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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자버 Sep 12. 2022

검색해봐도 되는 걸 굳이 당신에게 질문했던 이유

갈월동 반달집 비혼 동거 기록

스파이크 존즈 감독의 <어댑테이션>이라는 영화를 좋아한다. 각본가 찰리 카우프만과 스파이크 존즈의 조합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특히 더 재밌게 볼 법한 작품이다. 하지만 대중적인 코드가 부족한 주제라 그런가, 영화 좀 봤다는 친구 몇몇에게 물어봐도 <어댑테이션>을 봤다는 사람이 전무했다. 그게 못내 아쉬워 SNS에 마음에 드는 영화 속 대사 몇 줄을 네 컷 만화 형식으로 만들어 업로드했다. 이 영화를 본 사람이든, 앞으로 보게 될 사람이든 누구 하나라도 걸려라! 하는 심정으로. 안타깝게도 그마저 효과는 미미했다. 좋아요 몇 개만 받은 채 게시글은 그렇게 묻혀가고 있었다.


SNS에 업로드했던 <어댑테이션> 네컷만화


그러다 문득 댓글 알람이 뜬 건 게시글을 올린 지 며칠이 지난 뒤였다. 나는 알람을 보고 놀라서 후다닥 SNS에 접속했다. 드디어 내 글에 반응하는 사람이 나타났다는 사실보다 더 놀라운 건 댓글을 단 사람의 정체였다. 두 달 전 종강한 주말반 미술 수업 선생님 ‘설쌤’이 “스파이크 존즈 영화 재밌죠. 존 말코비치 되기도 재밌구요.”라는 댓글을 단 것 아니겠는가. 수업이 끝나도 계속 그림을 그리라며 학생들의 의지를 북돋는 차원에서 그림을 업로드한 게시글에 종종 '좋아요'를 눌러주던 설쌤이긴 했지만 이렇게 적극적으로 댓글까지 단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냥 댓글이었지만 유난스레 내 취향을 눌러 담은 게시물에 달린 댓글이어서 그런가, 마냥 흘려보낼 일처럼 느껴지진 않았다. 취향과 취향이 포개진 이 귀한 순간을 놓치지 말라는 지령이 머리에 떨어졌다. ‘이 사람과 만나서 대화를 해봐야겠어.’


그나저나 이미 수업이 끝난 지는 한참이 지났고 별다른 접점도 없는 설쌤과 어디서 어떻게 무엇을 계기로 마주친담? 나는 차근차근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접점이 없긴 왜 없어. 나는 그림을 열심히 그리는 학생이고 그분은 그림을 열심히 가르치는 선생님인데! 수업이 끝났다고 해서 그림과 관련된 질문조차 하지 말란 법은 없잖아? ‘후후후. 뭐가 됐건 질문 던질 건덕지 하나만 걸려라.’ 사냥꾼 모드로 바뀐 나는 촘촘한 거미줄을 짜기 시작했다. 그리고 일단은 열심히 그림을 그렸다. 그 근래, 최고로 신명 나게 그림을 그렸다. 주로 설쌤께 추천받은 라미라는 브랜드의 만년필을 사용했다. 좋아하는 영화 속 장면을 그리기도 하고 집 앞 카페 풍경을 그리기도 하다 보니 잉크는 금방 닳았다. 잉크 카트리지를 갈아보겠다고 용을 써봤는데 절차를 제대로 이행하지 못했는지 잉크가 영 시원찮게 나오다 말다 했다. 곧장 포털 검색 창을 켜고 ‘만년필 잉크 카트리지 교체하는 방법’을 타이핑하다 번뜩 떠오른 생각에 모든 동작을 일시정지했다. 드디어 거미줄에 건덕지가 걸린 것이다! 포털 대신 메신저를 켜고, 질문 대신 설쌤의 프로필을 검색했다. 그리고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한 자 한 자 적어나가기 시작했다.


