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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어머니의 덴뿌라

비 오는 날 부쳐 봐요

by 이명선

하루종일 비가 와서 부침개나 수제비 이런 것들이 생각났는데 혼자 그걸 해 먹자니 귀찮고, 나가서 사 먹자니 더 귀찮았다.

그때 예전에 시댁에서 어머니가 해 줬던 덴뿌라가 생각났다. 나는 덴뿌라라는 말이 낯설었다. 뭔가 어묵 같은 건가 하는 생각을 했었다.

어떤 날이었는지, 시댁 거실에 모여 티브이를 보던 어느 밤에 어머니가 물었다.

- 니들 구진하니?


네? 뭐라고요? 처음 듣는 단어였다. 그런데 남편과 아주버님이 낼름 대답했다.


-응. 구진해.

-나도.


어머니는 이번에 나를 보며 물으셨다. 너도 구진하지?

센스 있는 사람의 답은 정해져 있다. 그게 무슨 말인지 모르더라도.

'네네, 저도 구진해요!'라 말했다.

어머니는 흡족한 표정으로 "그럼 우리 덴뿌라 해 먹자"고 하셨고 주방으로 가서 뚝딱뚝딱하셨다.

나중에 알고 보니, '구진하다'는 '입이 심심하다'라는 남편 고향 말이고 '덴뿌라'는 튀김이라는 일본어였다.




그날 밤 어머니가 해 준 덴뿌라는 고구마와 감자를 얇게 썰고 밀가루 반죽옷을 입혀 바삭하게 부치는 것이었다. 별 거 아닌 간식이었는데 청양고추와 간장, 식초를 넣은 양념장에 찍어 먹으니 정말 맛있었다.

그날 이후 집에서 애들이랑 해 먹기도 했다.


갑자기 그 덴뿌라(튀김이라 하면 느낌이 안 사는)가 생각났다. 고구마도 있고 감자도 있고 부침가루, 튀김가루도 있으니 그거나 해 먹자.

고구마를 씻어 자르면서 작은 사이즈는 노견에게 주었다. 와삭와삭 잘 먹는다. 너도 좋니? 나도 좋아.

레시피북에 올린다면 난이도 별 하나에 소요시간 10분인 간식이 완성되었다. 센불에 기름을 넉넉히 둘러 튀기듯이 부치는 게 포인트다. 고구마가 속까지 익어야 하니 얇게 써는 것도 중요하다.

집에 캔맥주가 없는 게 좀 아쉬웠지만 없어서 다행이었다. 아줌마가 낮에 집에서 파자마 입고 혼자 캔맥주까지 마시면 알코올사용장애 같다.



비 오는 날 더 맛있는 고구마튀김





저녁식사 준비를 다 하고 남편의 귀가를 기다리는 동안 친정엄마에게 전화를 했다. 그리고 시어머니께도 오랜만에 전화를 했다.

오늘 어머니가 해 줬던 덴뿌라 생각이 나서 혼자 해 먹었다고, 마늘을 쪄서 꿀마늘을 담고 나머지는 장아찌를 해봤는데 어머니 장아찌처럼 아삭아삭하지 않고 퍽퍽해서 별로라고 말했다.

어머니는 흥분하시면서, 아이구, 그걸 왜 쪄, 찌면 안 되는 거야!! 라 외치며 마늘장아찌를 제대로 담는 법을 속사포로 알려주셨는데, 그냥 들으면 화내는 것 같지만 그게 우리 어머니의 말투일 뿐이다.

마늘을 왜 쪘냐뇨, 좀아까 분명 꿀마늘 하려고 찐 마늘로 장아찌를 해 본 거라고 했잖아요,라는 말은 굳이 할 필요가 없다. 그런 말은 친정엄마일 경우에 한다.

-엄마, 내가 아까 뭐랬어. 꿀마늘 할라고 쪘다가 남아서 장아찌 했다고 말했잖아!


어머니가, 레시피를 마무리하시며 마늘장아찌는 간장이 배고 매운맛이 빠질 때까지 오래 뒀다 먹어야 된다고 당부하셨다. 그래서 '오래 얼마나요? 한 달요?'라 물었다가, 아이구, 하며 다시 한소리 들었다.

이런 관계가 26년이었던 거다. 그래서 재미있다.


내년 봄이면 내가 태어나서 결혼하기 전까지 살았던 세월과 결혼해서 이 집 며느리가 된 후의 세월의 길이가 똑같아진다. 깜짝 놀랄 일이다. 내년 여름 이후엔 우리 시어머니의 막내며느리로 사는 세월이 더 길어지는 일만 남았다.


시어머니도 나도 남은 세월을 별 탈 없이 지내려면 노력이 필요하다. 한쪽의 노력이 끝나는 순간 진짜 불행해지는 사람은 따로 있을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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