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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병섭 Nov 09. 2019

선생님 이러시면 경찰에 신고할 거에요

김병섭-인천 영종고-dasidasi.tistory.com

녀석의 교복 와이셔츠를 움켜 잡았다. 녀석의 배와 가슴 중간쯤이었을 것이다. 차마 멱살을 잡을 수는 없었다. 이 격한 상황에서도 어찌됐든 나는 선생이었고 녀석은 학생이었다. 이 갈등을 길거리 개싸움으로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다고는 해도, 도저히 끓어오르는 화를 주체할 수가 없었다. 중2라 하기에는 또래보다 꽤 키가 컸던 녀석은 몸을 뒤로 눕히며 내 손을 밀치며 말했다. 

“선생님, 자꾸 이러시면 경찰에 신고할 거에요.”

‘신고’라는 말에 마음이 다시 꿈틀, 했다. 온 몸에 신열이 돋았다. 뒤를 돌아보았다.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녀석은 비죽이 웃고 있었다. 나는 녀석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신고? 하려면 해. 먼저 너희 아버님한테 이야기 좀 하고. 신고, 하려거든, 그 다음에, 해라.”

말 하나하나에 힘이 들어갔다. 내 말들이 천천히 씹어 뱉어졌다. 녀석 때문이 아니었다. 나 때문이었다. 거의 한계에 다 왔다는 느낌에 더 위험해 보였다. 말 한마디를 듣다가, 말 한마디를 내뱉다가 걷잡을 수 없는 감정이 솟구쳐 나를 통제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어찌됐든 난 선생이었고, 녀석은 학생이었다. 정말이지 이 갈등을 길거리 개싸움으로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치밀어오르는 모욕감이...

내 손아귀에 더 힘이 들어갔다. 말을 아꼈다. 단지 녀석이 나의 말을 뿌리치고 교무실을 그냥 나가버린 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아 씨발, 이 학교 새끼들은 왜 나한테만 그래!”하던 녀석의 욕지거리 때문만도 아니었다. 5층에서 1층까지 녀석을 좇아 내려 오며 숨이 더 가빠졌던 것 때문인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그런 것들보다 내 심장을 더 두들겼던 것은, 녀석과 잘 지내고 있다고 믿었던 내 안의 희망이 우르르 무너지는 낭패감이었다. 12월이었다. 지난 9개월, 녀석과 함께 했던 일들이 한꺼번에 몰려왔다.     



녀석과 처음 부딪히게 된 것은 4월이었다. 웃음이 천진난만한 아이였다. 장난이 좀 심하긴 했지만 특별히 악해 보이거나 그런 아이는 아니었다. 친구와 투닥거리다 한 두 대 세게 때려서 서로 맞선 적은 있었지만 그게 큰 싸움으로 이어지진 않았다. 대개 먼저 때린 아이도 녀석이었지만, 먼저 사과하고 미안해 한 아이도 녀석이었다. 중재에 나선 내가 봐도 사과에 나선 녀석의 태도는 꽤 공손했고 그래서 상대방 아이도 대개 어렵지 않게 사과를 받았다. 오히려 그렇게 투닥투닥한 이후에 녀석들은 더 친해진 듯 보였다. 혹시나 싶어 주변을 살펴도 별 일은 없었다. 흥분하면 좀 거칠긴 하지만 재미있고 착한 애라는 것이 다른 아이들의 평이었다. 그랬다. 그 정도면 여느 중학교 남학생의 그리 별스럽지 않은 일상이었다.

문제는 선생님이었다. 그것도 여선생님. 나중에 안 것이지만, 녀석은 여선생님을 증오하고 있었다.

“아, 네. 부장님. 무슨 일이세요?”

4월 5일이었을 것이다. 3교시가 끝난 때였다. 서진주 부장님이 나를 찾아 오셨다.

“아니, 별 일은 아닌데, 이게 자꾸 이런 일이 생기니까, 아무래도 담임이 한 번 이야기를 좀 해야겠다 싶어서. 선생님네 반 애들이 자꾸 수업시간에 욕을 하네.”

“네? 수업시간에요? 아놔, 이놈들이 어쩌려고 그러지. 죄송해요. 내 이 녀석들을 그냥..”

나는 짐짓 놀라며 당장 교실로 뛰어갈 듯이 말했다. 하지만 그리 놀라지는 않았다. 아이들의 욕에 이미 나는 익숙해져 있었다. 욕은 우리 아이들에게 거의 숨쉬는 것과 같았다. 안그래도 어렵기로 유명한 지역에 안그래도 거칠기로 유명한 우리 학교였다. 게다가 남중이라 욕은 아이들에게 거의 인식되지도 못한 채 입에서 쏟아져 나왔다. 그럴만 했다. 격한 상황에 하루하루를 보내는 아이들이 수두룩했다. 40명 한 반에 급식지원을 받는 아이들이 절반이었고 부모와 떨어져 할머니나 할아버지와 사는 아이들도 절반이었다. 이혼가정이나 편부편모가정도 절반 이상이었다. 이 상황이 모두 겹쳐 있는 아이도 적지 않았다. 당연히 격한 감정을 하루에도 몇 번 꾸역꾸역 참아 넘기는 아이들이 많았다. 물론 욕이 문제겠지만, 삶이 더 문제였다. 욕이 들어가지 않으면 무언가를 표현하는 것을 어색해 하는 아이들이 많았다.

그렇게 녀석들의 욕을 이해할 수는 있었지만, 그렇다고 녀석들의 욕을 허용할 수는 없었다. ‘욕 좀 하지 말자 이 녀석들아’하기는 했다. 그러나 이 녀석들이 사는 면면을 보고나서는, 그 말에는 처음보다 절반 쯤 힘이 빠져 버렸다. 이 아이들의 삶을 몇 년 정도 지켜 본 다음에는 그렇게 단호하게 말할 자신이 없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달랐다. 다른 무엇보다, 이 말을 내게 건네시는 분이 서진주 부장님이셨기 때문이다. 언제나 명랑하게 수더분한 말투로 이야기를 늘어 놓는 선생님이셨다. 40대 후반의 나이로 이 학교에서 꽤 오랫동안 상담부장을 맡으셔서 나름 학생들의 거친 말과 행동에 익숙하신 선생님이셨다. 그런 부장님이 무언가 평소와 같지 않았다. 찬찬히 살펴보니 서진주 부장님의 눈가에 어린 긴장이 보였다. 평소와 같아 보였던 부장님의 명랑함도 어딘지 어색했다. 부장님께 분명 별 일이 생긴 것이 틀림 없었다.

“아니 그게 실은, 샘 반 애들이 다 그런다는 게 아니라... 아니 걔 있잖아, 샘한테는 안그래? 너무 대 놓고 욕을 해서 아 정말 내가...”

