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도둑을 키웠어요

가문에 먹칠할 관상

by 이명선


우리 개가 밤을 훔쳤다.

시어머니가 밤을 사서 택배로 보내셨길래 자루를 열어 상태를 확인하고 입구를 대강 말아 두고 전화를 드렸다. 채 1분도 안 걸린 전화를 끊고 돌아보니 개가 자기 쿠션과 집 사이에 머리를 박고 있었다. 제 나름으로 안 보이게 숨었다는 뜻이다.

내가 다가갔는데도 정신을 못 차리고 물색없이 아르릉거리기까지 한다. 입에 문 것을 얼른 뺏었지만 미 큰 알밤 껍데기를 까 낸 후였다.

어렸을 때 할머니댁 마당에서 쥐가 파 먹었다는 빨랫비누를 본 적이 있는데 그 비누 모서리가 딱 그렇게 깎였던 기억이 난다.

나이가 들며 이가 서너 개는 빠진 데다 이제는 딱딱한 개껌은 먹지도 못 하는데 이 짧은 시간에 저지른 일이 놀라웠다.

역시 사람이나 개나 모든 것이 정신력 문제인가 보다. 맛있는 냄새가 나는 자루를 주둥이와 앞발로 풀어서, 물기 좋은 알밤 한 개를 조용하지만 신속하게 꺼낸 다음, 아줌마가 한눈파는 사이에 빨리 먹어 없애야 한다는 급박하고 강렬한 욕구가 만든 사건이다.

증거물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2년 전 고구마 절도에 이어 두 번째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아무도 없는 집에서 한 짓도 아니고 내 앞에서 대놓고 벌인 행각이라 기가 막혔다.

저것이 늙으면서 시각과 판단력이 둔해지고 후각과 식욕만 남는가 보다.


고구마 절도 사건의 경위...


는 이러하다.

그때도 시어머니가 사서 보내신 고구마 한 상자가 택배로 왔다. 다른 가족들은 학교와 직장에 갔고 당시엔 나도 일을 하던 때라 고구마 상자를 일단 발코니에 두고 집을 나섰다.

혹시 개가 상자를 뜯지 않을까 잠깐 걱정했으나 개는 상자보다 키가 작았고 테이프로 봉인된 10킬로 고구마 상자는 웬만한 택배 상자보다 튼튼해서 소형견이 헤칠 수 없다.

퇴근하고 집에 갔는데 현관중문 앞에 고구마 꼬다리가 떨어져 있었다. 거실 바닥 여기저기에 고구마 파편들도 흩어져 있었다. 깜짝 놀라 발코니에 둔 고구마 상자를 살펴보았지만 그대로였다.

그런데 상자 옆쪽 손잡이 겸 통풍구처럼 타원형으로 뚫려 있는 부분이 처참하게 찢겨 있었다. 우리 개가 그 공간을 집중적으로 물어뜯고 거기로 고구마 하나를 꺼내어 알뜰히 다 먹고 나서 꼬다리만 남긴 것이었다.

남은 꼬다리로 추정하건대 개의 뱃속으로 사라진 고구마의 사이즈는 족히 내 손바닥 길이는 됨직했다.

우리 개는 배가 빵빵히 부른 채로 나를 향해 기분 좋게 꼬리를 흔들고 있었다.

당시 사건 현장 사진들



얼마 전에 아파트 1층에서 엘리베이터를 기다릴 때다. 내가 숫자판을 바라보는 사이에 우리 개가 1층 집 앞에 놓인 택배 상자 옆구리에 코를 박고 있었다.

그 집에서 문을 열고 사람이 나오기라도 하면 피차 위험한 순간이다. 엘리베이터 앞에서 그런 일이 없어서 방심했던 가슴이 철렁했다.

그때도 고구마 상자였다. 만약 시간이 충분하고 제지할 사람이 없다는 여건이 됐다면 분명히 남의 집 고구마 상자를 뜯었을 것이다.

고구마 박스의 약점은 옆구리 구멍임이 분명하다



남편은 퇴직하면 한갓진 곳에 작은 집을 짓고 우리 개가 죽을 때까지 같이 살고 싶다지만, 제 버릇 다른 개 못 준다고 농작물이 흔한 시골에서 저렇게 도둑질을 하러 다니지 말란 법이 없다.

그때는 집안일이 아니라 이웃과의 일이 될 수도 있다. 늙은 도둑개가 사는 집이라는 오명을 얻을 수도 있다.

-세상에, 저기 새로 이사 온 집에 글쎄, 쬐그맣고 등허리 털은 다 늙은 개가 집집마다 다니면서 고구마며 밤을 싹 훔치고 다닌대.


하긴, 그러려면 열여섯열일곱 살일 텐데 같은 견종의 평균 수명보다 오래 살아야 한다. 그리고 최소한 지금만큼의 활력이 있어야 도둑질도 할 테니 오히려 우리 개가 동네에 악명 높은 늙은 도둑개가 된다면 은근히 기쁜 일일까.

이렇게 생각하니 노견의 이빨이 아직 껍데기를 까먹을 만큼 튼튼하단 사실은 좋다.


저녁에 밤을 짤 때 신나게 먹다 뺏긴 밤을 맨 위에 올려놓고 쪄서 알맹이 까 주었다.

그래, 인생 뭐 있니. 오늘 맛있는 거 먹고 즐거운 하루 보내면 그게 최고다,

맨 위에 얹은 밤 하나는 니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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