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월동 반달집 비혼 동거 기록
아빠의 영정사진을 보자기에 잘 싸서 반달집까지 가져왔다. 설쌤의 허락하에 당분간 거실 일부를 추모의 공간으로 쓰기로 했다. 장지에서 주워온 밤송이도 사진 옆에 뒀다. 어떻게 해서든 아빠가 진짜 우리 집에 와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싶었다. 영혼이란 게 있다면, 그리고 그게 어떤 사물에든 스밀 수 있는 성질을 갖고 있다면 부디 그 작은 밤송이에 깃들었기를 바라며. 이런 식으로 반달집에 아빠를 모시게 될 줄 꿈에도 몰랐다. 영정사진을 반달집이 한눈에 잘 들어오는 자리에 뒀다가 문득 의구심이 들었다. ‘과연 아빠 눈에 반달집이 좋아 보일까?’ 집에 조명이 과하게 밝다는 생각이 들었다. 잡다한 피규어는 어떻고. 얼룩덜룩 액자며 그림은 또 왜 이렇게 많은 거야. 반달집의 모든 요소가 꼴 보기 싫었다. 예쁘고 아기자기한 장식들을 다 떼어내서 창밖으로 집어 던지고 싶었다. 나 좋자고 해놓은 모든 것들이 나를 수치스럽게 했다. 과거의 내가 아닌 새롭고 멋진 내가 되고자 애쓴 흔적들이 마치 아빠에게서 멀어지려고 발악한 증거처럼 느껴져 눈을 질끈 감고 어디로든 도망가고 싶었다.
나는 말 그대로 멈춰버렸다. 붕대를 칭칭 감은 발 때문에 오도 가도 못하기도 했지만, 뭣보다 생각과 마음이 한자리에 우뚝 서버렸다. 뭔가를 새로이 하고 싶지도, 과거로 돌아가 무의미한 기억의 재조합을 만들어내고 싶지도 않아 가만히 누운 채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내가 찾아가지 않으니 생각이 제 발로 내게 찾아와 나를 무너뜨리기 시작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어느 부분을 되돌리면 될까.’ 후회라는 이름의 철퇴는 앞을 바라보려는 내 고개를 거듭 쳐서 뒤를 향하게 했다. 잔인하게도 나는 내 뒤에 펼쳐진 나의 지난 선택들을 있는 그대로 봐야 했다. 이 끔찍한 현실을 만든 내 발자취들을 보는 것만 한 형벌이 또 있을까. 그 철퇴 질을 피하기 위해서는 맨정신으로 지낼 수 없었다. 거의 매일 밤 술을 마셨다. 아니면 저항 없이 눈물만 흘렸다. 마시거나 흘리거나. 그런 하루의 반복으로 내 얼굴은 살이 쪘다는 표현 그 이상으로 흉측하게 망가지기 시작했다.
지하철을 타는 게 무서워졌다. 잔뜩 울상이 된 내 얼굴을 남이 보는 게 싫었다. 왠지 사람들이 내 속까지 꿰뚫어 보는 느낌이었다. 그 사람들이 티는 안 내도 속으로는 ‘복에 겨워 아빠를 잃는 줄도 몰랐던 것’ 하며 다들 손가락질하는 것 같았다. 나는 잔뜩 주눅이 든 채 얼굴을 들 수 없었다. 결국 매일 출근길 택시를 타기로 했다. 택시비로 지출이 컸지만 그만큼 큰 도움이 되는 의식과도 같은 시간이었다. 출근길에는 항상 남산 소월길을 지나가는데 겨울이라 창밖으로는 잔뜩 헐벗은 벚나무가 죽 늘어서 있는 게 보였다. 그 나무들을 바라보는 게 그나마 가장 큰 위로가 됐다. 꼭 붙잡고 있던 나뭇잎들을 다 떨궈버리고 황량하게 비어있는 그 가지에 기대 쉴 수 있었다. 그건 마음이 풍족한 사람의 든든한 어깨보다 큰 위로였다. 상처 입은 내가 들어가 쉬기에 꼭 맞는 공간이었다. 그렇게 너덜너덜한 상태로 회사는 어떻게 다닌 걸까, 사람은 어떻게 만난 걸까. 빈 나뭇가지의 힘을 받아 나는 그야말로 초인적인 힘을 짜내어 겨우 일상을 연명해나갔다.