녀석이었다. 수업시간에 녀석이 떠들어서 뒤에 나가도록 했더니 녀석은 창 밖을 보며 계속 욕을 했단다. 부장님은 수업에 방해가 된다고, 조용히 하라고 했지만, 녀석은 멈추지 않았다. 부장님이 뭐라고 하셨을 때 잠시 조용히 있다가, 낮은 소리로 툭툭, 욕을 뱉었다. 이 아이들의 욕에 나름 익숙해져 있던 부장님도 끊어지지 않는 녀석의 욕지거리에 마침내 참을 수 없게 되었다. 부장님이 소리쳤다.

“야, 너, 누구한테 하는 거야, 너! 욕 하지 말랬잖아!”

그런데 녀석의 반응이 이상했다. 아니, 이상하다기 보다 놀라웠다. 녀석은 맹렬한 적의를 보이며 되려 선생님을 쏘아 부쳤다.

“아, 선생님한테 한 거 아니라고요. 내가 내 입으로 내 말도 못해요?”

그러고 녀석은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말은 멈췄지만 녀석의 적의는 멈추지 않았다. 녀석의 눈빛이 유난히 빛나 보였다. 무언가 더 말을 하려고 맘 속으로 말을 고르고 있는데 마침 수업종이 울렸단다. 서진주 부장님은 녀석의 욕보다 녀석의 반응이 놀라웠고 이건 뭔가 한 번 야단치는 걸로 해결될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드셨다고 했다.

부장님이 자리로 돌아간 후, 녀석의 가정환경조사서를 다시 들여다봤다. 초등학교 5학년 쯤에 부모님이 이혼하셨고 녀석은 아버지와 살고 있었다. 누나가 하나 있는데, 누나는 엄마와 살고 있었다. 아버지는 무뚝뚝하지만 굉장히 잘 대해 주신다고, 선물도 자주 사 주시고, 용돈도 많이 주시고, 자기가 제일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했다. 첫 상담 때 녀석은 그런 이야기를 내게 스스럼 없이 했다. 녀석도, 나도, 서로에게 호감이 있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는 상담에도, 조사서에도, 어디에도 없었다. 전화번호는 있었다. 그러나 전화번호 아래, 자신과의 친밀도를 표시하는 부분에는 엄마가 명단에도 들어가 있지 않았다. 그래, 그럴 수도 있지. 떨어져 사는 엄마에 대한 감정이 그리 좋을 리는 없잖아. 난 그걸 이해한다. 내가 그랬으니까.     



초등학교 3학년 때, 나는 고아원에 맡겨졌다. 단 두 시간이었지만, 그 두 시간이 잊혀지지 않는다. 그 당시의 나로서는 영문을 알 수 없었다. 그 시작은 우리집 앞 공터에서 벌어진 큰 싸움이었다. 아버지 형제들이 몰려 왔고 큰고모는 엄마의 머리채를 휘어잡고 서로 소리를 질러댔다. 아버지는 거울을 벽에 내리쳐 부쉈고, 이웃 어른들이 겨우 큰고모를 엄마로부터 떼어냈고, 나와 내 동생은 차를 타고 어딘가를 향했다. 내려보니 고아원이었다. ‘성심의 집’이라는 현판과 하얀 예수님 상이 보였다. 예수님은 웃으며 모두를 안을 듯이 두 팔을 벌리고 서 있었다. 싫었다. 무서웠다. 나는 예수님에게 안기고 싶지 않았다. 뒤이어 차가 또 도착했다. 큰아버지와 함께 아버지가 차에서 내렸다. 나와 내 동생은 큰고모를 따라 한 방에 들어갔다. 은은하게 빵냄새가 났다. 커다란 탁자와 의자들이 있었다.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아저씨가 한 분 먼저 와 있었다. 그 아저씨는 따뜻하게 웃으며 나를 안을 듯이 다가왔다. 나는 싫었다. 무서웠다. 나는 그 곳을 벗어나고 싶었다.

어른들이 이야기를 시작하려던 때, 내가 그렇게 엉거주춤 집에 가고 싶다는 생각만 속으로 하고 있을 때, 밖이 소란스러웠다. 어렴풋이 엄마의 고함소리가 들렸다. 외가댁 식구들이 엄마와 함께 방에 들어왔다. 엄마와 아빠가 서로를 향해 소리를 지르며 욕을 쏟아냈다. 이혼, 고아원, 별거, 자식, 책임, 간통 등등 무슨 말인지 그 때의 나로서는 따라갈 수 없이 많고 복잡한 이야기들이 오고 갔다. 그리고 나와 내 동생은 다시 큰고모의 차에 올라탔다. 그날 나는 큰고모네 집에, 동생은 작은 고모네 집에 보내졌다.

아버지의 사업이 망한 지 3년 째였다. 술과 사람을 좋아하던 아버지는 돈과 셈에 약했다. 작은 돈을 손에 쥐려고만 했지 큰 돈은 이상하리만치 쉽게 생각해서 손해를 보는 일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그러고도 아버지는 당당했다. 당당하게 술을 마시고, 당당하게 길바닥에 쓰러져 잠들었다. 사업이 망하고 큰아버지가 알아봐 준 공장경비로 취직해 살면서도 아버지의 술은 멈추지 않았다.

얼마 되지 않는 경비 월급, 그것도 곧이곧대로 전해진 일이 거의 없는 아버지의 월급을 기다리다 지친 엄마는 일을 나섰다. 아는 사람이 없어 동네 복덕방에 찾아가 다짜고짜 부탁을 했다. 복덕방이 사랑방이던 시절이었다. 집집마다 자세히는 아니어도 사람들의 먹고 사는 대강의 사정은 복덕방을 오갔다. 복덕방 아저씨가 일러 준 일자리는 식당 주방 보조였다. 그러나 식당을 찾아간 엄마는 기겁을 했다. 그곳은 식당이라기보다 술집에 가까운 곳이었다. 엉겁결에 시작한 첫날부터 엄마는 심장이 두근거려서 저녁부터 새벽까지 자신이 뭘 하고 있는 지도 몰랐다고 했다. 경상남도 산청에서 나고 자란 사람이었다. 어릴 적부터 병약해서 8남매 중에 가장 곱게 자란 사람이기도 했다. 가난한 살림이었지만 외할아버지는 뭔가 맛있는 것이 생기면 숨겨뒀다 몰래 건네주실 만큼 골골 거리는 6째 딸을 제일 이뻐하셨다고 했다. 가문은 벌써 몰락했지만 자존심은 아직 몰락하지 않은 양반집이었다. 엄마는 돌아가신 할아버지에게 예의범절과 여자의 몸가짐에 대해 엄하게 배웠다고 했다.

