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절 연휴가 지나 여기저기서 얘기들을 듣다 보면 나는 아들이 없어 다행이란 마음이 절로 든다. 내게는 좋은 시어머니가 될 기회가 없다는 게 좀 아쉽지만, 좋은 엄마도 못 되는 판국에 좋은 시어머니가 되기는 애초에 불가능임을 인정하기로 한다.
내 경험상 아들을 가진 엄마 중 십중팔구 명은 콩깍지렌즈삽입술을 받은 게 분명하다. 누가 봐도 참 평범한 아들을 세상 최고의 남자로 보면서 매사에 그 아들만 최우선이기 때문에 울컥하는 며느리들의 뒷담화를 피할 수 없다.
나라고 다르겠나. 만약 나에게 아들이 있었다면 남편 콩깍지보다 더한 아들 콩깍지까지 겹쳐서 정상적 판단력을 잃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아들에 대한 연연함 때문에 눈흘김을 안 받으며 늙을 테니 다행이다.
내 남은 인생에 제트세대 딸들에게서 받는 타박으로 충분하다. 생판 남인 제트세대 며느리에게서까지 지적을 받고 싶지 않다.
우리 50대도 대한민국의 파격적인 엑스세대의 일원으로서 요즘 크롭티의 원조인 배꼽티를 입던 세대다. '캡 좋아' 같은 말을 썼다가 엄마에게 혼나기도 했다.
게다가 나는 또래 여성들보다는 생각이 유연하고 진보적인 사람이라고 자평하며 살았는데 딸들의 눈에는 내가 '열린 교회 닫힘' 엄마로 보이는 게 좀 억울하기는 하다.
딸이 있어 좋겠다고 하는 사람들에게 고백하건대 딸이라고 항상 엄마 편은 아니다. 엄마에게 가장 신랄한 충언을 쏘아대는 존재가 딸이다.
오히려 아들은 엄마에 대한 적당한 무관심과 선천적인 흘려듣기 능력으로 자기 엄마 편만 들 수도 있다.
(가까이에 당신 곁의 남친과 남편을 보면 알 것이다)
언젠가 한번은 작은딸에게 '엄마는 딸이 둘이라 사람들이 너무 부럽대'라 했다가 한소리를 들었다.
-'늙으면 딸이 있어야 돼' 이 말도 이기적인 거야. 딸이 있어서 좋은 게 누구야. 부모들 아냐? 그렇다면 그건 딸들은 늙어가는 부모를 돌봐야 한다는 자기들 바람을 떠넘기는 거잖아.
너무 맞는 말이라 할 말이 없었다.
그래, 예전에 '아들 하나는 꼭 있어야 된다'고 주문처럼 외던 어른들은 자기 노후 부양과 사후 제사를 생각했기 때문일 거다. 딸은 시집과 동시에 남이 되던 시절이었으니까.
그 가치관이 시대 변화에 따라 '아들딸 평등하게'로 흘러왔고 이제는 더 나아가 '딸이 있어야 한다'로 바뀌었다. 냉정히 말해, 자식이 나를 좀 낳아 달라고 애원해서 낳은 것도 아니고 이 힘겨운 세상에 부모 멋대로 낳아 놓고는 저희들끼리 또, 아들이 있어야 된대, 딸이 있어야 된대 운운하니 그들 입장에선 당황스러울 것이다.
이렇듯 무심코 한 마디 했다가 딸에게 정신교육을 받는 일은 드물지 않다.
나도 70대 중반인 엄마를 만날 때마다 번번이 생각의 격세를 느끼니 한 세대 다음 여성들과 내 가치관이 다른 것은 당연하다.
나는 불공정이 당연한 시대를 살아왔다. 똑같은 대졸신입사원으로 입사해도 여사원들만 당번을 정해 돌아가며 아침마다 부장님 책상을 정리하고 커피를 뽑아 놓아드려야 했다. 1994년의 나는 그런 세태를 이상하게 느끼지도 못했다.
50여 년을 그렇게 잔뼈가 굵었으니 지난 사회와 기성세대가 나의 내면에 가스라이팅 해 놓은 편견들은 개선하기가 매우 어려울 것이다.
그래서 가끔 분하다.
연휴 동안 같이 티브이를 보다가 한 여자 가수에게 '쟤는 갑자기 살이 많이 쪘네'라 생각 없이 말했다가 딸들의 질타에 맞아 죽었는 줄 알았다.
왜 여자 가수는 날씬하고 예뻐야 되냐, 엄마는 왜 남의 몸평얼평을 하냐, OO이가 살이 찌든지 빠지든지가 무슨 상관이 있냐, 저렇게 아름다운 목소리로 좋은 노래를 들려주는데 몸까지 날씬해야 하냐.......
난타를 맞고 간신히 소생한 내가 진심으로 말했다.
-엄마는 아들이 없어서 진짜 다행이야. 딸도 이런데 며느리는 더 어려울 거 아냐. 며느리 눈치 안 보고 명절이든 뭐든 아빠랑 둘이 맘 편히 보낼 수 있고 얼마나 좋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