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명선 Oct 30. 2023

시립도서관에 간다

그저 어슬렁어슬렁 구경만 해도 좋아요

 20년 넘은 우리 구축 아파트의 장점 중 하나는 정문 앞 도보 1분 컷에 시립도서관이 있다는 것이다. 집 밖을 나서면 이면도로 건너 아파트 재건축 현장의 부산함으로 온 동네가 정신없이 돌아간다. 이미 20여 층 높게 쌓아 올리고도 키를 계속 늘리는 콘크리트의 위용에 비례해서 나이 든 이 주변 이층짜리 상가들은 점점 초라해지고 더 작아진다.

 그 대비를 뒤로하고 수십 년 간 동네 맛집으로 군림하며 외부 손님들이 끊이지 않는 식당과 주점들이 모인 골목으로 꺾으면 시립도서관이 있다.


 나는 이전 동네에서도 도서관 근처에 살았다. 그 마을은 우리 신도시 내의 강북으로 여겨지면서 한적하고 집값도 낮은 지역이었는데 우리 시의 대표 도서관을 딱 끼고 있어서 다른 잘 사는 마을에 대한 상대적 열등감에 작은 위로가 되었다.

 부동산 이슈로 지역이 시끄럽게 뉴스를 타면 친구들은 '너희 집도 많이 올랐겠네?' 하는 궁금증을 가졌다. 그때마다 나는 당당하게 '근데 난 이 동네 흰자에 살아.'라고 대답했다.  

 신도시의 노른자 동네가 아닌 흰자 동네 말이다. 앞에는 시립도서관을 세우고, 뒤에는 산책길이 정비된 생태 하천을 두른 영롱한 흰자였다.

 원래 흰자와 노른자는 각기 다른 영양소와 성분을 나누어 가져서 누가 더 몸에 좋다고 하기는 어렵다.


 도보 1분의 일정에서도 많은 사람들을 만난다. 점심 영업을 준비하는 사장님, 길에 서서 날씨가 좋다고 스몰토크 중인 아파트 할머니들, 어디서 구입하신 건지 모를 100퍼센트 나뭇가지로만 엮은 키큰빗자루로 비질을 하는 경비아저씨.

 사실 경비아저씨 말고는 인사를 나눌 대상이 없다. 이사 온 지 3년인데 동네에 아는 사람이 없다는 게 이상하기도 하고 당연하기도 한 세상이다.

 

 5층의 아담한 도서관 입구에 들어서는 순간 갑자기 다른 세상으로 간다. 도서관 특유의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냄새와 적당한 적막함이 가장 먼저 나를 반긴다.   


평일 오전의 도서관

  


  

 가장 먼저 신간도서 책꽂이 쪽으로 가 본다. 기왕이면 새로 도착한 도서 중에 마음에 드는 게 있으면 최상이다. 그렇다고 도서관에 책 들어오는 날 같은 것까지 챙기지는 않는다. 그냥 그날의 운에 맡긴다.

 신간도서들 중에는 단연코 여행 도서가 많다. 며칠의 여행뿐 아니라 한달살기에 대한 책들도 있다. 요즘의 한달살기는 해외 편이 많아서 조지아, 나트랑 등 떠오르는 여행지의 한달살기 안내서가 보인다.

 여행서만큼 많은 것은 육아, 교육 관련 도서들이고 의외로 종교 관련 도서가 많아서 좀 놀란다. 종교 도서는 챗GPT나 IT도서, 자기계발서이상으로 많다. 인간이 지구에서 살겠다고 아등바등하는 이야기보다 보이지 않지만 불가항력이라고 믿고 싶은 존재의 말씀과 가호에 대한 이야기가 마음 편한 것인가.

 나는 성경이나 불경을 읽으면서 나쁜 짓을 하는 사람에게 가중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다. 매주 좋은 말씀을 들으러 가고 자기 자신을 위해 열렬히 기도하면서 나쁜 짓을 하면 더 죄질이 크다.

 소중하고 좋은 말씀을 먹여 마음속에 악을 키웠다는 죄목이 추가되어야 한다.


분야별로 나뉘어 꽂혀 있다



 신간도서 중에 즘 핫한 조지아의 한달살기 대한 책을 훑어보았다.

 조지아는 홈쇼핑 여행상품이나 여행 예능 등에서도 자주 보이는 나라인데 옛 그루지야라는 나라명이 조지아로 바뀌었다는 것 외엔 아는 바가 없다.