엄마는 주방일을 하고 돌아온 그날 새벽, 집에 와서야 눈물을 쏟았다. 밤새 보고 들은 것들이 엄마에게는 너무 놀랍고 억센 것들 뿐이었다. 주방에서 설겆이를 하고 음식을 준비하고 가끔 홀에 나가 서빙을 하는 정도였는데도 자기가 무슨 큰 죄를 저지른 거 같아서 엄마는 무서웠다고 했다. 얼굴이 붉어져 취기가 오른 사내들의 눈빛 속을 다니는 것이나 술집 아가씨들의 요란한 웃음소리와 담배연기 곁에 있는 것도 떨렸다고 했다. 엄마는 집에 돌아와서는 선 채로 주저 앉아 벽에 기대 울다가, 자고 있는 나와 동생의 얼굴을 들여다 보고, 쌓여 있는 학교 공납금 고지서와 세금 독촉장을 보고, 도리질 치는 머리를 두 손으로 잡고 이를 악물고, 또 울었다고 했다. 나와 동생이 깰까봐 울음소리도 못내고, 신음소리로 바뀌어 버린 그 울음을 울면서 눈을 감지도 못하고 울었다고 했다. 살아야 했다. 아버지만 보다가는 죽을 것만 같았다.

그렇게 엄마는 일을 시작했다. 주방에서 시작했다가 홀서빙을 했다. 악착같이 돈을 모았다. 그러다 좋은 언니도 사귀었다. 술집에서 일하면서도 술 한 잔, 담배 한 대 손에 대지 않는 엄마를 보고 신기해 하며 다가온 사람이었다. 엄마보다 스무살이나 많아 언니라 부르기 어려운 나이였지만 그 언니는 엄마를 살뜰히 챙겼다고 했다. 그 언니가 그간 모은 돈으로 새로 가게를 연다고 했다. 술집이 아니라 다방이었는데 자기가 사정이 있어 내내 가게에 있을 수 없으니 엄마에게 이 가게를 좀 책임져 달라는 제안을 한 것이다. 엄마는 그 일을 받았다. 언니에게 얼마간 돈을 보태고, 엄마가 가게를 운영하고 수익의 절반을 언니에게 넘기는 조건이었다. 식당 아줌마 1명, 홀 아가씨 3명에 건물주와 사장님을 끼고 낯선 사람들을 대해야 하는, 엄마로서는 태어나 처음 해보는 ‘사업’이었지만, 엄마는 두렵기보다 신이 났다고 했다. 매장을 열기 전 날, 물 한 그릇을 떠 놓고 진심으로 기도했던 그날 밤에는 외할아버지가 꿈에 나타나 밝게 웃으셨다고 했다.

엄마의 사업은 번창했다. 사무실과 공장이 몰려 있는 지역이어서 배달이 많았다. 아침이면 으레 다방에 시킨 배달 커피 한 잔으로 일을 시작하던 게 익숙하던 시절이었다. 점심을 먹고 난 오후 한가한 때도 배달이 많았다. 한 잔에 600원짜리 커피를 팔면 대략 200원이 남았다. 그 때 다른 다방에서는 몰래몰래 한 잔에 1000원으로 술을 팔았다. 돈이 많이 남는 장사였지만 엄마는 술을 팔지 않았다. 엄마 나름의 원칙이었다. 엄마는 친절과 예의로 손님을 대하고 손님의 이야기를 잘 들었다. 우스개도 잘 하고 같이 안타까워 하기도 했으며 무엇보다 남자들에게 칭찬을 잘 했다. 엄마는 같이 일하는 다방 이모들한테도 그렇게 손님을 대하도록 가르쳤다. 이모들에게 담배는 옥상에서 피게 했고, 술은 영업 중에는 못마시게 했으며, 세 번 정도 경고를 해도 손님이 무례하게 함부로 굴면 엄마를 부르게 했다. 엄마가 대신 앉아 손님을 달래다가 그래도 안되면 엄마는 짐승처럼 싸웠다. 싸움이라고 해봐야 남자손님의 멱살을 잡고 늘어지는 것이 고작이었지만, 죽을 힘을 다해 움켜쥔 엄마의 손에서는 손톱이 눌린 자리마다 피가 베었고, 곱아진 손마디에 시퍼런 멍이 들었다.

그 때 엄마 나이가 서른 둘이었다. 그걸 뭐라 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젊은 사람이 헤픈 일 없이 열심히 산다며 나이 지긋한 사장님들 사이에는 엄마에 대한 좋은 소문이 퍼져 나갔다. 거기다 엄마가 가게에 든 도둑을 두 번이나 잡아 경찰에 신고한 일이 알려지면서 기존의 배달을 끊고 엄마네 가게에 배달을 시키는 사장님들이 늘어났다. 경찰 아저씨한테 도둑을 넘기고 조서를 쓰러 들른 경찰서에서 만난 파출소 소장님은 나이도 어린 여자분이 큰일 난다고, 다음에는 그러지 말고 일단 도망부터 가라고 했지만 엄마는 그럴 수 없었다. 그 돈을 잃을 수는 없었다. 두 번째 도둑을 잡을 때도 그랬다. 엄마는 도둑이 던진 재떨이에 턱을 맞아 나중에 여섯 바늘이나 꼬맸지만, 함께 가게에서 자고 있던 주방이모가 길건너 파출소에 달려가 경찰을 불러올 때까지 턱과 입에서 흐르는 피를 삼키며 그 도둑의 다리를 쥐고 놓지 않았다. 그렇게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엄마를 인정했다. 나만 빼고 다들 그랬다.

엄마가 가고, 집은 나에게 맡겨졌다. 새벽부터 일을 준비해야 해서 일주일에 하루 이틀 가게에서 자던 엄마는 얼마 있지 않아 내내 가게에서 지냈다. 가게 때문이기도 했지만, 실은 아버지 때문이라는 걸 나는 알고 있었다. 엄마는 더는 아버지를 참을 수 없다고 했다. 엄마가 일을 시작하고나서, 아버지의 술은 더 늘어났다. 엄마는 아버지에게 자신의 일을 철저히 숨겼다. 그래도 문제는 사라지지 않았다. 아버지는 엄마의 일 때문이 아니라 엄마가 집에 늦게 들어온다는 것 자체를 문제 삼았다. 그리고 술을 마셨다. 아버지는 폭력적인 사람은 아니었다. 아버지는 목청이 좋았다. 맘도 착했다. 그래서인지 아버지의 주사는, 남 걱정 하는 이야기를 고래고래 동네가 떠나가라 소리를 지르며 하는 것이었다. 동네 어른들은 아버지의 마음을 싫어하지 않았다. 그러나 아버지의 술은 좋아하지 않았다. 그럴 때마다 이웃 어른들은 우리 집에 와서 엄마를 찾았다. 하지만 엄마는 없었다. 그 자리에, 내가 있었을 뿐이다.