집에 돌아오면 어김없이 울었다. 거실에 들어서기도 전에 문간에 서서, 책상에 앉아서, 샤워기 헤드 앞에서, 침대 사이에 끼여서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반달집 곳곳에 눈물을 적셨다. 100년이나 된 집인데 뭐 어때. 별의별 꼴을 다 봤겠지. 이 정도 슬픔은 오래된 반달집에 쌓이고 쌓인 슬픔의 농도 퍼센티지를 조금도 바꿔놓지 못할거야. 그렇게 집에 빗대어 내 슬픔을 작은 것으로, 하찮은 것으로 만들고 싶었지만, 자기밖에 모르는 내 몸은 이까짓 슬픔 따위도 감당 못하고 점점 망가져 가기만 했다. 가슴이 아렸다. 실제로, 물리적으로 아팠다. 팔뚝만 한 가시가 등을 관통해 가슴까지 뚫고 지나간 듯 늘 아팠다. 침대에 반듯이 등을 대고 눕기도 힘들 만큼. 사랑하는 사람의 옅은 숨에도 가시 박힌 자리가 쓰라려 와 나는 자꾸만 어둡고 외진 곳에 숨기 바빴다. 어쩌면 가장 안전한 쉼터는 아빠 곁으로 가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무서운 상상까지 하면서.
내가 그리는 풍경 속엔 항상 아빠가 함께했다. 힘들었던 날들을 대수롭지 않게 기억에서 꺼내어 도란도란 이야기하며 서로를 따뜻하게 보듬을 수 있는 때가 오리라 믿었다. 하지만 이제 그런 풍경은 백번 고쳐 그려도 오지 않을 터였다. 그렇다고 이미 지나온 과거에서 찾아도 없을 풍경이었다. 영영 없을 풍경. 영원이라는 게 이렇게 무서운 거였나. 내가 살 수 있는 시간은 현재밖에 없었다. 과거도 못 가고 미래도 갈 수 없는 사람에게 현재는 카르페디엠이 아니라 무서운 형벌임을 어떤 철학자는 일찌감치 알았을까? 그렇다면 왜 나에게 알려주지 않은 걸까? 나는 쓰라린 가슴께를 턱, 턱 치며 빌고 또 빌었다. 무엇을 빌었는고 하니, 그냥 살려달라고 빌었다. 이 상태로도 살 수 있는 방법이 있으면 제발 알려달라고 빌었다.
가지런히 놓여있는 아빠의 영정 사진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나는 숨 쉬듯 입가를 맴도는 그 한마디를 처음으로 육성에 실어 밖으로 뱉었다. “있을 때 잘할걸.” 가슴이 아려오더니 이미 벌겋게 부어 화끈거리는 눈가로 쓰고 뜨거운 눈물이 번져왔다. “있을 때 잘할걸.” 몇 번 더 내뱉었다. 반복할수록 말이 더 예리해졌다. “있을 때 잘할걸.” 얼마나 흔한 말인지. 남이 얘기할 땐 실바람처럼 귓등을 스치고 지나가지만 내 입에서 나올 땐 오장육부를 찢으며 나오는 말. 그 예리한 말로 나는 내 속을 난도질했다. 마땅히 그랬어야 했을 것처럼 담담하게 찢어지기로 했다. 하지만 가시 박힌 자리는 헐거워지기는커녕 더 단단히 내 살과 결합해 엮여가고 있었다. ‘아, 앞으로 나는 이것과 함께 살아야 하는구나. 괴물처럼 흉하게. 남이 볼까 부끄러워하며.’ 살려달라고 빌었는데, 이 방법밖에는 살아갈 방법이 없다는 걸 나는 서서히 알게 됐다.
그렇게 2월이, 3월이 지나가고 있었다. 제기랄, 봄이 오고 있었다. 세상 도처가 꿈틀대고 몸부림치고 돋아나며 봄이 오는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감히 새로이 태어나려고 하다니.’ 나는 시샘과 박탈감에 이가 바득바득 갈렸다. 세상에 염치란 게 있으면 봄은 그러면 안 되는 것이었다. 세상에나, 시간이란 게 흐르다니 감히. 새싹은 흙바닥 속으로 도로 머리를 처박고 꽃봉오리는 깊은 어둠으로 말리고 말려들어 가야 마땅했다. ‘나는 무엇을 믿어야 하나. 나는 무엇을 원해야 하나. 봄은 오고 있는데.’ 징그럽도록 반복할 줄밖에 모르는 저 무심한 세상이 무서워 나는 더욱더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빼꼼 내다보이는 창가로도 보였다. 반달집 마당에도 봄이 찾아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