“선생님 안녕하세요. 간만에 연락드리네요. 저는 주말반 수업을 듣던 마자버라고 합니다. 다름이 아니라 만년필 잉크 카트리지를 갈려고 하는데 방법을 잘 몰라서…”


그 메시지로 말미암아 설쌤과 대화의 물꼬가 트였다. 바라던 바였다. 그리고 나는 앞으로도 계속 모르는 것들이 많아질 참이었다. 다행히 설쌤도 질문에 답해줄 의지가 충만해 보였다. 우리는 조심스럽게 예의를 지키는 수준 안에서, 하지만 대화를 영영 꺼트리지는 않을 정도의 온도로 끊임없이 말을 주고받았다. 그렇게 며칠, 대화 게이지가 어느 정도 차오르자 우린 당연한 수순처럼 연남동 한 카페에서 만나게 됐다. 그 만남이 있기까지도 응당 만나야만 하는 일거리들을 열심히 빌드업 했다. 물론 굳이 만나지 않고도 일을 처리할 수 있는 아흔아홉 가지 다른 방법이 있었지만 우린 굳이 실물 대 실물로 만나는 방법 한 가지만을 고수했다. 수업이 끝난 지 두 달만에 설쌤을 다시 마주하게 됐다. 친절하고 예의 바른 설쌤이어서 그런가, 하나도 어색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설쌤을 더욱더 좋아하게 될 것 같다고 생각했다. 물론, 이미 한참 전에 설쌤을 좋아하고 있었고.


일요일 저녁엔 무조건 연남동에 가있었다. 연남동에서 진행되는 설쌤의 주말반 수업이 일요일 저녁 9시에 끝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수업이 끝날 때쯤 마침 선약이 연남동이었던 척하며 설쌤에게 “어머, 저 마침 연남동인데!” 하며 부러 연락을 날렸다. 그러면 설쌤은 “괜찮으면 맥주 한 잔 더 하실래요?” 하며 내가 원하던 답을 척 내놓았다. 내가 얕은수로 우연을 가장한 마주침을 만들어내고 있다는 걸 설쌤이 모르는 척해준 건지 정말 몰랐던 건지 모르겠지만 우린 거의 매주 일요일 밤, 같이 시간을 보냈다. 마지막 코스는 그 당시 내가 살고있던 망원동까지 함께 걷는 것이었다. 연남에서 망원까지, 25분 남짓한 시간 동안 설쌤은 쉴 새 없이 재밌는 이야기들로 나를 웃게 했다. 일본에서 무지막지하게 비싼 오마카세를 먹어봤다는 등의 하등 쓸모없는 내용이었지만 그걸 듣는 당시의 난 더 이상 못 참겠다는 듯 멈춰서 목을 뒤로 젖혀가며 껄껄껄 웃었다. 설쌤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죄다 재밌었다. 좋아하는 사람이 무려 집 앞까지 데려다주겠다는데 가만히 있어도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기가 더 어려운 일 아니었을까? 신호등 속 사람 아이콘 자세가 너무 우습지 않냐며 웃어댔을 거다.


그날도 어김없이 설쌤과 함께 가볍게 술 한잔을 하고 집으로 돌아온 참이었다. 대문을 열고 집으로 들어가려고 가방을 뒤지는데 아무래도 열쇠가 만져지지 않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분명히 아침에 열쇠를 챙긴 기억이 나는데! 아예 무릎을 쪼그리고 앉아 본격적으로 물건을 하나하나 꺼내 가며 가방 안을 살펴봐도 열쇠가 없었다. 하필 언니도 약속 때문에 밤늦게나 들어오는 날이었다. 망연자실해서는 이 황당한 소식을 설쌤에게도 공유했다. (썸남에게는 좋은 일 나쁜 일 미주알고주알 주고받고 봐야 하는 법) 그런데 설쌤이 갈 곳이 없으면 본인의 작업실에서 시간을 보내다 가도 된다는 것 아니겠는가. 두근두근! 이게 무슨 일이람? 무슨 일이긴, 은근히 기대했던 대답이 옆구리만 콕 찔렀을 뿐인데 술술 나와버린 일이지. 설쌤이 그냥 한번 던져본 말인데 내가 너무 덥석 물어버린 건 아닐까 하는 걱정을 담아 답장을 보냈다. “정말요? 너무너무 실례될 것 같아서 어떡하죠…” 물론, 이미 작업실이 있다는 후암동으로 향하는 지하철에 몸을 실은 뒤였다. 진담이건 아니건 뭔 상관이랴. 내 마음이 그리로 향하고 있다는 건 확실한걸.