어느 장마에 비가 많이 왔을 때였다. 동네 떠내려 간다고, 이 놈의 동네 하수구가 역류해서 동네 떠내려 가면 어쩔거냐고 누구를 향하는지도 모를 소리를 지르면서 아버지는 그 비를 다 맞으며 서 있었다. 옆집 찬수네 엄마가 우리집을 찾아왔다. 엄마가 없다는 내 말을 듣고, 찬수네 엄마는 난처해 하며 지금 아버지가 빗 속에 있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러고는 다시 엄마가 집에 없음을 확인한 아줌마는 알았다고, 신경쓰지 말라며 돌아갔다. 나는 신경이 안써지지가 않았다. 창밖을 내다보니 가로등빛에 멀리 동네 골목길 사거리에 서 있는 누군가가 보였다. 우산을 하나 챙기고, 우산 하나를 펼쳐서 아버지에게 갔다. 이제 그만 가자고, 비 이제 그칠 거라고, 비 많이 와도 이 동네 안떠내려간다고 아버지의 손을 잡고 끌었지만, 아버지는 내가 건넨 우산도 던져버리고 다시 똑같은 소리를 질러댔다. 나중에 나도 열이 올라서, 내가 쓰던 우산도 던져 버리고 아버지의 팔을 두 손으로 끌어 보려 했으나 아버지는 내 손을 뿌리치고 갑자기 “어머니! 어머니! 불효자는 웁니다!!.”하고, 갑자기 나는 본 적도 없는 할머니를 소리쳐 부르며 울기 시작했다. 온 몸을 떨며 빗 속에 흐느끼는 그 모습을 보다가 나는 우산을 다시 주워 돌아 섰다. 우산을 펴지 않았다. 어차피 다 젖어 있었다. 돌아오면서 나는 울었다. 아버지가 미웠다. 그러나 더 미운 사람이 있었다. 참을 수 없이 미웠다. 그냥 엄마가 이 자리에 없다는 게, 그게 너무 미웠다. 그 때 나는 9살이었다.     



그날, 녀석과 상담을 하면서 내가 눈물이 났던 것은 녀석에게서 내 어린 날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서진주부장님이 다녀가신 날 나는 종례 후에 녀석을 불러 냈다. 녀석도 이 정도 쯤은 예상한 것인지 순순히 나를 따랐다. 4층 교무실 옆에 마련된 작은 상담실에 앉았다. 그곳에서 녀석은 가정환경조사서에는 적어내지 못한 이야기를 했다. 녀석의 아버지는 아파트 공사장에서 목수일을 하셨는데, 공사장이 옮겨질 때마다 전국을 돌았다. 집을 비우는 일이 잦았고 녀석은 혼자 밥을 지어 먹고, 빨래를 하고, 학교를 다녔다. 문제는, 늘 그랬듯이 술이었다. 일주일이나 보름에 하루 이틀 집에 돌아온 아버지는 대개 술에 취해 있었다. 녀석은 아버지한테 술냄새가 날 때마다 격렬하게 소리를 질렀고, 그러다 아버지에게 잡혀서는 머리며 등짝을 얻어 맞았다. 아버지가 선물과 용돈을 잘 주신 것은 대개 그렇게 손찌검을 한 다음날이라고 했다. 아버지에게 그렇게 맞았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내가 흥분하며 분노했던 것과 달리, 녀석은 아버지의 폭력에 대해서는 의외로 관대했다. 다만 녀석이 싫어한 것은 술이었다. 녀석은 정말 술을 싫어했다. 그 술이 아빠와 엄마를 헤어지게 만든 것이라고 녀석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날의 이야기가 자연스레 엄마에 관한 것으로 넘어가자, 몇 마디를 못 넘기고 녀석은 울먹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곧 눈물을 쏟았다. 별로 보고 싶지 않다고, 생각도 잘 안난다고 퉁명스럽게 말하면서 녀석은 고개를 돌렸다. ‘아, 나, 씨발..’하는 녀석의 욕이 그 때만큼은 욕으로 들리지 않았다. 녀석은 그런 말들로 눈물을 틀어 막으려 하고 있었다. 녀석과 마주 앉아 있던 나는 녀석의 옆자리로 옮겼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녀석의 어깨를 안아 주었다. 녀석도 내 손을 피하지 않았다.

“아 진짜 씨... 아, 이건 아닌데...”

“아니야, 괜찮아. 그럴 수 있어. 괜찮아.”

우리는 서로 누구에게 하는 지도 모를 말을 중얼거리며 그렇게 앉아 있었다. 서로 눈물을 흘리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서로 눈물을 모른 척 해주며 그렇게 앉아 있었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지나고 나서, 나는 내가 겪었던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엄마와 떨어져 사는 어느 아이의 이야기였다. 그리고 잘 살아야 한다고, 네가 잘 살아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내가 그랬으니까. 엄마 아빠는 엄마 아빠의 삶을 사는 거고, 나는 나의 삶을 사는 것이다. 큰고모네 집에서 반년이 지나 다시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온 후, 나는 그렇게 살았다. 내가 아무리 잘 살려고 해도, 결국 엄마 아빠의 별거를 막지는 못했다. 그래도 나는 나대로 잘 살려고 애썼다. 그것이 어쩌면, 아버지와 엄마를 다시 만날 수 있게 하는 마지막 기회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상황은 더 나빠져서, 어느 날 아빠가 앞으로는 이 아주머니를 엄마라고 부르라는 상황이 있었다. 두 번 있었다. 그리고 다른 어느 날에는 엄마가 어떤 젊은 아저씨와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지켜볼 때도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도 나는 졸업을 하고 대학을 가고 교사가 되었다. 아쉬운 것이 없을 리는 없었다. 그러나 후회는 남지 않았다. 엄마 아빠는 엄마 아빠의 삶을 사는 거고, 나는 나의 삶을 사는 거다. 그런 태도는 결국 우리 가족을 구하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나의 삶은 건져냈다.

녀석도 그렇게 살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내가 녀석의 엄마와 아빠를 어쩔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다만 녀석의 곁에서 녀석을 응원하는 일 뿐이었다. 나는 진심으로 녀석이 잘 살기를 바랐다. 그러자 그 때까지 순순히 듣기만 하던 녀석이 갑자기 물었다.

“잘 사는 게 뭐에요?”

“네가 혼자 살면서도 재밌게 지낼 수 있는 거.”

녀석의 질문에는 어딘가 불만이 어려있었다. 나는 조금 더 조심하며 말을 이었다.

“네가 혼자서도 즐겁게 지낼 수 있는 거. 그게 잘 사는 거야. 그건 공부를 잘 해야만 되는 일은 아니야. 어쩌면 공부를 잘 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일 거야. 그래도 해 보자. 선생님이 도와줄게.”

나는 ‘선생님이 도와줄게’가 아니라 ‘내가 도와줄게’라고 했어야 하는 거 아니었을까 싶어 잠시 말을 멈췄다.

잠시 고요했다. 녀석이 말했다.

“선생님 저, 애들이 기다려요. 피시방 가야되요.”

“어, 그렇구나. 알았다. 그래, 조심히 가고, 다음에 또 보자, 우리.”

