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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자버 May 23. 2022

구속감 혹은 소속감, 가족의 품으로 탱,탱,탱탱볼

갈월동 반달집 비혼 동거 기록

크리스마스가 끼어있는 주의 마지막 평일. 아니나 다를까 지하철 기다리는 사람들 손에는 케이크가 하나씩 들려있다. 몇 분 전까지만 해도 사무실에 앉아있었을 것 같은 경직된 차림새의 사람들임에도 조만간 맛볼 각자의 행복한 순간을 상상하느라 들뜬 표정만큼은 살아움직이고 있었다. “응, 아빠 곧 갈게”하는 흐뭇한 통화 내용도 들려왔다. 물론 내 손에도 내 몫의 케이크가 들려있었다. 하얀 생크림 위에 빨간 딸기가 토핑된 고전적인 크리스마스 케이크. 몇 주 전부터 케이크를 사 가기로 약속한 날이니까, 반달집에서 우리가 처음 맞이하는 크리스마스니까, 케이크를 기다리며 맛있는 음식을 준비하고 있는 사람이 있으니까, 퐁신퐁신한 생크림이 포장 상자에 닿아 무너지지 않도록 팔에 힘을 잔뜩 준 채 지하철을 기다렸다.



이번 크리스마스엔 꼭 케이크 촛불을 불고 싶다고, 11월 말부터 케이크를 예약해야 한다며 호들갑을 떤 건 다름 아닌 나였다. 우리만의 특별한 서프라이즈 이벤트보다는 남들 다 하는 평범한 연례 행사 같은 크리스마스를 맞이해보고 싶었다. 반달집에 오고 나서 나는 자꾸만 소꿉놀이하듯 평범한 가정을 모방하려고 한다. 그리고 크리스마스야말로 그 욕구를 맘껏 펼쳐도 누가 뭐라 하지 않을 완벽한 무대가 되어줄 터였다. 성냥팔이 소녀가 맹추위에서 극적으로 생존해 어른이 됐다면 나처럼 살고 있지 않을까? 창밖에서 바라만 보던 풍경을 직접 재현하는 재미로 하루하루를 행복하게 지내는 성냥팔이 아가씨를 상상해본다.


어린 시절 우리 집은 연례행사랄 게 없었다. 철 따라 여행을 떠나기도 하고 각자의 생일날 구색 갖춰 축하를 나누기도 했지만, 거기엔 어떤 의무감도 일관성도 꾸준함도 없었다. 어떻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좋은 의미로 우리 가족은 늘 가족이 뒷전이었기 때문이다. 저녁은 반드시 가족과 함께 먹어야 한다던가, 몇 시까지는 집에 들어와야 한다는 마땅한 통금 같은 것도 없었다. 놀이터에서 친구들과 놀다가 분위기가 한창 고조 됐을 때, 한 아이가 이젠 집에 들어가 볼 시간이라며 머뭇거리며 모래를 털며 자리를 뜰 때 내가 그 아이에게 느낀 건 연민이었다. 그 아이가 집에 들어가 맞이할 가족은 분명 고약하고 메마른 표정의 못된 어른들일 것이라고 내 멋대로 상상했다. 내 알량한 연민의 배경엔 내가 언제 들어가든 너그럽고 온화한 표정을 지을 줄 아는, 말하자면 좀 더 멋진 부류에 속하는 우리 가족이 있었다.


정해진 날 정해진 절차대로 이벤트를 이행하는 것만큼 시시한 일이 또 있을까? 가훈마저 ‘사랑하며 살자’인 우리 집에서, 난 마음 내킬 때 애정을 내 방식대로 풍족하게 표현할 수 있는 우리야말로 진솔한 가정이라 자부했다. 사랑이 너무 빈번해서 굳이 날 잡고 사랑을 베풀어 본 적 없는 우리 가족은, 그런 덕분에 각자 자신의 인생에 충실한 게 늘 1순위였다. 말하자면 내 인생을 가꾸는 것 또한 나를 향한 안으로의 사랑을 베푸는 일이었으니까. 가족이라는 이름에 권위가 부여되는 것 보단 그편이 훨씬 나았다. 내 중심에 언제나 나를 둘 수 있는, 그런 ‘쿨’한 분위기 덕에 책도 읽고 공부도 하고 결국에 그 ‘쿨력’ 덕에 어찌저찌 대학까지 갈 수 있었다고 나는 믿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였을까? 놀이터에서 아쉬움 가득한 채 모래를 털던 그 아이를 집으로 끌어당기던, 구속감이라고만 생각했던, 그 아이를 집으로 떠밀던 순풍은 어쩌면 따뜻함 소속감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것은.


