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마자버 Oct 09. 2022

니 음식 내 음식

내 숟가락질에 속도를 붙이는 풍경이 하나 있다. 그건 바로 밥상 맞은편에서 열심히 숟가락질하는 언니다. 각자 그릇에 담겨 나오는 음식이 아니라 함께 펼쳐놓고 나눠 먹는 탕수육, 피자, 치킨 등을 먹을 때 상황은 더 심각해진다. 눈으로는 남은 음식을 스캔하고 손으로는 열심히 음식을 나르며 입은 쉴 새 없이 저작 활동을 진행한다. 그러다 먼저 번뜩 정신이 든 한 사람이 말한다. “우리 다 컸는데 이러지 말자.” 그럼 나머지 한 사람도 머쓱해진 나머지 준비 태세의 손을 내려놓고 그제야 입안의 음식을 꼭꼭 씹어먹기 시작한다. “그래, 둘이서 다라이 하나에 비빔밥 나눠먹던 시절도 아니고.” 한술 더 떠 서로의 그릇에 음식을 덜어주는 것으로 자매의 식탐 러쉬는 잠잠해진다. 어릴 땐 언니 입에 들어가는 그 한 숟갈이 내가 차마 먹지 못한 한 숟갈 같아 얼마나 아깝고 탐이 나던지. 형제자매와 부대껴 살아본 사람은 공감할 것이다. 내 손에 먹을 게 들려있는 와중에도 상대방 손에 들린 먹을 것이 더 탐나는 그 심보를. 배부른 게 불쾌하게 느껴지는 나이가 된 지금에 와서도 밥상머리에 마주 앉은 언니의 모습은 내 식욕 촉진제다. 어릴 때 몸에 깊게 배긴 생존 습관은 배부르고 등 따신 어른이 되어서도 좀처럼 옅어지지 않는 법이다.



기본적으로 우리 자매는 타고난 식탐이 어마어마하다. 맛있는 것을 좋아하고 미식을 즐기는 걸 삶의 행복 중에 아주아주 큰 요소라고 생각하며 산다. 그래서 언니와 함께 살 때 이 규칙 하나만큼은 절대적으로 지켰다. ‘공용 냉장고에 들어있는 음식일지라도 본인이 구매한 것이 아니면 절대 먹어선 안 된다.’ 우린 피땀 흘려 번 돈으로 구매한 각자의 소중한 식료품을 존중했다. 설령 사과 한 조각이라도 상대방 허락 없이 손댈 수 없었다. 실수로라도 상대방이 개시 안 한 음식의 포장을 먼저 뜯어버리는 등의 돌이킬 수 없는 무례를 범하면 그날은 바로 전쟁이었다. 누군가는 말한다. 한 지붕 아래 함께 사는 가족끼리 겨우 먹을 거 가지고 너무한 거 아니냐고. 하지만 우리 자매는 입을 모아 말한다. 우애는 우애고 식량은 식량이다. 언젠가 먹으려고 두고두고 소중하게 아껴둔 음식을 남이 먼저 제 입으로 채어가는 극악무도한 일은 일어나선 안 된다. 모든 음식엔 계획이 있는 법이다.


언니와 함께 살 때 한번은 선물 받은 마카롱을 냉장고에 넣어둔 적 있다. 언니는 단 걸 별로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그날 그 마카롱만큼은 맛있어 보였나 보다. 남의 거라서 그런 걸까? 여하튼 언니는 밖에 있던 내게 전화까지 걸어서는 마카롱을 딱 한 입만 먹어봐도 되겠냐고 물어보는 것 아니겠는가. 그 귀한 마카롱을 달라고? 언니에게 주기 아까웠지만, 선물 받은 마카롱의 예쁜 자태를 잔뜩 뻐기고 싶은 마음도 있어서 딱 한 입 정도는 허락할 수 있었다. 도도하게 대답했다. “딱 한입만이야.” 그리고 그날 귀가하자마자 헐레벌떡 냉장고 문을 열었다. 날 기다리는 디저트가 있는데 다른 곳에 한눈팔 정신 따위 있을 리가 없지! 마카롱 상자를 집어 들고 포장을 열자마자 나는 마카롱의 자태를 보고 털썩 주저앉아버렸다. 보름달처럼 동그랗고 가지런하게 들어있어야 할 마카롱이 죄다 한 입씩 뜯겨나가 비참한 초승달 모양을 하고 있었다. “야이씨!” 한 입만 먹는다는 게 한입씩 먹는다는 거였냐고. 평소 같으면 자지러지게 화를 냈을 나지만, 하나같이 친구에게 머리를 떼어주고 힘없이 웃는 호빵맨 같은 마카롱들이 너무 웃겨서 언니를 딱 한 번만 봐주기로 했다. 언니가 배시시 웃으면서 방문을 열고 나오면서 말했다. “그거 얼그레이가 제일 맛있더라.“