우리. 그래, 난 그 때 ‘우리’라고 말했다. 녀석은 별 말 없이 인사만 꾸뻑 하고 터벅터벅 걸어 나갔지만 난 녀석이 내게 인사를 한 것만으로도 마음이 더워졌다. 그래, 그럴 수 있다. 그 나이쯤의 남자들이 자기 맘을 서로 보였다고 금방 친한 척 하기란 분명 쑥스러운 일일 것이다. 녀석의 뒷모습을 보며 난 우리가 ‘우리’라고 부를 수 있는 사이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상처가 늘 나쁜 건 아니다. 잘 보듬은 상처는 누군가를 이해할 수 있는 문이 되기도 하니까. 서로의 상처를 맞대고 서로의 아픔을 짐작하는 일은 생각보다 꽤나 시원한 일이다. 나는 그 상담이 녀석과 나에게 그런 시간이었다고 생각했다. 나의 착각이었다.     



그날 이후로도 녀석의 악다구니는 계속 됐다. 2학기가 되면 나아지겠지 했던 나도 녀석의 지각이 거듭되고 청소를 도망가는 일이 반복되며 수업시간의 일로 미술선생님과 음악선생님까지 찾아오는 일이 생기자 이대로는 안되겠다 싶었다. 사건이 생길 때마다 매번 상담을 하며 녀석의 마음을 헤아리려 했지만, 녀석은 그 선생님들이 얼마나 나쁘고 자기만 미워하는지를 내내 늘어놨다. 설령 그렇다고 해도, 네 마음을 그렇게 드러내면 아무 것도 해결되지 않는다고 설득할 때에도 끄덕이는 고개와 다르게 녀석의 눈빛은 달라지지 않았다. 그러다 녀석이 6교시 영어시간에 떠들지 말라는 선생님의 말에 영어책을 교실 벽에 던지고는 “아이, 씨발!”하며 교실을 뛰쳐 나간 일이 생기고 나서는 나도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세 대만 맞자.”

녀석을 빈 교실로 데려간 나는 준엄하게 말했다. 내가 전화를 했을 때 녀석은 학교 근처의 피시방에 있었다. 녀석에게 지금 당장 교실로 오라고 했다. 녀석이 교실에 나타났다. 그 마음이 고마웠지만, 그런 마음으로 멈출 상황이 아니었다. 아무리 말을 해도 녀석은 자신의 말과 행동이 사람을 얼마나 아프게 하는지 헤아리지 못했다. 아니, 안했다. 분명히 안했다. 그러지 않고서는 그렇게 모진 말을 그렇게 멈추지 않고 할 수는 없었다. 그렇게 마음이 아프지 않다면 몸이라도 아파야 하지 않을까. 녀석이 사고를 칠 때마다, 녀석 때문에 다른 선생님들이 나를 찾아올 때마다, 심지어는 내가 있는 교무실 문이 벌컥 열릴 때마다 내가 얼마나 가슴 철렁해 하며 당황하고 걱정하는지, 그 마음을 짐작한다면 그렇게 할 수는 없었다. 상대방의 아픈 마음에 대해 같이 아파할 수 없다면 정말 몸이라도 아파야 하는 거 아닌가. 3년 만에 처음 든 매였다. 교실의 망가진 마대자루의 절반을 잘라 만든 매였다. 신규교사로 1년을 보내고 나서, 교실에서 내가 예상하지 못한 당황스런 상황이 생길 때마다 어느 새 내가 욕하던 어린시절의 내 선생들과 똑같이 행동하는 나를 보고 두 번 다시 잡지 않으리라 놓았던 매였다. 빈 교실로 먼저 들어간 나는 교실 한 가운데에서 녀석을 불렀다.

“도저히 안되겠다. 너도 좀 아파야 겠다. 이리로 와. 세 대만 맞자.”

그러나 내가 당황할 일이 생겨 버렸다. 녀석이 나를 보고는 소리로는 새어 나오지 못한 욕을 쏟아내며 교실을 그냥 나가버린 것이다. 나는 녀석을 따라 교실을 나섰지만 녀석을 잡지는 못했다. 녀석은 저 멀리, 복도를 뛸 듯이 걸어나가면서, 나를 돌아보며 외쳤다.

“선생님, 실망이에요. 나는 선생님 믿었는데, 진짜 실망이에요.”

그 말이, 나를 멈춰 세웠다. 하고 싶은 말이 뭉텅이로 올라오다 목구멍에 걸려 채 나오지 못했다.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한 것일까. 멈춰 서서 나는 멍하니 서 있었다. 녀석의 뒷모습이 복도를 돌아나가 사라질 때까지 나는 그렇게 서 있었다. 그러다 나도 걷잡을 수 없는 감정이 갑자기 솟구쳤다.

“에이, 씨발!”

나는 돌아서서 마대자루를 교실 바닥에 집어 던지며 욕을 크게 내질렀다. 내 안의 뭔가 터질 듯한 그 마음을 진정할 수가 없었다. 우당탕탕쿠당. 바닥에 튕긴 마대자루가 책상에 부딪히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 마지막으로 마대자루가 마룻바닥에 구르기까지 텅 빈 교실이 그 소리들을 더 크게 울려냈다. 그 소리가 다 사라지고서도 한참동안 나는 멍하니 교실에 서 있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서진주 선생님께 조언을 구했다. 대강의 이야기를 들은 선생님은 나에게 교육청에서 운영하는 청소년 전문상담 프로그램을 소개해 주셨다. 교육청에서 전문상담사를 선정해서 문제학생과 한 달 동안 심층상담을 진행하는 프로그램이었다. 학부모님의 동의가 필요하다고 했다. 나는 녀석의 아버님께 전화를 걸었다.

녀석의 아버지는 생각보다 담담하게 전화를 받았다. 마침 수원의 공사현장에서 집에 돌아온 참이라고 했다. 그간 몇 번의 전화에도 그저 잘 부탁드린다고, 내 자식이 어떤지 나도 잘 안다고, 내가 잘 돌봐주질 못하니 잘 맡아주시라고, 나에게 신뢰를 보내주신 분이었다. 내가 자초지종을 말씀 드리기 전에 이미 애한테 들었다고 하셨다. 말을 길지 않게 조용조용히 하시면서 선생님이 화가 많이 나셨겠다며 오히려 나를 두둔하셨다. 나는 이런저런 상황을 말씀 드리고 다음 날 학교에 잘 보내주시라는 말로 전화를 마무리 지었다.

그게 한 달 전이었다. 다음 날 나타난 녀석에게 나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이제 녀석과 어떻게 대화를 풀어가야 할지 자신이 없었다. 점심시간에 녀석을 불러 앞으로 상담프로그램을 운영할 거라고, 그 분과 잘 이야기해 보라는 말을, 아주 어렵게, 아주 사무적으로 전했다. 녀석은 내 앞에 서서,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고는 그 이야기를 다 들었다. 나도, 녀석도 별다른 말은 더 하지 않았다.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여기까지라고 했을 때, 녀석은 고개를 까딱 숙여 인사를 하더니 그대로 교실을 나갔다.

