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마자버 Jun 25. 2022

삐걱 서른 시작

갈월동 반달집 비혼 동거 기록

잔뜩 힘빨 떨어진 크리스마스 장식들 사이로 새해가 쭈뼛거리며 찾아왔다. 2021년, 그렇게 서른이 됐다. 스물아홉이었던 작년 한 해 이 순간만을 얼마나 기다려왔는지. 더 정확히 말하자면, 당황하지 않고 의연하게 이 순간을 맞이할 수 있기를 얼마나 바라고 준비해왔는지 모른다. 집도 바꾸고 같이 살던 사람도 바꾸고 심지어 직장까지 갈아치웠으니, 이렇게까지 과하게 서른을 의식하는 사람이 또 있을까. 아마 스리슬쩍 문간 넘어오려던 새해도 나의 준비 태세에 당황했을 거다. “뭐야 요샌 서른 정도는 쿨하게 넘어가는 게 대세 아니었어?” 하면서 나의 촌티에 혀를 끌끌 찼을지도. 그렇다고 굳이 서른을 만 나이로 계산해서 1년 정도 유예기간을 갖고 싶지도 않았다. 한국 제도 안에서 어른으로 산 지 10년, 환갑의 절반, 강산이 세 번은 바뀌었을 시간인걸.


만약 나이 요정 같은 게 찾아와서 나의 서른을 기념해준다면, 나는 어떤 말을 듣고 싶었을까? 축하한다? 수고했다? 모호하지만 토닥토닥 같은 걸 받고 싶지 않았을까. 괜찮다고, 뭐가 됐건 늦지 않았다고. 안심하라고. 주최한 사람도 없고 나밖에 참여한 사람도 없는, 무엇보다 목적조차 불분명한 이 환상의 레이스에서 훌륭하게 한 코스를 완주했다고 누가 속 시원히 말해주면 좋으련만. 참 오랫동안 서른 살이라는 옷에 딱 맞는 몸을 가꾸려고 노력했는데도 묘한 위화감에 나는 그 옷을 벗어 던지고 싶었다. “이걸 입고 밖에 나가면 사람들이 손가락질하고 비웃을 거야.” 부끄러워서 울고 싶었다. 서른을 훌쩍 넘긴 회사 선배들이 “나는 비로소 서른이 되고 나서야 편안해졌어.”, “경제적으로나 커리어로나, 서른이 안정되고 좋지.” 하던 말들이 문득 떠오르며 나를 더 괴롭혔다. 젊다면 젊고 안정적이라면 안정적인 30이라는 숫자의 적당함이 참 꼴 보기 싫었다.


 걸음이 빠른 편이 아니다. 천성이 느린 것은 둘째 치고 어딘가 서둘러 가는 법이 없기 때문이다. 애초에 서두를 일이 생기지 않게 대비하는 일에 도가 텄다. 조급할 일을 만들지 않기 위해  조급한 상태랄까? 그래서 넘어지고 접질리고 삐고 다치는 일과는 거리가  삶이었다. 그러니까 서른 전의 삶이 그랬다는 말이다. 서른이 되고 열흘이  지나지 않은 겨울날, 1 계획을 세우느라  시간 넘게 똬리를 틀고 앉아있다가 짓눌린  발은 피가 통하지 않아 감각이 무뎌진  이미 오랜지,   밥을 가져가라는 설쌤의 말에 나는 헐레벌떡 자리에서 일어났고, 돌처럼 무뎌진 오른발그대로 바닥에 내리꽂혔고, 발등이 무릇 펼쳐져야  반대 방향으로 접혔고, 무언가 빠작 하고 아작나는 소리와 함께 나는 바닥에 뒹굴었다. 고통에 우짖는  비명에 놀란 설쌤이 다가와 나를 살폈다.  발을  설쌤은 유감스러운 표정으로 내게 말했다.


“이건 백 퍼센트 깁스 감이야…”


내 발등을 으스러뜨린 게 다른 것도 아닌 내 체중이었다는 사실에 마치 모든 잘못은 결국 다 네 탓 아니겠냐는 조롱이 담긴 것 같아 더욱 비참했다. 나는 난생처음 깁스를 하고 목발 짚는 신세가 돼버렸다. 유난히 눈이 많이 온 겨울이라 돌아다니기가 시원찮다는 게 문제였다. 그렇게 광고 회사가 가장 바쁜 연초, 새파란 신입사원이었던 나만 팀에서 유일하게 재택근무를 하게 됐다. 모니터 뒤로 선배들이 바쁘게 고군분투하는 게 다 보이는데 집에 가만히 처박혀 어버버하고 있자니 죽을 맛이 따로 없었다. 거실 창가 자리에 다친 다리를 뉘어 놓고 근무하는데 창밖으로 눈보라 치는 게 보였다. 서른 시작을 기념으로 액땜 한번 한 셈 치자. 위로하려고 해봐도 마음에는 눈처럼 녹아 없어지지도 않을 텁텁한 우울 조각들이 차곡차곡 쌓이기만 했다.


