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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자버 Aug 22. 2022

검정 재킷과 몽둥이를 든 손

갈월동 반달집 비혼 동거 기록

“부모님이 언제 한번 자버랑 같이 식사 하고 싶다는데?”

피할 수만 있다면 최대한 피하고 싶었던 일이 결국 닥쳐왔다. 설쌤과 같이 산 지도 9개월이 훌쩍 넘어가던 시점, 딱히 식을 올리지도 약혼을 한 것도 아닌 사이지만 우리가 또 마냥 캐주얼한 관계도 아니지 않은가. 진작 설쌤의 부모님을 찾아뵙고 인사를 드렸어야 했다는 생각에 뜨끔했다. 그런 이야기를 어른들 입에서 먼저 나오게 하다니. 아니면 그저 숙제를 미루고 미루다 들킨 애의 멋쩍음이었을까? 이런 일 정도는 알아서 척척 진행하는 붙임성과 넉살이 내게도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나이가 들면 좀 나아지지 않을까 하는 바람과 달리 서른 넘은 지금도 낯선 어른들과의 자리는 상상만으로도 입 안이 바짝바짝 마르고 머리가 어질어질하다. 모자라고 모자란 나란 인간아…


“그래 식당은 내가 예약할게!”

말은 흔쾌히 해놓고 마음에 자리잡은 부담감에 못이겨 그날 퇴근길에 곧장 강남역으로 향했다. 내가 아는 선에서 가장 단정하고 점잖은 옷을 파는 곳, 지오다노에 가기 위해서였다. 지오다노는 유난스러운 엄마가 말은 잘 듣지만 무신경한 아이에게 열심히 입혀놓은 옷처럼 생겼다. 그리고 지금 내겐 그 피상적인 단정함이 간절했다. 어깨에 단단한 패드가 들어있어 넥 카라부터 전체적인 윤곽이 바르게 잡힌 검은색 반소매 재킷을 골랐다. 재킷은 나의 흐물텅한 내면을 단단하게 여며 감추기에 제격이었다. 체계 없이 마구잡이로 자란 나의 뿌리를 꾸역꾸역 옷 안에 욱여넣었다. 탈의실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이 제법 마음에 들었다.



약속 당일, 하필 비가 내려 단단히 세팅 해놓았던 머리와 함께 마음마저 어지러워졌다. 몇 달 동안 눈물로 빚은 울상이 덕지덕지 남아있어 얼굴은 또 왜 그리 못나 보이는지. 레스토랑 입구에서 빳빳한 재킷 옷깃을 만지며 초조한 마음을 정비하려고 애쓰고 있는데 문이 열리며 설쌤의 부모님이 들어오셨다. 두 분은 성큼 우리 앞으로 다가와 손을 내미셨다. 어머님은 “어유 사진으로 본 것보다 예쁘시네.” 하며 말을 거셨고 아버님은 옆에서 허허 웃으셨다. 한눈에도 설쌤의 동글동글하고 다정한 인상은 아버님을 쏙 빼닮았고 호쾌하고 뒤끝 없는 성격은 어머님에게서 왔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나는 조금 죄송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죄송해요, 진작 인사드렸어야 했는데…” 하고 말을 흐렸다. 나는 정말이지 죄송한 마음이었다. 아마 의무감에 가까운 죄송함 아니었을까. 풀버전으로 말하자면 “하필 나여서 죄송합니다.” 의 마음이랄까.