 조지아지리상 유럽과 서아시아의 경계로 러시아, 튀르키예와 인접해 있고 오랜 시간 공산국가로 가려져 있던 만큼 물가와 인심이 아직은 부담이 덜하다고 한다. 동양의 스위스라는 애칭으로 한 번에 어떤 곳인지 설명이 된다.

 조지아 여행도 괜찮겠다. 최근에 인기 여행지로 부상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요즘 관심이 가는 미니멀리즘과 집밥 쪽 책도 둘러보았다. 미니멀라이프를 다룬 책을 고를 때는 텍스트로 구구절절 설명된 것보다 이미지가 눈에 잘 보이는 것을 선호한다. 사진이나 그림 등 이미지가 많으면 책을 만드는 가격은 더 많이 들겠지만 독자로서 가독성과 이해도가 올라간다.

 아무것도 없는 집에서 살아서 좋다는 내용의 책을 넘겨보다가 주방 사진을 보았다. 예전에 내 살림과 생활이 복잡할 때는 이런 모습이 좋아 보였는데 요즘은 너무 살림 냄새가 안 나는 집은 그냥 보고 넘기게 된다. 사람이 사는 집이라면, 오늘 아침에 사람이 머물렀구나 하는 흔적 정도는 있는 게 좋다고나 할까. 사람의 흔적은 많아도 문제, 없어도 문제인가 보다.

  

난 좋아 보이진 않는데


 

 나는 노견 케어에 대한 책도 가끔 본다. 아이를 키울 때 육아서를 봤듯이 노견은 처음이라 책에서 도움을 얻을 때가 많다. 인터넷 검색의 장점도 있지만 인터넷 검색으로 얻을 수 없는 것이 책에 살아있다. 내가 검색 키워드를 생각해서 넣지 않아도 노견 케어라는 대전제에 맞게 나보다 많이 아는 저자의 가이드를 한 번에 받을 수 있다.  

 

 홈인테리어와 요리 쪽에 서서 책 표지와 제목만 쓰윽 보다가 운 좋게 오늘 저녁 메뉴의 아이디어를 얻었다.

 돼지고기가지솥밥이다. 저자는 '뜨거운 여름에 힘을 주는 메뉴'로 뽑았지만 쌀쌀한 가을에도 힘은 필요하니까 오케이다. 집에 솥 있고, 쌀 있고, 돼지고기 있으니 가지만 사면 된다. 그리고 냉장고에 남은 시금치로 된장국 끓여서 떠먹게 내고 지난주에 사놓은 내 종아리 만한 무를 꺼내 생채를 매콤달콤하게 무쳐 반찬으로 곁들여야겠다.

 저녁밥 뭐 하지 고민할 때 도서관에 먼저 들러도 되겠다. 집 앞에 도서관 있고 도서관 옆에 마트 있으니 니즈에 따른 동선이 딱 맞는다.

 

 책을 펼친 채 머릿속으로 인터넷 검색창과 비교하다가 그만, 책장에 있는 돼지고기가지솥밥의 사진을 손가락으로 꾹 눌러버렸다. 본 사람이 없나 두리번거렸다. 다행이다.    

웹 레시피와는 또 다른 종이 레시피의 감성

  




 2023 이상문학상 작품집 한 권을 빌려서 도서관을 나섰다. 소설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이상문학상 당선집을 해마다 사서 책꽂이에 소중히 꽂아 둔 경험이 있을 것이다. 우리 집에도 남편이 대학생 때부터 모았던 책들이 일부 남아있다.

 몇 해 전에 표지가 바뀌었던 걸 봤는데 다시 금장의 클래식 버전으로 돌아왔나 보다.

 내가 지나온 시간만큼 세월이 흘러간 소설계에도 내가 좋아하던 작가들은 이제 심사위원 명단에서 보이고 새로운 이름들이 주류가 되었다. 사람과 사회에 대한 그들의 시점은 내가 좋아하던 소설가들의 시각과 닮아있는 듯하면서 다른 컬러렌즈를 낀 것 같다. 아니면 같은 부분을 보지만 약간 다른 각도에서 본다고 할까.

 젊고 낯선 소설가들의 글이 좋다. 가끔은 엥? 이렇다고? 굳이? 하는 생각을 하게 되지만 그건 어떤 글, 어떤 스토리에서도 하게 되니까.

 그래서 기대가 된다. 집에 가서 오늘 빌린 소설집을 좀 읽다가 실한 가지를 사 와서 저녁밥을 하면 되겠다. 

  

 내 집값이 싸거나 비싸거나 노른자거나 흰자거나, 공공도서관이 코앞에 있어서 정말 좋다. 


기대설렘

         

   

 


  

매거진의 이전글 물리치료실에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