동기며 선후배며 명절이라고 고향으로 떠나 텅텅 빈 대학 도서관. 남들보다 일찌감치 시험공부 태세에 돌입한 나는 그때도 ‘차 막히고 사람으로 붐비는 연휴 때 꼭 가족을 봐야 하나? 시간 넉넉한 주말 아무 때나 가서 봐도 똑같은 가족인걸.’이라며 우쭐댔다. 이제 막 우정의 절정에 다다른 대학 친구들이 멀리 놀러 가자며 의기투합하려는데 한 친구가 가족 모임과 날이 겹쳐 불참 의사를 밝히며 미안해할 때도 여전히 의아하기만 했다. 처음엔 가족이 변명거리인 줄 알았다. 늘 보는 가족과의 뻔한 모임에 우리의 젊은 패기를 쏟을 기회가 고민할 것도 없이 밀리다니, 이해할 수 없었다. 외롭고 힘들 때도 마찬가지였다. 어떻게 그 괴로움에서 벗어날 힘을 기를지가 고민이었지, 가족이 내 마음 비빌 구석이 되어줄 수도 있다고는 생각해본 적 없었다. 나는 로켓이었고 가족은 일찌감치 내가 딛고 벗어난 발판일 뿐이었지 돌아가 쉴 곳은 못 되었다.


간신히 취업한 후 매달 따박따박 들어오는 월급과 함께 로켓 같은 삶은 안정 궤도에 진입하게 됐다. 하루하루 기를 쓰지 않고도 매일매일이 굴러갈 수 있다는 사실이 낯설고 불편했다. 광활한 우주에서 '조금' 외로웠지만 '많이' 뿌듯했기때문에 괜찮을 수 있었다. 달리 더 갈 곳이 없다는 점에서 그곳은 목적지인 ‘우주’여야 했지만, 영영 그곳에 머물러 있고 싶지 않다는 점에서 그곳은 ‘우주’여선 안 되는 곳이었다. 이 무탈함과 영원한 반복의 굴레가 ‘삶’이라는 걸 그 당시엔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정해진 궤도 안에서도 길을 잃을 수 있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길을 잃은 채 나는 주변을 살피기 시작했다. 특히 편안한 얼굴을 한 사람들을 찾았다. 좀처럼 구겨지지 않는 사람들, 거침없이 쭉쭉 나아가기만 하는 사람들. 대체 저 사람들은 믿는 구석이 뭐야?


탱, 탱, 탱! 그들은 탱탱볼이었다. 삶의 리듬을 갖고 있는 사람들. 지구의 중력이 따뜻한 품 안으로 강하게 끌어안을 땐 속절없이 하강 했다가 다시 또 대기권 밖으로, 까만 하늘 위로 높이 치솟았다가, 그 높이를 즐길 찰나 미련 없이 낙하해버리는 탱탱볼. 그들의 중력, 그들의 땅, 그들의 믿는 구석, 놀이터 모래를 털고 일어난 아이가 이끌리듯 향했던 그곳, 집, 가족이 있는 집. 거기에 힌트가 있는 것 같았다. 반복되는 것 같아도 조금씩 변화를 더 하며 삶 전체를 변주하는 탱탱볼의 리듬에는 삶을 좀 더 살아봄직하게 만드는 아름다운 멜로디가 덧입혀져 있었다. 그렇구나, 내겐 저 리듬이 필요하구나. 몇 번이고 다이빙했다 다시 튀어 오를 수 있는 저 탄력이 절실하구나. 하지만 로켓으로밖에 살아보지 못한 내겐 치명적인 단점이 하나 있었다. 위로 올라가는 데 쓸 연료밖에 없는 로켓에게 하강이란 곧 추락이라는 점 말이다.

땅을 향하는 것이 처음엔 두려웠다. 부서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행히 나는 부서지지 않고 보드라운 품 안에 안길 수 있었다. 그건 사랑하는 사람의 품이었다. 하늘의 빛나는 별들을 뒤로 하고 그 품에 처박혀 영영 고철 덩어리로 남게 된대도 행복할 것 같았다. 그리고 모든 건강한 관계가 그러하듯, 그 품 안에서 가득 채운 에너지는 나를 다시 두둥실 떠오르게 했다. 좀 가벼운 로켓이 되었다가, 바람 빠진 풍선이 되었다가, 나는 이제 제법 탱탱볼 행색을 갖춘 두리뭉실한 무언가가 되어있다. 쉴 새 없이 돌아가 안겼던 품속 중 제일 크게 손 벌려 나를 맞이해준 것이 바로 반달집이었다. 그리고 반달집에서의 크리스마스를 완벽하게 보내기 위해 나는 또 속절없이 하강 중이었다. 행복으로의 다이빙이었다.


“우리 내년에도, 아니 매년 크리스마스엔 하얀 생크림 케이크를 먹자.”

말속에 넌지시 미래의 기약을 넣어 설쌤에게 건넸다. “그래, 좋아.” 빠르고 간단한 대답에 감동이 배가 됐다. 앞으로 평생 함께하자며 노골적으로 약속한 적도 없으면서 우린 은근슬쩍 새하얀 케이크 앞에서 신성한 약속을 맺어버렸다. ‘우리의 앞날엔 늘 우리가 함께할 거야.’ 그리고 그 순간 나는 조금 더 둥글어지고 탄력 있어졌다. 가족이란 뭘까. 중력보다 강한 이 소속감은 어디서 오는 걸까. 모르겠지만 난 이곳으로 정했다. 어디로 향하든 이곳으로 돌아오기로 정했다. 매년 기념하는 우리만의 약속이 더 많아지기를. 서로가 서로를 더 강하게 구속할 수 있기를. 그 반복되는 약속의 리듬에 맞춰 온 우주가 아름다운 노래를 불러줄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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