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마자버 Oct 18. 2021

사랑하는 우리가 함께 자지 못 하는 사정

갈월동 반달집 비혼 동거 기록

식탐 많고 굼뜬 내 몸뚱어리건만 타고난 복 하나가 있으니, 그건 바로 깸력이다. 깸력이란 아무리 늦게 자도 벌떡, 알람을 맞추지 않고 자도 벌떡, 아침 일찍 벌떡벌떡 잘 깨는 능력을 말한다. (내가 지어낸 말 맞습니다) 별다른 저항 없이 시간이 됐다 싶으면 스무스하게 눈이 떠지는 깸력 덕분에 난 평생을 아침형 인간으로 살아왔다. 아침마다 잠과의 전쟁을 치르며 괴로움 속에 겨우 이불을 떨치고 일어나는 사람들이 많다는 걸 잘 알기에 (아마 대부분의 직장인이 겪는 스트레스 아닐까?) 나 자신도 깸력을 하늘이 내려주신 귀한 특혜라 여기며 산다. 단지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리듬을 태생적으로 타고난 것뿐인데, 그런 아침형 인간을 성실하고 부지런하며 일탈 않는 좋은 인간이라 치부해주는 세상의 호의가 고마울 따름이다. (잘 계산해보면 아침형 인간들의 절대적인 수면 시간이 그렇게 적은 것도 아닌데 말이야, 쩝)


아침이 주는 에너지는 특별하다. 신선하게 반짝이는 아침 볕을 보고 있으면 늘 똑같이 반복되는 것 같은 하루하루도 매일 새롭게 태어난다는 걸 실감하게 된다. 아무도 손대지 않은 새하얀 캔버스를 독차지한 화가처럼 우쭐한 마음도 든다. 어떤 그림으로 채워줄까? 입맛을 다지면서. 세상이 셔터를 올리는 시간과 내 몸이 깨어나는 시간이 조화를 이룰 때, 온 우주가 내 세포 하나하나를 응원해주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지기는 또 얼마나 쉬운지. 이 시간에 마시는 커피 한 모금의 맛과 이 시간에 글 한 구절이 주는 울림의 깊이는 하루 중 그 어느 때보다 귀하고 특별하다. 간단히 운동하거나 글을 쓰는 등 생산적인 일을 하며 시간을 보내기도 하지만, 나는 주로 가만히 아침을 음미하는 편이다. 샤워기의 물세례를 받으며 노래를 부르듯이 아침 볕 샤워를 받으며 온몸의 세포들이 둥둥 리듬을 타며 하루를 향해 노 저어 가는 힘찬 동세를 그저 느끼고만 있는다. 그렇게 에너지를 잔뜩 받고 나서야 집을 나선다.


어느 겨울 아침, 창가에서 일기 쓰는 중


이다지도 아끼는 아침 시간인지라 나는 깸력에 대한 강한 애착이 있다. 설쌤과 동거를 시작하면서 그 부분이 제일 큰 걱정이었다. 극단적인 올빼미형 인간인 설쌤이 나의 깸력에 방해가 되면 어떡하지? 하는 걱정 때문에. -예술을 하는 대부분의 사람은 왜 올빼미형일까? 번뜩이는 영감이란 건 고요한 밤이 되어야만 찾아오는 것일까? - 서로 한창 바쁠 때는 함께 깨어있는 시간이 2~3시간밖에 겹치지 않았던 적도 있다. “이제 깼어? 난 곧 잘 거야.”라는 메시지를 주고받길 다반사. 이런 설쌤과 한 공간에서 생활하다 보면 나의 신체 리듬이 점점 망가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지레 겁부터 났다. 아무리 사랑하는 사이어도 함께 살게 되면 침실을 따로 쓰거나 침대를 각자 쓰겠다고 호언장담해온 나인데, 현실적인 여건이 그럴 수 없는 상황이었다. 어쨌든 한 침대에서 자게 되면 두 사람의 상반된 리듬이 한 곳에서 뒤섞일 텐데, 과연 어느 쪽이 알력 싸움에서 이기게 될 것인가?


같이 생활하기 시작한 처음 몇 주 동안은 놀러 온 사람들처럼 신나게 보내느라 문제랄 게 없었다. 예쁘게 꾸며진 집도 있겠다 근처 마트에서 장을 봐와서 맛난 걸 해 먹고 술도 곁들이다 자연스럽게 잠드는 소꿉놀이 같은 일상이 이어졌다. 설쌤은 아침마다 회사에 가져갈 커피를 끓여주겠다는 (다소 무리한) 약속까지 했다. 실제로 일주일 정도는 설쌤이 끓여준 커피를 보온병에 넣어와 회사에서 호로록 마시며 훈훈함에 겨운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그런데 점점 설쌤이 커피를 끓여주는 시간대가 늦어지기 시작하더니 결국 출근 시간이 임박했는데도 설쌤이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아 빈손으로 회사에 가기 일쑤였다. 잘 시간이 돼서 함께 침대에 누워도 설쌤은 뻣뻣한 자세로 말똥말똥 깨어있는 게 느껴졌다. 그러다 얼마 못 버티고 침대에서 일어나 거실로 나가는 인기척이 느껴졌다. 아침에 일어나보면 설쌤은 내 옆에 곤히 잠들어있었고 난 그런 설쌤이 깰세라 조용히 회사 갈 준비를 했다.