그러나 걱정과 달리, 녀석은 상담프로그램에 성실히 따랐다. 화요일 오후 7시에는 전화로, 금요일 오후 7시에는 버스로 20분 거리에 있는 사무실로 찾아가 직접 상담을 받는 일정이었는데도 녀석은 잘 따랐다. 화가 났던 마음이 의심으로, 의심이 걱정으로, 걱정이 기대로 점점 변해가던 한 달이었다. 상담 3주차에 녀석이 프로그램을 성실하게 따르고 있다는 확인전화를 받고 나서 나는 그동안 웅크렸던 마음이 좀 풀리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점심시간에 몇 번 녀석을 불러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상담은 힘들지 않으냐, 귀찮지는 않으냐, 가서는 무얼 하느냐, 요즘은 어떻게 지내느냐 등 무슨 대단한 이야기는 아니었지만 퉁명스럽게나마 녀석이 나를 피하지 않고 대답을 해 주는 것만으로도 나는 무언가가 조금씩 회복되어가는 느낌이었다. 그러다 이번 일이 터진 것이다.

이미 할 수 있는 건 다 했다는 생각이었다. 그 온갖 일들을 겪고 이제는 서로에게 신뢰가 생겼다고 여겼던 때였다. 사건은 11월 말에 치러진 과학 수행평가에서 시작했다. 수업시간에 과학실험을 하고 그 내용을 학습지에 적어 내는 평가였다. 모든 학생들이 과제를 제출했다. 물론 녀석도 제출했다. 문제는 다른 학생들보다 다른 한 가지를 더 제출한 것이었다.

녀석은 과학 수행평가 학습지에 가래침을 뱉어 제출했다. 수행평가를 하던 과학선생님은 두 번 접힌 그 평가지를 펼쳐보고 처음에는 놀랐고, 그 다음에는 당황했다가, 시간이 갈수록 수치심과 모멸감에 어찌 해야 할지 마음을 가누기 어려웠다고 했다. 교직 3년차로 나와는 발령 동기이기도 했다. 교과와 교무실이 달라 깊이 친하지는 못했지만 오가며 서로 반갑게 인사하는 사이였다. 아이들에게 친절하고 가르치고 싶은 열망도 큰 사람이었다. 수업이 끝나기 5분 전에 사탕을 걸고 내는 과학퀴즈로 학생들에게 재미도 있고 공부도 되게 하는 선생으로 나름 인기가 많았다. 남교사들도 지내기 만만치 않다고 하는 남중에서 강단이 있으면서도 재치있게 학생들을 잘 대하는 편이었다. 그랬던 사람이라도 이런 상황에서는 발치가 무너지는 느낌을 어쩔 수 없었을 것이었다. 당연한 일이다. 누가 그러지 않을까.



과학선생님은 녀석의 학습지를 다시 접어놓고 3일을 고민했다고 했다. 그러다 그냥 낙제점을 주고 자신이 직접 지도를 하는 것으로 그렇게 끝낼 일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선생님, 그러니까 얘는...아니, 어떻게든 뭔가 더 조치를 해야 할 거 같아요.”

“아, 네. 선생님... 잘 알겠습니다. 제가 분명하게 지도 하겠습니다.”

“아니 그게... 얘한테 당한 선생님들이 다 여선생님이신 건 알고 계시죠?”

“아, 네, 그게...”

“유난히 여자선생님들한테, 그것도 점점 더 심하게 이렇게 하는 건 이건 정말 문제가 있어요. 얘 같은 경우는 정말...”

과학선생님이 더 날선 말들과 감정을 애써 참는 모습이 보였다. 그 마음이 고마우면서도 미안했다. 과학선생님 말씀이 맞았다. 녀석은 유난히 여선생님들한테만 그렇게 모질게 굴었다. 남자 체육선생님이나 남자 기술선생님한테는 그렇게 행동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남자선생님들하고는 대부분 사이가 좋았다.

나는 정말 죄송했지만, 한편 그렇게 당황하지는 않았다. 지난 1년여 녀석과 함께한 일들을 보면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 때문이기도 했지만 내심 기대하는 바가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는 정말 오랜 시간과 대화와 감정을 거쳐 만든 약속이 있었다. 반성문이었다. 우리가 합의한 ‘갈등을 해결하는 방법’이었다.

“반성문을 쓰자. 공책 반 쪽만. 이건 해 줄 수 있지?”

“네. 뭐, 그 정도는...”

무언가 네가 잘못한 일이 있으면, 마음을 담은 반성문 정도는 쓰자. 일주일 전 점심시간에 만났을 때 내가 했던 제안이었다. 녀석의 조건이 있었다. 자기가 보기에 잘못한 것에 대해서만 그렇게 하겠다고 했다. 당연한 일이라고 했다. 네가 인정하지 않는 잘못에 대해 내가 그런 요구를 할 일은 없을 거라고 했다.

물론 그것만으로 과학선생님께 진정한 사과가 될 리는 없겠지만, 글쎄, 교육적으로도 이게 맞는가 싶은 의문도 여전하긴 하지만, 여기까지 오는 데만도 정말 어렵고 힘들었다. 마음이 담긴 반성문을 공책 반쪽 이상만 써서 전달하는 것. 이것만 해도 일단은 내게 대단한 일이었다.

교실에 갔다. 녀석이 있었다. 친구들과 무슨 이야기를 웃으며 하고 있었다. 녀석을 불러냈다. 일단은 교무실로 함께 가자고 했다.

“응, 그냥 선생님이 물어 보고 싶은 것이 좀 있어서.”

웃으며 별일 아니라는 듯이 말했다. 나의 말이 녀석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틀어지게 해서 녀석이 그냥 학교를 나가버리게 하는 일은 없었으면 했다. 어디에든 일단 녀석을 의자에 앉히는 것이 필요했다. 5층 교무실의 내 자리 옆에, 내가 출입구를 등지고 나보다 안쪽의 자리에 의자를 놓았다. 내심 마음에 걸렸던 건, 여기까지 오는 데에도 녀석이 이상하리만치 긴장하는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녀석은 순순히 자신이 한 행동을 인정했다. 그리고 자신이 잘못했다고도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녀석의 얼굴은 전혀 잘못을 한 사람의 표정이 아니었다. 녀석의 무덤덤한 표정에 오히려 내가 당황했다. 그리고 그 태도가 나를 더 불안하게, 또 화가 나게 했다. 나의 시선을 피하는 녀석을 똑바로 쳐다보며, 나는 엄하게 말했다.

“우리가 한 약속을 지키자. 반성문이야. 마음을 담아서, 반쪽만 쓰자.”

