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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명선 Aug 22. 2023

닭고기수프카레집에서의 점심

이 좋은 세상이라니

 삿포로식 요리를 한다는 그 식당 밖에는 늘 차례를 기다리는 손님들을 볼 수 있다. 우리 시에서 가장 번화한 구역의 귀퉁이에 있는, 주방 포함 열 평 남짓한 식당인데 생긴 지는 몇 년이 안 된다. 그러나 흔하지 않은 메뉴뉴에다 맛도 좋아서 빠르게 소문이 난 듯했다.

 평일에는 오래 기다리지 않는다니 가보자! 하고 여름 휴가중인 남편과 함께 점심을 먹으러 갔다.

 오픈 시간은 11시 반, 10분쯤 도착하니 앞에 한 사람이 기다리고 있었다. 남편과 나는 두번째 순서였는데 매장 오픈이 다가오면서 금방 뒤쪽으로 사람들이 늘어났다.

 

 문을 열자마자 1인용 테이블 포함 여덟 개의 탁자가 한 번에 다 차고도 밖에 기다리는 팀이 생겼다. 

 식당은 컨셉이 중요하다. 어떤 음식을 팔든지 맛은 기본이고 그 집만의 어떤 한끝이 있어야 장사가 된다. 식당 안에 앉아있자니 일본 현지의 작은 식당에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벽에 붙은 포스터나 손님용 메뉴판조차 일본어로 적혀 있고 한글은 작게 병기돼 있어서 남편에게 주문을 맡기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한글은 너무 작아서 노안 때문에 보이지 않았고 어차피 나는 일본어를 모른다. 


 여덟 개의 테이블 중 네 개가 혼자 밥 먹는 사람들이었다. 혼자서 밥 먹기를 싫어하거나 못하는 사람들은 점점 더 밥 먹기 어렵겠다 싶다.

 우리는 점심 한정 메뉴라는 닭고기수프카레 세트 두 개와 닭날개 튀김을 주문했다. 수프카레 세트에는 날개만두라고도 하는 일본식 군만두가 포함된다.

 닭고기수프카레는 처음이었다. 카레라는 이름에 비해 카레 맛이 강하지 않고 자작한 국물 안에 부드러운 닭다리와 튀긴 채소, 튀긴 버섯이 있는 음식이었다. 닭날개 튀김은 바삭하면서 맛의 밸런스가 잘 된 소스가 그대로 배어 있어서 시원한 맥주 생각이 절로 났다.

 

 밥을 먹고 문 밖을 나서니 다시 우리 동네로 돌아왔다. 큰 수고 없이 맛있고 새로운 음식을 먹을 수 있어서 행복하다. 멀리 가지 않아도 동남아 어딘가 같은 식당에서 태국 요리를 먹고 드라마에서 본 유럽의 시골 느낌이 풀풀 나는 식탁에서 프랑스 가정식 요리를 먹는 세상이다.



닭고기수프카레

   



 우리나라는 1988년 서울올림픽 이후인 1989년부터 전국민 해외여행 자유화가 되었다. 1993년에 첫 여권을 만들러 현 외교부의 전신인 외무부 여권과를 찾아갔던 기억이 난다. 

 지금은 여권 발급은 가까운 구청에서 하고, 재발급은 온라인으로도 하지만 그때는 아마 광화문에 있는 외무부에 가야만 여권을 만들 수 있던 것 같다. 그랬으니 내가 거기까지 두 번이나 갔던 거겠지.  


 나는 매일 저녁 6시면 온 국민이 하던 일을 멈추고 학교 운동장 혹은 동사무소 쪽을 향해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던 시절에 국민학교를 다녔다. 하루도 빠짐없이 매일 저녁 온 동네에 애국가가 울려 퍼졌으니 아마 개들조차 그 시간을 기억했을 것이다.

 중학교 때는 전교생이 20여분을 걸어 나가 대통령이 지나갈 예정인 도로에 서 있다가 달려 지나는 검은 차량들을 향해 손국기를 팔락였다. 아이들의 환호에도 창문을 내려 손을 흔들어주는 얼굴은 없었다.

 고등학교 때는 시내 도로들이 시위대로 가득 차서 버스가 못 다니니 지금 당장 야간자율학습을 멈추고 길을 돌아서 집으로 걸어가라는 교내 방송을 자주 들었다.  

 대학생 때는 시험공부를 하고 리포트를 쓰려면 학교 도서관에 가서 자료를 뒤졌다. 중요한 책을 먼저 빌려간 친구와 대여 시간을 흥정하거나 중앙도서관, 정독도서관에 가기도 했다. 영화를 볼 때는 극장 매표소 앞에 긴 줄을 서 기다리다가 순서대로 표를 끊어야 했다.   


 라떼 이야기를 하자는 것이 아니라 그때 누구나 일상적으로 감내해야 했던 수고로에 비하면 이 시대의 시스템은 그야말로 신속편리효율의 끝판왕이라 참 좋다는 말이다.

 우리 동네 도서관에 없는 책을 보고 싶으면 도서관 홈페이지에서 상호대차를 신청해 집 앞 도서관으로 받는다. 궁금하거나 필요한 것이 생기면 휴대폰을 열어 그 자리에서 해결하고, 기억이나 공유가 필요한 매 순간을 바로 찍어 처리할 수 있다. 같이 보고 싶은 사람이 지구 반대편에 있어도 기다림이나 비용 없이 전송된다. 

 '백문불여일견'이라고 했는데 聞보다 見이 빠른 세상이라 그 말이 이미 무색하다.       


 이쪽으로 보면 세상이 좋아지고 자쪽으로 보면 세상이 망해간다.

 삿포로 요리를 천천히 걸어가서 먹고 나서 산미 가득한 커피를 마시며 집으로 올 수 있는 세상은 확실히 살 만하다.

 아직은, 좋아지는 세상을 믿고 싶다.

 로봇이 늙은 내 팔다리를 주물러 주고, 보고 싶은 사람을 3D로 띄워서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 그날까지 오래오래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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