처음 며칠간만 이어졌던 아침 배웅


잠자는 도중 설쌤의 인기척에 잠을 방해받는 것은 차치하고, 내게 있어 가장 안타까운 건 설쌤이 반달집의 겨울 아침을 누리지 못한다는 점이었다. 반달집은 동향으로 크게 창이 나 있는 집이라 해 뜨는 시간이 말도 못 하게 아름답다. 머리만 빼꼼 내민 태양이 세상을 서서히 밝히는가 하고 잠깐 넋을 놓고 있으면 어느샌가 번쩍하고 온 세상이 새빨갛게 이글거리고 있다. 너무 강렬해서 눈을 감아도 머리통 안에 붉은 조명이 켜져있는 것 같은 침투력 강한 빨강이다. 그러다 서서히 그 밝음이 곳곳으로 퍼져나가며 코끝 시린 겨울의 푸르스름한 아침을 완성해나간다. 볕 세례를 직접 쬘 수 있는 자리에 앉아 가만히 그 과정을 지켜보고 있으면 따뜻한 기운이 몸에 한가득 충전되는 걸 느낄 수 있다. 이 에너지로 밥도 맛있게 지어 먹고 사람들과 반갑게 인사도 하고 글도 쓰고 여기저기 쏘다닐 수 있겠구나 한다. 이 귀한 아침 시간이야말로 반달집이 우리에게 주는 선물인데, 설쌤이 이걸 누리지 못한다니 나는 너무 안타까워서 가만히 두고만 볼 수 없었다.


타임랩스로 찍어둔 겨울 아침 일출


일찍 일어나기 위해서는 우선 일찍 자는 것이 순서. 남자친구가 잠들기엔 다소 이른 시간이었지만 나는 따뜻한 전기장판을 미끼 삼아 남자친구에게 한 번만 누워보라고 권했다. 이른 겨울 냉기에 발이 시렸는지 설쌤은 다가와 몸을 녹였지만, 끝끝내 잠들지는 않았다. 그래서 한번은 강제로 이른 시간에 깨워보기도 했다. 시끄러운 드라이기를 침실로 가져와 잠든 설쌤 바로 앞에서 머리를 말렸더니 끔뻑끔뻑 거리며 설쌤이 눈을 떴다. 무거운 몸을 이끌고 부엌으로 가 내게 커피를 내려주기까지 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회사에 출근한 뒤 점심시간 즈음 연락을 해보면 설쌤은 묵묵부답이었다. 해가 중천에 뜬 시간에 문득 개운하게 잘 잤다는 메시지 하나가 도착할 뿐. 설쌤을 아침형 인간까지는 아니어도 브런치 형 인간 정도로는 만들고 싶었는데, 대실패였다.


요즘은 밤늦게 "다녀오겠습니다"를 외치고 나가는 편


자버야 이 사진 좀 봐. 정말 깨우고 싶었는데 참았어.

만약 그 사진을 보지 못했더라면 나는 아직도 설쌤을 아침형으로 만드는 데 집착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설쌤이 내게 보여준 사진은 동트기 전 고요한 겨울 새벽하늘 사진이었다. 남색 하늘에 핑크빛 구름이 뽀글뽀글 올라와 있는 명랑한 새벽녘이었다. 우와- 이런 풍경이 펼쳐진다고? 내가 잠든 시간 동안 설쌤은 혼자서 이 새벽을 만끽하고 있었다. 나의 아침만이 반달집이 준 선물인 줄 알았는데 완전한 착각이었다. 설쌤 말에 의하면 모두가 잠든 늦은 밤이 되면 그 고요함을 독차지한 것 같은 벅찬 감정이 있다고 한다. 그제야 무언가 해보겠다는 의욕이 활개 치며 뻗쳐 나온다는 것이다. 그 시간만큼 집중도 잘 되고 진도도 죽죽 잘 나가는 시간이 없다고 한다. (내가 가진 게 깸력이면 설쌤이 밤을 새우는 능력은 샘력이라고 해야 하나?) 가만히 생각해보면 나는 그런 경험을 해본 적은 없었다. 반달집의 명랑한 새벽하늘을 본 적 없었던 것처럼.


설쌤이 보여준 반달집 새벽 하늘


우와 동거요? 그럼 같이 자기도 해요?

가끔 수줍어하면서 저런 질문을 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다. 요즘 들어 나는 저 질문이 곤란하다. 침대는 하나지만 설쌤과 거의 따로 자다시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서로의 수면시간 간극이 더욱 벌어져서 내가 일어날 때쯤 설쌤이 비틀비틀 걸어와 침대에 풀썩 쓰러진다. 두 사람이 바통 터치하듯 침대를 써서 불쌍한 반달집 침대는 거의 온종일 쉴 틈 없이 사람을 꿈나라로 실어 보낸다. 그래서 나는 “한 침대는 쓰는데 잠은 따로 자요.” 하며 멋쩍게 대답한다. 자는 도중에 서로서로 잠을 방해할 일이 없어 좋달까? 여전히 같이 잠들고 같이 일어나 같은 풍경을 보며 감탄하지 못하는 건 아쉽지만, 그 어떤 집주인들보다 반달집의 매력을 풍족하게 느끼고 사는 것 같아 뿌듯하기도 하다. 이젠 나의 아침이 찬란한 만큼 당신의 밤이 얼마나 몰입감 넘치는지 이해하니까, 괜찮다. 한 공간에 살면서 각자 가져가는 매력이 이렇게 다르다는 건 참 재밌는 일이다. 설쌤이 반달집에 대한 글을 쓰면 완전히 다른 느낌의 글이 펼쳐질 거라 확신한다. 혹시 이미 어디선가 글을 쓰고 있는 건 아니겠지?





이전 13화 부지런한 널 사랑하는거지 어떻게 나까지 부지런해지겠어?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