그런 반면 설쌤은 식욕에 있어서 나와는 아주 다른 성장 역사를 갖고 있다. 역사랄 것도 없는 게, 설쌤의 어린 시절 사진 한 장이면 요약 끝이다. 너무 빼빼 말라서 나뭇가지 같은 팔다리에 홀쭉한 볼 위로 광대뼈가 툭 튀어나와 안쓰러움을 자아내는 그 아이에게 식욕 없이 살아온 긴 세월은 너무나 당연했기 때문이다. 밥 한 숟가락이라도 더 먹이려는 어머니와 입을 꾹 다물고 음식을 거부하는 어린 설쌤 간의 실랑이가 매일 아침 벌어졌다고 한다. 나는 없어서 못 먹는 새우나 게를 보고도 설쌤은 그닥 달려들지 않는다. 맛있는 음식 조차 잘 안 먹던 어린 시절, 굳이 껍질을 까고 살을 파내는 공까지 들여야 하는 음식은 더욱 멀리했던 버릇이 남아있어서 그렇다고 한다. 그래, 그런 사람도 있구나. 군대에 다녀온 후 어느 순간 미식에 눈을 떠 잘 먹으며 보낸 세월이 쌓인 지금은 보통 체격에 가끔 동글동글 탄탄해 보이기도 하는 설쌤. 그런 사람이 한때는 에이스 과자 한 봉지로 3일을 버티던 소식좌였다니 그저 놀랍다가도 칼로리나 단탄지 영양성분 등 다이어트와 관련된 지식이 전무한 걸 볼 때면 말라깽이였던 과거가 스르륵 스쳐 가며 고개가 끄덕여진다.


설쌤과 함께 살면서 식비를 어떻게 나눌지가 고민이었다. 우린 평소에 먹는 식단이 너무 달랐다. 나름 하루 영양섭취량과 식사 시간 따져가며 먹는 365일 아가리 다이어터인 나와 거의 면 요리를 주식으로 정해진 것 없이 당길 때마다 먹고 싶은 걸로 끼니를 때우는 설쌤 사이에 합의점을 찾기가 어려웠다. 동거하고 처음 몇 달만 신나게 복닥거리며 같이 밥을 해 먹었지, 시간이 지나면서 식사 시간도 서로 틀어지고 식재료도 겹치지 않게 되어 자연스럽게 자기가 먹는 건 자기 돈으로 사서 먹게 됐다. 평소 안 먹던 스타일이지만 설쌤이 먹는 대로 따라 먹다 보니 무지막지하게 살이 쪄서 식단을 더 철저하게 관리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기도 했다. 곧 냉동고는 다이어트 도시락으로 가득 찼고 나는 틈나는 대로 궁금했던 다이어트 간식을 구비해 냉장고에 쟁여두곤 했다. 냉장고 속 음식들은 이름표만 붙어 있지 않았을 뿐이지, 니 음식 내 음식으로 갈리기 시작했다.


어느 지친 하루. 퇴근해서 집에 오자마자 당장 당 충전이 급했다. 쟁여둔 다이어트 초코바를 드디어 꺼내먹을 타이밍이었다. 그런데 부엌 선반 위에 올려둔 초코바가 아무리 뒤져도 보이지 않는 것 아니겠는가. 호옥시나 해서 마침 집을 비운 설쌤에게 전화해서 물었다. “내 초코바 먹었어?” 설쌤은 해맑게 대답했다. “응, 있길래 먹었어!” 당황스러웠다. 뭐지 저 해맑음은? 그건 내껀데? 본인이 산 게 아니면 내 초코바라는 걸 분.명.히 알았을 텐데 왜 물어보지도 않고 먹었지? 심지어 그냥 초코바도 아니고 다.이.어.트 초코바였다. 그것이 뜻하는 바는 칼로리가 낮아 일반 초코바보다 가격도 비싸고 아무 데서나 당장 구하기도 힘든 제품이라는 거다! 눈이 돌아갔다. “살찌는 음식 먹어도 되는 사람이 왜 살 덜 찌는 음식을 함부로 먹어요!” 그런데 어라, 미안해할 줄만 알았던 설쌤이 급격히 시무룩해지며 심지어 서럽게도 느껴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자버는 왜 초코바 하나 가지고 그래요…. 미안해요. 나는 내 음식도 자버 입에 들어가는 건 하나도 아깝지 않지만…” 어라, 분명히 잘못은 설쌤이 한 것 같은데 민망한 건 내 쪽이었다. “그래도 내가 산 음식은 꼭 물어보고 먹어요! 트, 특히 저칼로리 음식은 더!”라고 소리치며 대충 분노의 종지부를 찍어버렸다. 그런데 뭐지? 이 패배감은.


