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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명선 Oct 08. 2024

남편의 잠꼬대

 바로 어젯밤의 일이다. 

 먼저 잠이 든 남편은 단정한 숨소리를 내고 있는데 나는 생리통으로 아랫배가 불편해서 잠이 오지 않았다. 남들은 다 폐경했다는데 지겹다, 지겨워, 하며 아픈 배를 마사지한다는 것이 콩콩 때리고 있었다.

 그때 남편이 내 쪽으로 돌아누우며 팔을 뻗었다. 내가 배를 치니까 그러지 말라는 건가 하는데 남편은 나를 토닥이며 잠꼬대를 했다.  


 - (웅얼거리는 소리로) 미이역 따느라 고새애해써어.


 미역? 내가 미역 따 오는 꿈을 꿨나? 

 아니면 이제 집에서 고만 놀고 어디 가서 미역이라도 따 오란 속마음인가.

 남편이 요새 연예인들이 배 타고 나가 미역 따고 농사짓고 이러는 예능 프로그램을 즐겨 보기는 한다. 꿈에서 바닷가 마을에 살고 거기서는 현실과 반대인 답게 자기는 마당에서 노는 동안 내가 미역을 많이 따 왔나 보다. 


 어둠 속에 누워 방금 들은 남편의 일성을 곰곰 분석해 보니 미역이 아니고 '일억', 그러니까 '일 억 따느라 고생했어' 였던 것 같기도 하다. 

 따스한 한국 기행 같던 남편의 꿈은 '미역'이 '일억'으로 바뀌면서 일순간 포커와 도박이 연상되는 범죄느와르 장르가 된다.

 그동안 나한테 들어간 돈이 '일 억'은 된다고 은근히 계산하고 있다가 무의식 중에 나오는 심층심리 그 뭐냐 '이드'나 '에고' 이런 데서 발현한 잠꼬대인가.

 

 그러고 보니 남편의 잠꼬대를 오랜만에 들었다. 

 내 남편의 잠꼬대에는 재미있는 히스토리가 몇 개 있다. 





 남편이 결혼 직후부터 잠꼬대를 했던 건 아니다. 

 기억에 남는 첫 잠꼬대는 지방 지점에서 몇 년을 일하고 서울 본사로 옮긴 뒤였다. 그즈음은 회사에서 가장 일을 많이 한다는 대리가 되었고 매우 바쁘고 힘들어하던 때였다. 대리라는 이름 자체가 누구의 역할이든 대신해야 한다는 뜻이다.  

 어느 날부터 잠을 잘 때 낮에 회사에서 있던 일을 조금씩 잠꼬대처럼 말하기 시작했다. 야근이 많았고 통근길이 길었으니 집에 늦게 돌아와 겨우 몇 시간 자고 나가는 건데 꿈에서도 업무가 반복되었나 보다.

 서류를 이러이러하게 작성하면 되느냐고 누군가에게 묻는다든지, 무언가를 다 세팅했다고 보고한다든지 하는 잠꼬대를 했다.

 나는 그 모습이 안쓰러우면서도 재미있어서 옆에서 말을 걸어 봤다. 그러면 또 답을 했다. 제대로 된 대화는 아니지만 잠꼬대를 하면서 한두 번은 티키타카가 맞는 답을 하는 게 신기했다. 


 그런 어느 날 시댁에 갔을 때다. 

 시어머니와 얘기하던 중에, 아범은 요즘 많이 피곤한지 잠꼬대를 한다고 말하면서 '근데 제가 옆에서 뭘 물어보면 대답도 해요. 하하' 했다. 

 이야기를 듣던 시어머니는 정색을 하시고 "잠꼬대할 때 옆에서 말 거는 거 아니야."라 말씀하셨다. 어머니에 의하면 잠꼬대할 때 자꾸 말을 걸면 자는 사람의 혼이 나간다는 것이다. 

 나는 그런 터부가 있는지 몰랐다. 다시는 말을 걸지 말아야지 다짐했다. 

 

 이제 나도 남부럽지 않은 나이가 돼 보니, 그때 시어머니는 아들이 며느리한테 놀림거리가 될까 봐 그러셨던 거 같다. 

 아니면 아무리 잠꼬대라지만 내 아들이 엉뚱한 말을 해서 둘의 사이가 나빠질까 봐 걱정하셨든지 말이다.   

 




 한 번은 부부 사이에 의심이 생기게 할 잠꼬대도 있었다. 

 회사 업무에 대한 잠꼬대가 사라져서 가끔 잠꼬대를 엿듣는 재미를 잊고 지내던 어느 밤에 갑자기 남편이 자다가 '은정아!'라며 여자 이름을 부른 것이다. 

 사실은 나도 자다가 들은 거라 진짜 '은정아'라 했는지, 그게 그런 식의 여자 이름이긴 했었는지 확실하지는 않다. 그저 그 순간에 역시 잠을 자던 내가 딱 들었던 게 '은정아'였을 뿐이다. 

 아무튼 내 이름은 절대로 아니었다. 


 나는 잠이 확 깨서 다음 말을 하는지 들어보려고 남편 코 밑에 귀를 대고 집중했지만 남편은 다시 쌔근쌔근 잠을 자버렸다. 당장 흔들어 깨워서 방금 뭐라고 했냐, 무슨 꿈을 꿨냐고 따지고 싶었지만 지금 깨워서 앞상황을 물거품으로 만드는 것보다 다시 이어질지도 모르는 잠꼬대가 또 나오기를 기다리는 게 나을 것 같아 가만히 두었다.

 어머니에게 '잠꼬대할 때 절대 말 시키지 마라'는 엄포를 들었기도 하고 말이다.


 아침에 남편이 일어나자마자 '은정이'가 누구냐고 물었다. 어제 자다가 당신이 '은정아'하고 불렀다고.

 남편은 은정이, 은경이, 은영이 등등 이와 비슷한 이름은 아무도 모른다고 억울해했다. 

 그럼 내가 잘못 들었을 수도 있으니, 연정이는? 현정이는?

 

 - 현정이는 있지. 내 사촌동생이잖아. 


 솔직히 나도 만약 누군가가 '남편이 확실하게 은정아라고 했습니까?'라 물으면 답할 수 없었다. 하느님이 정답을 보여해 줄테니 십만 원만 걸라고 했다면 '됐어요'라 했을 정도로 자신이 없었다. 

 살짝은 찜찜했지만 자다가 은정이를 부른 사건은 그렇게 지나갔다.

 그 후에 내가 생각해 보면 어쩐지 '은정아'라고 했다기보다 '언제 와' 같기도 하고 '어제야' 같기도 해서 머쓱했다.     

 이제는 오래 일이라 '그때 그랬었다'는 상황만 기억이 난다.  


 전문가의 기고를 찾아보니 병증이 아닌 일반적인 잠꼬대는 보통 잠이 든 후 3시간 이내 발생하며 나중에는 기억을 못 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또 수면 중에 말로만 하지 실제 팔이나 다리를 움직이는 행동으로 발현되는 일은 적고 그 횟수가 많지 않다고 한다. 

 남편의 잠꼬대는 내 잠꼬대와 비슷하다. 나도 가끔은 격렬한 꿈을 꾸다가 꿈 속에서 내려는 소리를 실제로 내며 잠이 깨기도 한다.  

 

 이다음에 남편이든 나든 누군가 먼저 세상을 떠나려는 순간에 너무 울지만 말고 개그 코드를 실어 한번 물어나 볼까 싶다.

 

 - 그래, 당신은 진짜 은정이란 여자를 몰랐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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