“짜식아, 서른 그게 뭐라고 이렇게 서두르냐?” 하고 누가 일부러 발이라도 건 것 같았다. 어처구니없이 모든 게 정지됐다. 이제 막 스퍼트를 내서 달려야 할 시기에 정말 세상이 어떤 시그널을 보내려고 한 거라면, 내가 뭘 놓쳤던 걸까? 올해 서른이 된 사람 중에 바닥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은 나일거라고 생각하자 서러워졌다. 평소에 하지 않던 짓을 하고 싶어졌다. 아빠에게 연락해 어리광을 부리고 싶었다. 발 좀 보라고 막내딸이 다쳤다고 밖엔 눈이 오는데 나는 헤쳐나갈 자신이 없다고 징징거리며 마구마구 무너져내리고 싶었다. 그러면 아빠는 그 무던한 말투로 괜찮다 하겠지. 아빠와의 채팅 창을 켰다. 코로나가 심하니까 내년에 보자는 작년 연말에 나눈 대화가 마지막이었다. ‘연초부터 집에서 다리를 다쳤다고 하면…’ 왠지 아빠가 반달집부터 꼬리를 물고 나가 설쌤과의 동거까지 안 좋게 보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훅 들었다. 나는 채팅창을 껐다. 다리가 다 낫고 이 눈도 다 그치면, 그때 이런 일이 있었다고 웃어넘기면서 이야기하기로 했다. 그게 가능한 일인 줄 알았다. 멍청하게도. 세상 멍청하게도.



그 대신 매년 연락하는 사주 아저씨에게 연락했다. “혹시 전화 상담도 되나요?” 누구에게라도 다리를 다친 이유를 듣지 않으면 도저히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아저씨는 직업운이 어쩌고 연애운이 어쩌고 보통 사람들이 궁금해할 이야기를 잔뜩 늘어놓았다. 건성으로 듣던 나는 질문할 타이밍을 놓치지 않고 “제가 생전 깁스 한 번 안 했는데 다리를 접질렸어요. 이건 무슨 의미일까요?”하고 물었다. 올해부터 일이 술술 잘 풀릴 거라 말했던 아저씨는 “아아~ 그건~” 하더니 입술에 침 한번 바를 새도 없이 능청스럽게 설명을 이어갔다. 한 해의 시작은 음력으로 따져야 하는데, 그런 걸로 치면 아직 새해가 시작되지 않았다며 작년의 그렇고 그런 좋지 못한 기운이 남아있어서 다리를 접지른 것 아니겠냐고 하셨다. 작년이 직장을 바꾸고 타이틀을 버리는 해라고 얼추 나의 행보를 맞추셨던 터라 나는 “네에, 과연 그렇군요.” 하면서 한시름 놓은 소리를 하곤 상담을 마무리했다. 눈물 나게 듣고 싶던 이야기를 들었다. 그걸로 됐다. ‘올해 진짜 시작은 설이 지나고 2월부터다.’ 그때부터 힘차게 다시 시작하자 마음먹었다. ‘두고봐, 한번 부러졌다 다시 붙은 다리가 얼마나 힘이 좋은지 증명해 보이겠어.’


사주로 마음의 먼지 한 겹 털어냈다고 나는 아주 청결한 사람이 된 것처럼 씩씩하게 힘이 났다. 억지 씩씩함도 에너지라면 에너지니까. 1월 중순을 지나가던 참이었다. 그날도 팀에서 나 홀로 재택근무 하는 날이었다. 재택 중이어서 괜히 더 해이해 보일까 봐 더 집중해서 화상 회의에 참여하고 비어있는 머리를 탈탈 털어 이런저런 의견까지 내가며 용케 하루를 보냈다. ‘어설프지만 잘하고 있어.’ 퇴근 시간이 다 되어갈 때쯤 저녁을 먹으러 설쌤이 귀가했고 나는 회의록을 복기하고 있었다. 뜬금없이 전화가 울렸다. 언니였다. 앞뒤 없이 이렇게 생뚱맞은 연락이라니, 이상했다. 전화를 받자 울음을 참느라 거친 숨소리와 함께 뭉개진 발음으로 언니가 하는 말이 들려왔다.


“자버야, 아빠가 돌아가셨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