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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자버 Jul 05. 2022

가족 같지 않은 가족. 가족이 아니어도 가족.

갈월동 반달집 비혼 동거 기록

2년 전 큰아빠가 돌아가셨다. 심장마비라고 했다. 멀쩡히 뛰던 심장이 그렇게 하루아침에 뚝 멎어버릴 수도 있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입관식 때 본 큰아빠의 신체가 너무 튼튼하고 멀쩡해 보여서 더욱 허무하고도 허무했다. 그리고 속으로 무서운 상상을 했다. '아빠도…' 입을 꾹 다물었다. 너무 무서워서 언어로라도 그 상상이 존재하면 안될 것 같았다. 생각까지 차단했다. 하지만 나를 조롱이라도 하듯 그 무시무시한 상상은 말보다 먼저 현실이 되어 보란 듯 내 앞에 섰다. 아빠가 돌아가셨다. 큰아빠와 똑같은 이유로. 그 어떤 마음의 준비도 하지 못한 채 나는 시속 300km로 그 현실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코로나 이후로 처음 가는 대구였다. 서울에서 대구까지 KTX로 1시간 50분. 아빠의 죽음을 향해 가는 길이 이렇게 빨라도 되나? 그러니까 이렇게 편하고 쉬워도 되냐는 말이었다. KTX는 염치도 없이 나와 대구 사이에 놓인 철로를 게걸스럽게 먹어 치우고만 있었다.


창가에 앉아 마스크를 눈물로 적시고 있는데 객실마다 달린 모니터에 광고 하나가 반복해서 상영되고 있었다. '행복한 집을 만드는 가장 빠른 방법은 가족과 가까워지는 것입니다' 하는 카피가 밝게 웃는 4인 가족 모델의 얼굴 위로 떠올랐다. 나는 그 모니터를 천장에서 잡아 뜯은 다음 발로 짓밟아 뭉개버리고 싶었다. 그들의 환한 미소가 울상으로 잔뜩 일그러질 때까지. 나는 아빠와의 채팅창을 열었다. 코로나가 잠잠해지면 내년엔 꼭 보자는 대화가 마지막이었다. 그러니까 이번 생에서 마지막 대화였다. 반달집엔 와보지도 못한 채. 설쌤 얼굴 한번 보지 못한 채. 이렇게 아빠와의 시간이 영영 끝나버렸다. 다리를 다쳤을 때 아빠에게 연락해야 했다. 아빠의 귀여운 막내가 다쳐서 아프다고, 아빠가 괜찮다고 말해줄 때까지 괜찮아지지 않을 거라고 말해야 했다. 왜 망설였을까, 왜 망설였을까. 망설이던 그때 아빠는 살아있었다. 나에겐 기회가 있었다.


아빠와 단둘이 스페인으로 여행을 간 적이 있다. 첫날부터 소매치기로 50만 원이나 잃게 된 아빠는 여행 내내 꿍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예쁜 풍경을 뒤로하고도 사진만 찍으면 그 우울이 여과 없이 드러나 내 마음마저 우중충해지기 직전이었다. 더는 안 되겠다 싶어서 전망 좋은 성곽을 배경으로 아빠를 세워놓고 세세하게 표정을 코칭하기 시작했다. "눈도 웃으셔야죠~ 입꼬리 좀 더 올려보세요, 옳지!" 찰칵! 그땐 꿈에도 몰랐다. 그렇게 어렵게 얻은 사진 한 장이 아빠의 영정 사진이 될 줄은. 사람들이 시키는 대로 여기저기 싸인을 하자 아빠의 빈소가 금방 차려졌다. 어느새 상복 차림이 된 나는 다친 다리를 절뚝거리며 내 손으로 찍은 아빠의 영정 사진 앞으로 다가갔다. 어이가 없어서 기가 찰 노릇이었다. 영정 사진 따위가 되라고 열심히 지어낸 웃음이 아니었다. 그 와중에 그 웃음 뒤로 조금은 쓸쓸해 보이는, 이 세상에서 오직 나만 목격한 아빠의 우울감이 보이는 것 같아서 마음이 무너져내리고 또 무너져 내렸다.


"다른 친척들한테 알리는 게 맞겠나? 워낙 사람이 자주 죽었다 아이가…"

여기저기 연락을 돌리다 말고 망설이며 친척 한분이 내게 말을 건넸다.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이란 게 비유가 아니란 걸 알았다. 나도 안다. 2년 전에 큰아빠가 돌아가셨고 1년 전엔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그리고 그다음 해에 우리 아빠가 돌아가시면서 우린 3년 내내 장례를 치르는 중이었다. 사촌끼리 우스갯소리로 다음엔 상복 말고 사복 입고 만나자는 농담까지 나눴으니 말 다했지. 그런데 말이다. 그래도 그렇지, 사람이 너무 자주 죽어서 부고를 알리지 말자는 건 아빠의 죽음이 민폐라도 된다는 말인가. 치솟는 감정을 억누르고 말했다. "당연히 알려야죠." 마음은 시뻘건 불에 지짐 당한 것처럼 아프고 쓰라렸지만 이를 악물었다. 아빠의 마지막 가는 길만큼은 내가 꼭 지켜주고 싶었다.


