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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명선 Oct 08. 2024

타인을 위한 응원

그래서 '우리'다

 타인 : 내가 아닌 남. 모르는 사람

 응원 : 운동 경기 등에서 선수들을 격려하는 말이나 행위



 버스가 사거리에서 좌회전 신호를 기다리며 서 있을 때 맞은편에 자가 나타났다. 휴대폰에서 고개를 들고 버스를 보자마자 여자는 달리기 시작했다. 버스는 좌회전 후 약 300미터 정도 가면 정거장에 설 것이다. 그와 정거장 사이는 100미터쯤? 그가 버스를 탈 수 있을 것인가, 나는 갑작스러운 경주의 관객이 되었다.

 만약 내가 과학자라면 좌회전 신호까지 몇 초, 버스의 속도와 성인 여자의 평균 달리기 속도를 계산하고 여자가 버스에 탈 확률을 뽑을 수 있을까? 치밀한 계산으로 나온 결과도 정답은 아니다.

 

 왜냐하면 초속 몇 미터니 평균 속도니 하는 수치들과 별개로 정작 버스를 탈 수 있거나 없게 만드는 결과에는 '사람의 의지'가 반영되기 때문이다.

 여자가 10미터쯤을 남긴 채 달리기를 스스로 포기하거나, 버스기사가 달려오는 여자를 보고 앞문을 연 채 기다려준다는 가정이 제일 중요한 변수다.

 나는 버스의 부드러운 좌회전을 온몸에 느끼고 여자의 질주를 두 눈으로 따라가면서 그의 성공을 간절히 바랐다.


 여자는 버스에 탔다.

 주자는 포기하지 않았고 기사님도 앞문을 열고 조금 기다려 준 것 같다.

 빈자리에 앉아 숨을 고르는 여자의 뒤에 대고 나는 '고생했어요'라 말했다. 물론 속으로.

 

 우리는 매일 가족이나 친구, 좋아하는 연예인이나 스포츠스타 같은 특별한 존재를 향해서 적극적인 응원과 격려를 보내지만 나모르게 타인을 응원때도 있다.

 이를테면 아까처럼 버스를 놓치지 않으려고 달리는 동네 사람 같이 평범한 사람들을 위해서 말이다.

 뜨겁고 뜨거워서 너무 지루했던 지난여름에 열기를 가늠할 수 없는 도로 가운데에서 교통정리를 하는 모범운전자들이나, 주행연습 중이란 표지를 달고 마치 꽁무니가 달달 떠는 것처럼 보이는 노란 차를 향해서나, 아픈 할머니를 돌보는 소년가장들을 티브이에서 보면 응원의 마음이 생긴다.

 

 내가 아스팔트 위에 서 있는 교통경찰을 향해 '수고가 많으셔요, 감사합니다!'라고 외친들 그가 신호를 무시하고 나를 보내줄 리는 없으므로 나의 응원은 아무 대가도 바라지 않고 생기는 마음이다. 남에게 보낸 응원이 하늘 창고 어디쯤에 모였다가 내가 힘들 때 돌아온다고 생각해서 하는 일이 아닌 것이다.

 그래서 더욱 크고 순수한 '선의지'다.

 

 옛날 스님들은 아무도 없는 길을 혼자 걸어갈 때도 나직이 불경을 외웠다는데 스님이 걷는 주변에 있는 온갖 미물들을 위한 불경이었다고 한다. 그 자비로운 마음을 저절로 경외하게 된다.

 (물론 요즘 스님들도 산길을 걸어가실 때 삼라만상을 위한 불경을 외울 거라고 믿습니다. 도심에서 세단을 타고 가실 때도 당연히 그렇겠고요!)




  

 전력 질주를 해서 버스를 탄 여자는 그 버스 안에 자신을 응원하던 팬이 있었는지 모른다. 나와 반대로 '뭐 저렇게까지 뛰어서 타나, 다음 버스를 타면 되지'라 생각한 사람도 있었는지 모른다. 오늘 그 버스의 경주에 심드렁했던 사람이라도 분명 다른 시간, 다른 곳에서는 또 다른 타인을 위해 치열한 마음을 보탤 것이 분명하다. 


 살아오면서 나 역시 수많은 타인들의 선의를 받았을 것이다. 국민학교의 먼지 나는 운동장에서, 고교 진학 시험장이나 대입학력고사 시험장 앞에서 그리고 바로 얼마 전에도 누군가가 내게 '아줌마, 힘내요'라 텔레파시를 보냈을지 모른다.   

 그래서 인생은 결국 '혼자'지만 죽을 때까지는 이 사회에서 같이 살아가는 '우리'인가 보다.   


 반면에, 깊은 밤 막 잠에 들려는 순간 창문 밖으로 내지르는 오토바이의 굉음이 들리면 나도 모르게 얼굴이 찌푸려지고 혐오의 마음이 터진다. 이유가 무엇이든 그 한 대가 수 킬로를 달리며 내는 소음은 최소 수천 명의 단잠을 흔든다. 

 우리나라 전설 속에서 사람의 눈에 안 보이는 것까지 본다는 게 호랑이 눈썹이던가. 아마도 호랑이 눈썹을 대고 보면 자다 깬 사람들의 원망이 아우성치며 오토바이를 쫓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중 하나가 내가 침대에 누워 날린 화살이겠지.

   

 옛날 스님이었다면 어땠을까? 

 단잠을 찢는 소음일지라도 나처럼 증오의 마음을 품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이쿠, 깜짝이야. 거 다들 자는 시간인데 살살 좀 다니시지. 쯧쯧.... 그러다 행여 사고 안 나게 조심하시요!'

 참으로 멋지다.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어른이 되자.  


 아쉽게도 이제는 창문을 꼭꼭 닫고 자는 계절이니 내년 여름에 내 그릇을 시험해 보는 걸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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