들을 정리했을 피곤한 설쌤의 얼굴을 떠올리면 그저 낯부끄럽고 미안해서 몸 둘 바를 모르겠다. 하지만 동시에 조금 억울함도 솟는다. 나도 나만의 던전에선 나름 쾌적함을 담당하던 책임자였는데, 더 깔끔한 사람을 만나 ‘상대적으로’ 지저분한 포지션이 된 셈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피곤과 당혹이 촘촘하게 교차하며 팽팽한 어색 기류를 형성한다. 그 기류는 연애 세포 박멸 존(zone)이자 진실의 방이다. ‘저 사람이 내가 알던, 사귀던, 사랑하던 그 사람이 맞나? 맞다면 나는 저 사람의 어떤 면까지 포용할 수 있는가?’ 혹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나는 어디까지 바뀔 수 있는가?’ 하는 엄중한 질문에 답을 해야 그 존을 비로소 벗어날 수 있다.

그래도 정말 정말 끝까지 보여주고 싶지 않은 딱 한 가지 부산물을 꼽자면, 바로 눈물이다. 나는 가끔 바위에 붙은 따개비처럼 베개에 얼굴을 처박고 운다. 눈물이 베개를 뚫고 그 아래 침대보까지 적실 정도로 마구 눈물이 날 때가 있다. 침대 모서리에 웅덩이처럼 고여서는 소리 없이 울어서 흡사 숨바꼭질이 서툰 세 살 아이가 자기 딴에 잘 숨어본다고 노력한 모양새 같기도 하다. 눈물을 흘리는 나는 나약하고 불안하고 무기력한 존재다. 설쌤에게 우는 모습만큼은 절대 들키고 싶지 않았던 건 자신도 사랑할 수 없는 나약하고 불안하고 무기력한 모습을 차마 그 누구에게도 감히 포용해달라 요구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극도의 불안한 상태란 설쌤이 없을 때만 딱 골라서 찾아왔다가 깔끔하게 떠나가지 않는다. 그 짠내 나는 눈물 혹은 눈물 자국 또한 언젠가 들키고 만다. 동거를 하면서 언제나 밝고 당당하고 빛나는 존재인 척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어느 하루, 나는 따개비처럼 침대에 붙어서 베개에 짠 내를 더하고 있었다. 그때 마침 귀가한 설쌤은 밝은 목소리로 "저 왔어요."하고 인사했다. 미처 눈물을 수습할 새가 없었던 나는 대답도 없이 그대로 가만히 침대에 붙어있었다. 답이 돌아오지 않자 이상하게 여긴 설쌤은 침대 모서리에 박혀있는 나를 쩍- 하고 떼어냈다. 그러자 눈물 콧물 범벅으로 축축하고 끈적하게 엉겨 붙은 얼굴이 나타났다. 그날의 설쌤의 대처가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어쩌면 100점짜리 대처였다고 할 수 있다. 설쌤은 3초 정도 가만히 내 얼굴을 보다가 그대로 나를 침대에 엎어놓았다. 그리고 조용히 방문을 닫고 나갔다. 한참이 지나 겨우 진정된 내가 알아서 방에서 기어 나올 때까지 설쌤은 방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리고 그 눈물에 대해 일절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내 속에서 조용히 치유의 시간을 거쳐 다시 천천히 떠오를 때까지 설쌤은 조용히 함구했다. 본 것을 못 본 척해주는 것. 다가와 줄 때까지 기다려주는 것. 어쩌면 같이 살기 때문에 더 파고들 수 있다고 생각하는 영역마저 매너 있게 선을 지켜주는 것. 그래서 상대방이 흘려보내고 싶은 건 그냥 흘려보내게끔 배려해주는 것. 동거에서 가장 필요한 덕목 아닐까.

동거 커플을 보며 “우와 거기까지 오픈했어요?” 하면서 놀랄 구석은 침실 말고도 많다. 현실은 상상 이상으로 하드코어하고 동거는 그 현실을 여지없이 비춰주는 거울이 되어준다. 아무리 오래 사귀었어도 모를 점들이 같이 사는 순간 속속들이 드러난다. 때론 놀랍고 때론 역겹기도 하지만 어떻게든 적응하고 타협해보자는 마음이 있는 한 모든 새로운 발견들은 결국 즐거움으로 끝난다. 나의 알몸, 그 아래 민낯, 더욱더 아래 밑바닥, 밑바닥에 고여있는 구린 웅덩이까지 보게 되는 게 동거다. 동거 커플이 거주하는 공간이 실은, 한 사람이라는 우주를 가장 적극적으로 탐험할 수 있는 거대한 배움의 장이라는 걸 알게 된다면 그 공간을 한낱 자유로운 성생활 터라고만 생각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래서 “혹시 침실도 같이 써요?” 하는 직장 동료의 질문이 전혀 밉지 않다. 동거 생활의 진면모에 대해 얼마든지 이야기해줄 수 있으니까. 그리고 그 안에 얼마나 큰 노력과 책임감을 쏟아붓고 있는지 얘기해줄 수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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