그러나 막상 할 수 있는 거라곤 아빠 사진 앞에 앉아 자꾸자꾸 떠오르는 생각과 맞서 싸우며 눈물만 뚝뚝 흘리는 일뿐이었다. 생각이라고 에둘러 말한, 사실은 후회인 것들이 더 구체적인 형상을 갖추고 목의 기관들을 통해 소리로 새어 나오지 않도록 혼신의 힘을 다했다. 미쳐 돌아버릴 것만 같은 그때 설쌤이 도착했다. 예의를 갖춰 아빠에게 두 번 절을 하는 설쌤을 가만히 바라봤다. '저게 아빠와 설쌤이 나눈 이 세상에서의 첫인사구나.' 그렇게 말하는 게 유효한지는 모르겠지만. 눈물을 그렁그렁 단 눈을 똑바로 뜨고 밝은 목소리로 설쌤을 친척들에게 소개했다. 남자친구이며 이미 한집에서 같이 살고 있다는 사실까지 빼먹지 않고 다 이야기했다. 그렇게 말하는 것으로나마 설쌤에게 이 자리에 함께 할 수 있는 공식적인 자격을 부여하고 싶었다.


그래도 상주들 자리에 설쌤이 함께 할 자리는 없었다. 대신 설쌤은 멀찍이 떨어진 조문객 테이블에 앉아 간간이 나를 돌보며 시간을 보냈다. 설쌤에게 카드를 쥐여주며 잠시 카페 같은 데서 바람이라도 쐬고 오라고 했다. 설쌤은 어떤 자초지종도 묻지 않고 기분 상해하지도 않은 채 재빠르게 장례식장을 나섰다. 어느 것에도 개의치 않은 설쌤의 뒷모습을 보자 가슴이 미어졌다. 다 필요 없고 지금 내게 필요한 건 설쌤인데 이게 무슨 상황이란 말인가. 이젠 이렇게밖에 못하는 내 처지에 화가 났다. 남자친구라는 호칭에도 화가 났다. 우리에겐 이름이 필요했다. 소중한 사람을 소중하게 대할 때는 이름이 필요한 때가 분명히 있는 것이다. 내 옆에 떳떳하게 앉아 우리 아빠 마지막 가는 길을 함께 지킬 자격을 부여하는 이름. 이렇게 가깝고 끈끈하고 숭고한 우리에게 어울리는 그 이름이란 것은 무엇이 되어야 하나? 남편이면 되나? 겨우 남편으로 되는 건가? 나의 자존감이나 떳떳함 같은 것들을 팔아서라도 그 이름을 살 수 있다면 사서 가지고 싶었다.


바쁘게 식은 흘러갔고 아빠는 다음날 하얀 뼛가루가 되어 설쌤 앞에 실물을 드러냈다. '아빠, 부끄럽지도 않아? 초면에 이런 모습부터 보여주면 어떡해. 이건 순서도 경우도 다 아니잖아.' 그러는 나의 모습은 또 어떠한가. 하얗게 쌓인 뼛조각 더미의 굴곡만 보아도 분명 우리 아빠라는 걸 알아보겠는 미칠 지경에 짐승처럼 울부짖는 내 모습 또한 추하기 그지없었다. 이 그로테스크한 광경에 설쌤이 말없이 나를 떠난다고 해도 납득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따지고 보면 남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설쌤은 묵묵히 내 곁을 지켰다.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을 해야 할 일처럼 수행하는 설쌤을 지켜보는 내내 내 안에서 조용히 무언가가 진행되고 있는 것을 느꼈다. 그건 너무 무의식 속에 진행된 일이라 설쌤의 동의조차 구하지 않은 의식이었다. 아니 동의는 필요 없었다. 때때로 일어나는 분노조차 전소시킬 정도의 뜨거운 감정이 피어올랐고 우린 자연스럽게 가족이 되어 있었다. 어떤 약속의 말이나 증인도 필요 없는 과정이었다. 아마 앞으로 평생, 이 뜨겁고 끈끈한 것을 붙잡고 설쌤과 함께 하게 되리란 걸 그 순간 확신했다.


아빠를 장지에 모시고 모든 식이 마무리되었다. 아빠가 세상에서 사라졌다는 걸 세상에 알리느라 정작 나는 아빠의 죽음을 오롯이 마주할 시간이 없었다. 결혼식도 그렇지만 한국에서의 의례와 의식이란 것은 절대 그 당사자를 주인공으로 대접해주는 법이 없다. 모든 절차가 끝나고 비로소 내 삶 한 가운데 턱하고 자리 잡은 아빠의 죽음을 바라보게 됐다. 그 앞에 죄인처럼 고개를 숙이고 가만히 섰다. 소중한 것을 소중하게 아껴줄 수 있는 타이밍을 놓친 것도 죄라면 죄니까. 아등바등 내 신세를 바꾸려고 애쓰는 동안 마음을 쏟고 돌봐야 할 것을 진작에 놓쳐버린 내 잘못이 크니까. '저도 잘살아보려고 그런 거예요.' 나의 인위적인 발악은 무자비한 운명과 맞붙었다가 처참히 패배했다. 다리를 다친 건 경고였다. 그 자리에서 가만히 기다리라는 경고. 변화는 만드는 게 아니라 자연히 찾아오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제 막 1월의 마지막 주가 시작되고 있었다. 사주 아저씨 말에 의하면 나의 서른은 아직 시작하지 않은 셈이었다. 나처럼 처참한 서른의 시작이 있을까? 피식 웃음이 나왔다. 앞으로를 살아낼 자신이 없었다. 이 많은 끔찍함을 해결은커녕 제대로 파악조차 못 한 채 나는 그렇게 또 서울로, 반달집으로 돌아가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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