나는 녀석에게 반성문과 펜을 주고 지켜보았다. 떨떠름한 표정으로 반성문을 보던 녀석은 펜을 잡더니 글을 쓰기 시작했다. 한 줄이 채워지는 걸 보던 나는 마음이 놓여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녀석의 아버지와 전화를 하기 위해 복도로 나섰다. 아버지와의 대화 내용을 녀석에게 들리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게 교무실 앞 복도 창가에 서서 휴대폰 너머로 전화기 신호음을 듣고 있는데 갑자기 교무실 문이 벌컥 열리고 나오는 녀석이 보였다.

“너, 어디가?”

“집에 가는데요.”

“반성문은 다 썼어?”

“다 썼는데요.”

그 말을 남기고 녀석은 돌아서서 천천히 복도를 걸어나가기 시작했다.

도무지 반성의 글을 다 쓸 수 있는 시간이 아니었지만, 당황한 나는 교무실에 들어가 반성문을 먼저 보았다.

‘잘못했어요. 앞으로 안할께요.’

반성문에 적혀 있는 것은 그게 다였다. 그걸 확인한 순간 나는 아찔해져서 정신을 차리기가 어려웠다. 그리고 나는 돌아서 녀석을 좇아 달리기 시작했다. 교무실을 나서자 복도 끝으로 녀석의 모습이 보였다. 녀석도 나를 보았다. 녀석의 걸음도 점점 빨라졌다. 5층에서 1층에까지 달려가서야 나는 녀석을 찾을 수가 있었다. 나는 녀석의 교복 와이셔츠를 움켜 잡았다.

그러나 내가 정말 참담했던 것은 그 다음이었다. 녀석을 5층의 교무실로 끌고와서 다시 자리에 앉혔지만, 나는 부들부들 떨리는 몸을 도무지 진정할 수가 없었다. 정말이지 말 한 마디를 듣다가, 말 한 마디를 내뱉다가 걷잡을 수 없는 감정이 솟구쳐서 나를 통제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나는 학년부장님께 잠깐만 녀석이 어디 못가게 붙잡아 주시라고 부탁을 드리고 교무실을 나왔다.

창문을 열었다. 12월의 차가운 공기가 흘러 들었다. 추위 때문인지 흥분 때문인지 몸은 여전히 떨렸지만 그렇게 서서 심호흡을 좀 하고 나니 마음이 좀 가라앉는 것 같았다. 아버님께 전화를 드렸다. 이번 일 만큼은 아버님이 어디에 계시든 셋이 직접 얼굴을 보고 이야기를 좀 나눠야 할 것 같았다. 아버님이 전화를 받았다. 최대한 숨을 고르며 오늘은 꼭 학교에 오셔야 할 거 같다고 말씀을 드리려던 때였다. 갑자기 교무실 문이 열리며 학년부장님이 다급하게 말했다.

“김선생, 아, 이거 저 자식이 진짜, 미쳤나, 지금 경찰에 신고를 했네.”

녀석을 자리에 앉히고, 내가 복도로 나가고, 상황이 좀 진정되는 것 같아서 부장님이 무슨 공문을 보고 있는 사이에 녀석이 전화를 했다는 것이었다. 지금 학교에 감금되어 있다고, 선생님들한테 폭행을 당하고 있다고, 그러니 빨리 구해달라고 했단다. 녀석이 전화를 한 걸 안 것은 이미 녀석이 이런 말들을 해 버린 뒤였고, 녀석의 전화를 중간에 뺐는 것이 오히려 경찰에게 더 이상하게 여겨질 거 같아서 부장님은 어쩌지 못했다고 하셨다.

“아버님. 오늘은 정말 학교에 꼭 오셔야 할 거 같습니다. 아드님이 경찰에 저를 신고했다고 하네요. 오늘 저녁에, 늦더라도, 꼭 와 주십시오.”

녀석의 아버님 전화가 아직 끊어지지 않은 상태였다. 나는 손으로 가렸던 전화기를 들어 아버님께 말했다. 전하기 너머로 아버님의 한숨이 들렸다.

얼마 후, 경찰관이 도착했다. 교무실을 찾은 경찰은 녀석의 이름과 전화번호를 확인하고 나서 어떤 상황인지 설명을 요구했다. 나는 무슨 말을 할 기운도 나질 않아서, 녀석의 몸에 어디 멍이라도 하나 있는지 경찰관님이 확인해 보시라고 항변하듯이, 그러나 힘 없이 말했다. 옆에 있던 학년부장님이 오시느라 고생하셨다며 웃으며 맞이한 뒤에 나 대신 이야기를 전했다. 뒤 따라 들어왔던 경찰은 교무실을 한 바퀴 돌아본 후에 이미 나가버린 뒤였고, 교무실에는 설명을 요구했던 경찰만이 남아 있었다. 50을 이제 막 넘긴 듯한 그 경찰관은 아마도 그럴 것 같았다고, 요즘 심심찮게 이런 신고가 오는데, 신고가 접수되면 일단 무조건 출동을 해야 해서 온 거라고 말했다. 그리고는 여전히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고 몸을 뒤로 뉘인 채 앉아 있는 녀석의 얼굴과 몸을 훑어 보고는 말했다.

“어이, 학생. 어디 맞은 데 없는 거 맞지? 음... 뭐, 괜찮네.”

녀석은 경찰관의 말에도, 녀석의 얼굴을 확인하는 경찰관의 손길에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경찰관이 말했다.

“그럼 아무 이상 없는 것으로 확인하고 저희는 돌아가 보겠습니다. 그래도 일단 학생은 집으로 돌려 보내시고 학부모님과 전화하시고 학생을 지도하시는 게, 오늘은 일단 그렇게 하시는 게 좋을 거 같습니다. 그럼 수고하십시오. 고생이 많으십니다.”     

그날 저녁 8시였던가, 교무실을 찾아온 아버님 앞에서 나는 울어버리고 말았다. 다 큰 사람이, 그것도 선생이라는 사람이 가르치는 아이 때문에, 그것도 그 아이의 아버지 앞에서 눈물을 보인다는 게 바보같고 모자라 보인다고 나도 그렇게 생각했지만, 도저히 어쩔 수가 없었다. 아버님께 죄송하다고, 죄송하다고, 더 이상은 아드님 마음을 받아주기가 너무 힘들다고, 저는 여기까지인 것 같다고, 정말 죄송하지만 더는 못하겠다고, 가슴에 그냥 담아두기에는 도저히 참을 수 없어서 그 말을 하는데, 눈물이 났다. 눈물을 보여 죄송하다고 말씀을 드리면서 또 눈물이 났다. 두툼한 손에, 건장한 체격에, 듬성듬성 정리되지 않은 수염에, 검은 가죽잠바를 입고 오신 아버님은 내 앞에 앉아 손을 모으고 잠자코 이야기를 듣기만 하셨다. 오늘은 제가 좀 힘이 들어서 더 말씀을 나누기 어렵다는 말로 내가 대화를 마무리 지었을 때도 아버님은 끝내 내 눈을 보지 못하셨다. 교무실을 나서기 전에 정말 죄송하다는 말씀만 한 번 남기고, 녀석의 아버님은 교무실을 떠났다.