후암동에 작업실을 꾸리고 있다는 얘기는 들었는데 그곳에 내가 발을 들이게 될 줄은 몰랐다. 설쌤 분위기가 그대로 묻어난 따뜻하고 아기자기한 공간이었다. 가구 공방에서 고심해서 주문 제작했다는 고동색 나무 테이블에 앉아 설쌤과 밤새도록 떠들었다. 가장 발 담그기 쉬운 영화 취향부터 조금 더 들어가 형제자매를 비롯한 가족사까지. 너무 입만 놀리진 않았다. 명색이 그림 수업 선생과 제자 사이이니 그림을 안 그릴 수는 없는 일. 끄적끄적 낙서도 하고 찰흙 덩이 같은 것을 뭉쳐서 귀여운 물체도 만들다 보니 시간이 훅 지나가 있었다. 밤을 꼴딱 새웠는데, 피곤함을 느낄 새가 없었다. 어느새 새벽 5시 반. 첫차가 움직일 시간이었다. 작업실에서 뭉개고 있을 빌미가 더이상은 없다는 뜻이었다. 나는 기다렸다는 듯 서둘러 작업실을 나섰다. 설쌤께 감사 인사를 건네고 헤어진 뒤 지하철 역쪽으로 몇 걸음 걷다가 큰길이 나오자마자 택시를 잡아탔다. 진작부터 지하철 따위를 기다린 게 아니었으니까. 하룻밤 사이 불쑥 커진 감정을 따끈따끈하게 집까지 가져가고 싶었다. 택시 아저씨, 총알 같은 속도로 저를 배달해주소서!


집 앞, 자고 있을 언니에게 연락하려고 가방 속 핸드폰을 찾아 뒤지다가 나는 소름 끼치는 걸 사실을 알게 됐다. 가방 안에 사라진 열쇠가 떡하니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다. 심지어 어디 깊숙이 처박혀 있는 것도 아니고 가방을 열자마자 눈에 쏙 들어오는 위치에 버젓이 놓여있었다. 보는 눈도 없는데 나는 황급히 가방을 닫았다. 등줄기가 오싹하니 소름이 끼쳤다. 두 가지 가설이 존재했다. 열쇠에 발이 달렸거나 이대로 집에 들어가기 싫다는 마음이 손의 감각을 마비시켰거나. 무엇이 진실인지는 정말, 도무지, 대체 알 수가 없지만 말이다. 그냥 언젠가 웃으면서 이 에피소드를 설쌤에게 말할 날이 오지 않을까 어렴풋이 바랐을 뿐. 당신에게 얼마나 가고 싶었으면 열쇠가 도망을 다 다녔겠냐며.


우린 어느새 일요일 저녁과 연남동을 벗어나 시시때때로 서울 곳곳에서 만나서 노는 사이가 되어 있었다. 내가 설쌤을 좋아하는 건 너무나 분명한 사실이었는데 설쌤이 과연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는 아직 캄캄한 미지의 영역이었다. 흡사 데이트라 함 직한 활동을 그렇게나 즐겼지만, 설쌤이 단지 친절한 사람이라 나에게 잘해주는 것일 수도 있고, 설쌤은 딱 이 정도 깊이의 만남만 추구하는 초식남일 수도 있었다. 게다가 설쌤이 동성애자일 수도 있다는 가능성 또한 배제할 수 없었다. 설쌤이 날 이성으로서 좋아한다는 확신만 선다면 관계를 발전시키기 위한 그 어떤 행동도 할 준비가 되어있는 나였거늘…! 하지만 또 그런 확신 없이는 먼저 과감하게 내 마음을 밝힐 용기가 없는 소심한 나이기도 했다. 나는 그저 설쌤이 낚아 올리기 좋은 낚싯줄을 튼튼히 엮어서 나와 설쌤 저변 곳곳에 설치해 놓는 수밖에 없었다. 낚싯줄 끝 갈고리를 입에 문 채 바라고 또 바랐다. ‘설쌤, 얼른 나를 낚아주세요!’