갓 스무살 됐을 때 일이다. 첫 연애도 아직 개시 못한 어수룩한 애들이 카페에 모여 떠들고 있는데 한 친구가 입을 뗐다. “연애 상대의 진면목은 그 사람의 가정환경을 보면 알 수 있대.” 다정하고 사려 깊은 친구였다. 무리 중엔 연애 경력이 꽤 있는 유일한 친구였으니 아마 친구들이 좋은 사람을 만나기를 바라며 건넨 따뜻한 조언이었을 것이다. “그렇구나.” 하며 고개를 끄덕이는 친구들과 달리 나는 차가운 돌처럼 굳어 있었다. 사람의 진면목을 판단하는 잣대. 그 잣대가 옳으냐 그르냐를 떠나서 나는 그 잣대를 쥐고 흔드는 쪽이 아니라 휘둘리는 쪽이란 걸 알았으니까. 차가운 돌은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사실 속으로 덜덜 떨고 있었다. 친구의 말이 진짜일까 봐서? 아니, 내가 조금이라도 밉보이는 행동을 하면 진실의 여부와 상관없이 그 잣대는 휘두르기 좋은 몽둥이가 된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고2 때 야자를 째고 튄 적 있다. 나름 그럴듯한 이유로 담임을 속이고 나갔는데 다음날 거짓말이 바로 들통나고 말았다. 체벌이 허용되던 시절, 나는 곧장 교무실로 불려갔다. 몽둥이 스윙이 내 엉덩이로 떨어지기 직전 담임이 질문했다. “왜 거짓말을 했니?” 난 당연한 걸 뭘 질문까지 하냐는 식으로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맞으면 아프잖아요.” 그러자 조용하던 교무실이 한바탕 웃음소리로 뒤집어졌다. 맞으면 아프다. 당연하게도. 나는 아프고 싶지 않았다. 항상. 하지만 이미 몽둥이를 들고 선 사람 앞에서 내가 한 짓이 맞을 짓인지 아닌지 명분을 따질 여유 같은 건 없었다. 늘 그렇듯이. 때릴 빌미를 주지 않는 것. 몽둥이를 쥐여주지 않는 것. 그게 내가 선택한 생존법이었다. 무언가를 감추고 피하더라도. 그 무언가가 내 진짜 마음이라든가 나의 자존감이라든가 하는 것일지라도.


코스 요리의  번째 음식이 나오자 아버님께서는  손을 모으고 조용히 소리  기도를 읊기 시작하셨다. 오늘 나와의 만남을 축복하는 동시에 나와 설쌤의 앞날에 행복이 가득하길 바라는 내용이었다. ‘식사 때마다  하는 기도겠지. 설쌤네 가족에게는 일상적인 일이겠지.’라고 되뇌며 눈물이    같은 마음을 진화시켜 보려 했지만 불가능했다.  기도에는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따뜻한 진심에 포근히 안기는 느낌을 주는 고운 리듬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를 위해 따뜻하게 포개질  손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사실 덕분에 마음 풍요로워졌다. 어쩌면, 어쩌면  테이블에 둘러앉은 모두가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엮일  있는 날이 오지 않을까? 가슴 찌르르한 상상을 하며 기도를 마쳤다. 다행히 요리는 무척 맛이 좋았다.


우리 집은 모든 게 부족했지만, 사랑만은 넘쳐났다. 아니면 사랑밖에 주고 받을 게 없는 집이었다는 게 더 정확한 설명이려나. 덕분에 불안했지만 나는 나와 내 삶을 사랑하며 자랄 수 있었다. 그만큼 다른 사람도 나를 좋아해 주기를 바란 건 자연스러운 욕망이었다. 하지만 좋은 사람이 되는 건 별다른 일이다. 남에게 좋은 사람으로 비치는 일은 더욱더 다른 차원의 이야기이고. 심리학을 전공하던 대학 시절, 프로이트를 전공하는 한 교수님께서 자신의 결점은 자기 눈으로 볼 수 있는 게 아니라고 하셨다. 결점이라는 건 무의식 속 패턴과 같아서 다른 누군가에 의해 발견될 수 있을 뿐이라고 했다. 그 이후 나에게도 그런 결점이 있으리라 확신에 가까운 짐작을 갖게 됐다. 늘 와이프를 향한 사랑을 표현하시는 교수님이셨지만, 레퍼런스로 보여주신 모든 영화 속 남자 주인공이 불륜을 통해 치유 받고 있다는 걸 학기 내내 눈치채지 못하신 것처럼.