오늘 고생했다고, 오늘은 그냥 아무 생각 말고 얼른 퇴근해서 쉬라고, 부장님이 몇 번 그렇게 말씀을 하셨지만, 나는 걸어나갈 힘도 추스르기 어려웠다. 술 한 잔 하자는 부장님의 말씀을 물리치고, 이런 날은 술 한 잔 해야 한다고 몇 번이나 거듭되는 부장님의 말씀을 오늘은 정말 너무 힘들어서 안되겠다고, 내일 꼭 사주시라는 말로 겨우 돌려 보내고, 나는 텅빈 교무실에 남아 그냥 멍하니 앉아 있었다. 부장님이 기운 좀 내라며 끓여준 커피는 이미 차갑게 식은 지 오래였다. 멍 하니 정신을 놓고 있는 사이에 문득문득 떠오르는 생각은 이런 것이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이제는 정말 어떻게 해야 할까...

“띠리리리리! 띠리리리!”

‘아버님인가? 이 시간에 누가? 부장님? 설마... 녀석인가?’

전화기에는 내가 모르는 번호가 찍혀 있었다.

“여보세요? 누구시죠?”

“아, 안녕하세요. 늦은 시간에 죄송해요. 저 윤** 상담사에요.”

녀석이 참가했던 청소년 전문 상담 프로그램의 상담사님이셨다. 하필 오늘이 그 프로그램의 마지막 날이었단다. 원래도 매주 한 번씩 전화를 주시고 이런저런 상황을 알려 주셨는데, 이번에 프로그램을 마무리하면서 나에게 전화를 한 것이라 했다. 오후에 전화를 했는데 내가 안받아서 지금 전화를 한 것이라 하셨다. 그래 그랬지...내가 전화를 받을 수가 없었다.

“선생님, 요새 그 친구 어때요? 박연수 학생, 잘 지내죠?”

“......”

멍 하니 있던 마음이 상담사님의 질문 하나에 다시 철렁, 내려 앉았다.

“상담사님... 사실은 오늘....”

나는 오늘 일어났던 일들을 상담사님께 들려주었다. 지난 2,3일 동안의 일들을 하나하나 복기하며 녀석의 말과 행동과 나의 말과 행동을 전했다. 차분하게 이야기를 전하려고 애썼지만 내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몇 번 흐르기도 했다.

애고, 저런, 어떡해요 선생님... 하는 말로 나의 이야기를 들어주던 상담사님은 내가 이야기를 끝내자 잠시 호흡을 고르더니, 내게 말했다.

“아...그랬군요. 아이고.... 실은 선생님께 말씀 드리려고 했던 이야기가 바로 그거였는데요...”

“네? 무슨 이야기요?”

나는 아무 생각 없이 물었다. 그리고 녀석에 관한 이야기, 나로서는 정말 감당하기 어려웠던 이야기를 들었다.

연수는 보기와 달리 자살충동지수와 폭력지수가 너무 높아 연수의 아버님과 함께 심층상담을 진행했는데, 오랜 대화 끝에 마침내 연수가 엄마 이야기를 했더란다. 아니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엄마에게 버림 받은 이야기였다. 연수의 부모님은 녀석이 5학년일 때 이혼하셨지만 별거는 그보다 2년 전부터 해 왔었다. 별거를 하신 지 1년여가 지난 어느 날, 두 아이를 키우는 것이 많이 버겁던 아버지와 아이를 그리워 하는 어머니와 아빠 보다 엄마와 살고 싶다고 하는 두 아이를 두고 고민하다가 아버지는 결국 두 아이 중 하나를 엄마가 키우는 것에 합의했다. 아버지나 어머니나 아이 둘을 모두 키우기에는 살림도, 자존심도 서로 허락하지 않았다. 연수는 누나보다 엄마를 더 따랐고 엄마랑 꼭 살고 싶다고 했다. 며칠에 한 번 엄마에게 전화가 올 때면 엄마한테 언제 오냐고, 나 좀 데리고 가라고 말하며 울기도 여러 번이었다. 원래도 장난 치는 걸 좋아하고 행동이 좀 과격해서 초등학교에서 선생님께 종종 혼나던 연수는 엄마가 집을 나간 후 그게 심해져서, 연수의 아버지는 초등학교에서도 여러 번 학교에 불려 다녔다. 연수보다 5살이 많은 누나는 동생과는 달리 별 탈 없이 학교를 다니는 조용한 여고생이었다. 그러다 마침내 그 날이 왔다. 연수가 초등학교 5학년일 때였다. 아침에 일어난 연수는 얼마 있지 않아 누나가 집에 없다는 것을 알았다. 연수는 아버지에게 누나 어디 있냐고 물었다. 니 엄마가 데려갔다. 아버지는 그렇게 말하고 나갔다고 했다. 연수의 엄마가 누나만 새벽에 깨워서 청주에 있다는 엄마네 집으로 데려간 것이었다.

“선생님, 연수한테 그런 일이 있었어요. 그런 아픈 일이 있어서 여선생님들한테 그렇게 대해 왔나봐요. 그래서...”

전화기 너머로 상담사님의 이야기가 더 이어졌지만, 내 귀에는 더 이상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녀석의 마음이 짐작 되면서도 녀석을 이해할 수 없었고, 녀석의 상황이 상상되면 가슴이 면도날로 베이듯 서릿하면서도 무너지는 내 마음을 어쩌지 못했다.

“... 선생님, 듣고 계세요?”

“아, 네. 상담사님. 그럼...어떻게 해야 합니까?”

“네? 뭐라고요?”

“그럼 제가 연수를 어떻게 해야 합니까? 어떻게 해야 할까요?”

나는 정말 궁금했다. 그래, 그래서, 정말 이제 나는, 뭘 어떻게 해야 할까? 더 이상은 녀석의 마음을 헤아릴 힘이 내게는 남아 있지 않았다. 나는 겨우 이만큼밖에 안되는데, 나라는 사람의 그릇은 이 정도 밖에 안되는데, 도저히 더 넓어질 수 없는 시멘트 벽에 갖혀서 시멘트 벽을 손톱으로 긁어내리는 느낌이었다.

잠시, 조용했다. 전화기를 사이에 두고 얼마간의 고요한 시간이 흘렀다. 그리고 마침내 상담사님이 말을 이었다.

“선생님, 그 아이의 말과 행동을 보지 마시고, 그 아이의 존재, 그 자체를 사랑해 주세요.”

“...네?... 뭐라구요?”

나는 순간 치밀어 오르는 마음을 억누르며 겨우 말했다.

“아니요, 아니요, 그렇게는 못하겠습니다. 상담사님, 저는 그냥 선생이에요. 저는 예수가 아니라구요. 그러니까 제가, 어떻게 해야 하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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