모르겠다, 씻고 밥이나 먹자. 나는 설쌤 모자를 벗고 설쌤 후드티를 벗고 설쌤 바지를 벗었다. 아뿔싸! 조금 전까진 설쌤 신발을 신고 설쌤 가방을 매고 회사를 다녀왔잖아? 심지어 그렇게 설쌤 옷을 야금야금 빼앗아 입은 지가 하도 오래돼서 설쌤 허락을 받은 지가 가물가물할 정도였다. 그래도 그때마다 “응, 마음껏 입어. 그거 다 자버꺼야.” 라고 말하던 설쌤의 아까워하지도 생색내지도 않는 편안하고 당연한 얼굴만은 선명하게 기억났다. 남의 것을 협상과 갈등 없이 취해보기는 평생 처음 있는 일이었다. 속으로는 그 너그러운 호사에 감동이 번졌지만 빌려주는 설쌤의 평온한 표정이 너무나 평온했던 탓에 점점 당연한 일처럼 여기게 된 것도 사실이었다. 나는 팬티, 브라 빼고 죄다 애인 옷으로 도배한 채로 애인이 내 초코바 하나 먹었다고 바락바락 화를 낸 세상에서 제일 못난 인간이 돼버렸다. ‘내가 졌구먼.’ 마음이 가난한 쪽이 지는 건 불문율이다. 그렇게 또 가난한 마음을 확인했다. 이 굴욕감을 고대로 설쌤에게 되갚아주겠다고 굳게 마음먹었다.



때늦은 저녁, 각자의 책상에서 각자의 작업으로 바쁜 와중 설쌤이 벌떡 일어나 부엌으로 향했다. 냉장고를 벌컥 여는 소리가 들리더니 잠시 후 블루베리 한 컵을 든 설쌤이 쪼르르 내 앞으로 와 섰다. “이 블루베리 먹어도 돼요?” 내가 사둔 ‘내 블루베리’였다. 나는 설깸 쪽으로 살짝 고개를 돌리고 한 손으로 안경을 추켜올리며 말했다. “먹어요. 그거 다 설쌤꺼야.” 그리고 대수롭지 않은 듯 다시 하던 작업을 계속했다. “앗싸~ 잘 먹을게요.” 설쌤이 신나게 블루베리를 퍼먹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속으로 차오르는 뿌듯함에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이렇게 복수를 완수했다. 그거 다 설쌤꺼야. 그거 다아~ 설쌤꺼야! 이렇게까지 상쾌한 문장이었나? 그 한마디에 마음의 평수가 확확 늘어나는 걸 느꼈다. 여유 넘치는 부~자가 된 느낌이었다. 설쌤이 종종 내 음식을 먹어도 되냐고 물을 때마다 나는 먹어도 된다는 허락 대신 저 한마디를 마구마구 남용했다. “응, 먹어. 그거 다 설쌤꺼야!”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 아침 일찍 일어나 빵 두 쪽을 꺼내 구웠다. 당근 하나를 빡빡 씻어 채칼로 가늘게 썰었다. 삶은 계란에 소금과 마요네즈를 넣어 으깨고 얼려놓은 단호박은 데친 뒤 올리브 오일을 넣어 으깼다. 다 구워진 빵 위에 조리된 재료들을 얹고 마지막으로 치즈와 아몬드를 토핑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설쌤을 깨워 식탁 앞에 앉혔다. 둘 중에 더 큰 샌드위치가 설쌤꺼다. “와, 고마워요. 언제 이런 걸 다 했어.” 감탄하며 맛있게 먹는 설썜을 보기만 해도 배부르다는 건 거짓말이고 보기만 해도 내가 작은 쪽을 먹어도 성에 찰 정도로 배가 불렀다. 내 입보다 설쌤 입맛에 맞을 때 기쁨이 배가 되는 건 진짜다. 그 진짜를 느낄 때마다 쭈삣 소름이 돋는다. 언니가 목격하면 아주 가증스러워 죽을지도 모를 풍경이다. 그런데 이건 진짜로 진짜다. 주는 게 행복할 수 있구나. 설쌤 입에 들어가는 건 하나하나 다 정성스럽고 귀했으면 좋겠다. ‘어쩌면 이건 설쌤의큰 그림일지도.’ 해와 바람의 싸움에서 따뜻한 볕 쬐기 전략에 된통 당한 바람이 된 느낌이다. 이게 설쌤의 전략이었다면 아주 행복하게 내가 패배했음을 인정한다.


오늘도 글을 쓰고 있는데 설쌤이 옆에 와서 물었다. “냉장고에 있는 크림치즈 먹어도 돼?” 나는 또 너그러운 표정으로 말한다. “응, 당연하지. 그거 다 설쌤꺼야.” 설쌤은 도도도도 기쁜 마음으로 다시 부엌으로 향한다. 당연히 먹어도 되지. 그거 우리 공금으로 산 거야.


매거진의 이전글 검색해봐도 되는 걸 굳이 당신에게 질문했던 이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