빛나는 것에 견주면 나는 어두웠다. 단단한 것에 비하면 유약했고 매끈한 것과 대어보면 굴곡으로 엉망진창이었다. 말하자면 나는 하자 있는 상품이었다. 판매하기 전, “이런이런 하자가 있는데 그래도 구매하시겠어요?” 하고 구매자의 동의를 얻어야 하는 상품. ‘그럼 팔려 가는 일이 없게 하자.’라며 허황한 목표를 가져보기도 했지만 “사연 있는 애들 보다 잘사는 애들이 삐딱한 생각도 안 하고 스무스하게 일을 잘하더라니까”라는 상사의 삐딱한 말 한마디에도 혹시 나를 염두에 두고 공격한 건 아닐까? 밤잠 설쳐가며 괴로워하는 자신을 보며, 예쁜 상품이 되길 포기하고 매대에서 내려오는 일이 얼마나 주제넘은 환상이었는지를 깨닫곤 했다. 예쁜 포장지랍시고 고른 검정 재킷이 실은 뒤가 뻥 뚫린 흉한 옷이 아니었을까 끝까지 나의 맹점을 의심하고 또 의심하는 나였다.


어느새 준비된 코스 요리가 모두 나오고 자리는 마무리하는 모양새로 접어들었다. 예상대로 설쌤네는 화사한 빛이 드는 가족이었다. 서로가 단단했고 이대로만 간다면 앞으로도 평탄할 것 같은 건강한 모습이었다. 난 계산서를 집어 들었다. 이번 식사는 나와 설쌤이 계산하기로 했다. 물론 마음 같아서는 나 혼자 다 계산하고 싶었다. 마치 약속 시간에 늦은 사람이 돈을 더 내려고 하는 것처럼. 하자가 있는 쪽이 빚을 갚는 심정으로 말이다. 헤어지기 전 어머님과 아버님께서 다음에는 집으로 놀러 오라고 하셨다. 우린 꼭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 꼭 먼 해외여행을 마치고 일상으로 돌아오는 길 같았다. 아주 잠깐 꿈을 꾸었구나. 아무래도 아직 먼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와 가족이 되는 일. 사람이 사람을 알아가는 데에는 정말 많은 시간과 정말 많은 공이 들어간다. 내 삶에 설쌤 하나를 끌어들이는 데에도 너무너무 큰 힘이 필요했고 운명에 가까운 큰 사건들을 겪어내야 했다. 누가 뭐래도 나는 이 세상에서 내가 가장 소중하다. 아직은 나를 지키고 싶었다.


집에 돌아오자 식사 내내 잔뜩 긴장하고 있었다는 게 실감 났다. 힘을 풀자 손에서 툭 하고 무언가 떨어졌다. 그건 바로 몽둥이. 온몸이 욱신욱신 쑤셔왔다. 터무니없는 잣대를 몽둥이처럼 휘두르며 나를 아프게 하는 사람, 그건 바로 나 자신이다. 따뜻한 손길이 성찬이 차려진 테이블로 나를 이끌어도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싶었다. 그 테이블 앞 보다 편한 자리가 있다고, 상품을 진열하는 매대가 나의 자리라고 주장하고 싶었다. 몇 겹의 손이 포개어져야 나는 제 발로 테이블 앞까지 다가갈 수 있을까? 사실 정답은 있다. 딱 한 겹이면 된다. 손에 쥔 몽둥이를 내려놓고 내가 나를 위해 두 손을 포개어 기도할 수 있을 때 난 용기 내서 성찬에 숟가락을 얹을 수 있을 것이다. 확실한 건, 아직은 그게 어렵다는 사실이다. 나는 검정 재킷에 묻은 빗물을 털어내고 예쁘게 각을 잡아, 옷걸이에 걸어뒀다. 앞으로도 종종 입을 일이 생길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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