안 되겠다 싶었다. 이렇게 계속 좋아하게 된다면 나라도 고백해야겠다 싶었다. 하지만 불쑥 마음을 밝히겠다는 건 아니었다. 난 천성이 뭐든 계획하고 보는 사람인지라 설쌤에게 고백할 수 있는 최적의 타이밍을 계산해보았다. 설쌤은 앞으로 석 달 뒤에 있을 큰 규모의 프로젝트를 준비 중이라고 하니, 그 프로젝트가 끝나자마자 고백하면 딱 좋을 것 같았다. 그 석 달 동안은 연애 대상으로 설쌤이 내게 적합할지 찬찬히 알아보기로 마음먹었다. 물론 설쌤도 나를 알아볼 시간이 필요할 터였으니 말이다. 그렇게 목표를 설정하고 관계의 발전 속도를 짜고 나니 안달복달하던 마음도 한결 편안해졌다. 이제 곧 봄이니 얼마나 또 재밌게 썸을 타볼까. 설레고 설렐 날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4월을 앞둔 초봄 저녁, 언제나처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설쌤은 나를 망원 집까지 바래다주었다. 대문 앞에서 아쉬운 작별 인사를 나누고 집에 들어와 그대로 방바닥에 철퍼덕 앉았다. 좋은 기운 그대로 좀 더 머금고 있고 싶었다. 그렇게 5분쯤 지났을까, 갑자기 설쌤에게서 전화가 왔다. 돌아가는 길에 문제라도 생겼나? 살짝 놀란 마음으로 전화를 받자 설쌤이 “자버씨, 잠깐 밖으로 나올 수 있어요?” 하는 것 아니겠는가. 나는 당연히 그러겠다고 했다. 에이, 설마 하면서도 세심하게 거울을 보며 외모 단장을 했다. 대문 밖 몇 걸음 앞에 설쌤이 서 있었고 조금 쭈뼛대고 있었다. ‘와, 그 일이 정말 벌어지는 걸까?’ 어느 정도 알 것 같지만 정말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다가간 나에게 설쌤은 담백하게 “우리 이렇게 계속 시간을 보낼 거면 그냥 한번 만나보는 게 어때요?” 하고 물어왔다. 고백을 듣자마자 떠오른 날 것의 생각은 ‘어, 내 계획보다 너무 빠른데? 이래도 되는 걸까?’ 였다. 그리고 입 밖으로는 이미 “네, 좋아요!”라고 대답하고 있었다.


그렇게 나와 설쌤은 연애를 시작하게 됐다. 알아본 다음 사귀려고 했던 나와 사귄 다음 알아가면 된다고 생각한 설쌤. 우린 시작부터 이렇게나 생각이 달랐다. 하지만 감히 계획형 인간들을 대표해서 이야기하자면, 계획형들이 가장 큰 희열을 느끼는 때는 바로 열심히 만든 계획을 죄 내다 버려도 좋을 만큼 신나는 이벤트가 벌어지는 순간이다. 그리고 설쌤을 만나 그 이벤트가 내게 벌어졌다. 그날 이후 설쌤은 내게 있어서 가장 활짝 열린 문이다. 꽉 닫힌 내가 아무리 계획을 기막히게 잘 짜놓아도 그걸 무마하는 생각지도 못한 이벤트를 갖고 오곤 하니까. 스물여섯의 나는 이 사람과 함께라면 또 어떤 과감한 일들을 벌일 수 있을지 두려움 반 설렘 반의 상상을 펼치곤 했다. 잘 모르겠지만 좋은 예감이 들었다. 하지만 정말 구체적으로 우리 앞에 어떤 일들이 펼쳐질지, 우리의 관계는 어떤 모양이 되어갈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참으로 깨끗하고 백지같던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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