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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찾다 Apr 16. 2021

['S] 사과

살다보면 각자의 사과 법칙이 생기는 법

“죄송합니다.”

신입 이 주임에게 자꾸 눈길이 간다. 이 일기장을 전해줄 때일까.



 누구나 자신만의 법칙을 만든다. 살기 위해. 유난히 완벽주의적 성격을 가진 나는, 실패와 그 교훈을 잊지 않도록 그 경험과 법칙을 법률화해 적어놓는데, 가장 중요한 법률 중 하나가 사과법이다. 사과는 가장 빨리 맞이하고, 평생을 실천해야할 법칙이기에. 


사과법

제1조 1항 모든 사과는 진심으로 미안함을 전한다는 전제를 포함하도록 한다.

...

...


 사과에는 필수불가결한 전제가 있다. ‘진심’이라는 전제.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사과라는 행위 자체를 전적으로 학습했다. 미안함의 감정이 있어도 사과는 또 별개의 문제였다. 내 안에서만 머무르면 안 된다. 그 감정들이 꾸역꾸역 힘들게 목구멍을 넘어 뱉어져야 하는데, 이게 참 쉽지가 않다. 그래서, 우리는 교육 받았다. 어렸을 적 아무것도 모른다는 얼굴로 언니의 머리를 헝클리면, 엄마는 언니에게 사과하라 하셨다. 물을 혼자 마시려는 언니를 쳐서, 언니의 앞니가 깨질뻔했을 때도 사과가 따랐다. 가끔은 조금 억울하더라도, 안에 조그맣게라도 남은 미안한 마음을 꺼내 보여주었다. 그렇게 용서하고 용서 받는 법을 배웠다. 


 하지만, 어째 배우면 배울수록 어려워지는게 사과였다. 20대, 고작 그 나이 먹는 동안에도 고집이 세지는 것인지, 사과는 좀처럼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가끔씩 내 마음을 동요시킬 다른 것에 기대어야 했다. 굳이 따지자면 주사에 가까웠는데, 술로 잠시 마음을 흐물흐물하게 만들어 놓은 다음, 저 아래 갇혀있던 말들이 나올 수 있게 했다. 여러 말들이 오고가고

“난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어. 다들 잘 돼서 우리 다 진짜 행복했으면 좋겠어.” 라고 마지막 저 아래의 진심까지 뱉고 나면 머리는 어지러울지라도 가슴은 후련했다. 다음 날 몰려오는 부끄러움은 보너스였지만, 그렇게라도 하는 사과는 청춘의 멋진 한 획이 되었다. 그렇게 나는 새로운 사과법 조항을 추가시켰다. 


제3조 2항 조금 부끄럽고 쑥스러운, 어려운 사과는 취기를 빌려서라도 표현한다.


 이렇게 늘 날 따뜻하게 만들었던 사과는 변하기도 했다. 이 사과는 또 딴판이어서 나를 울리곤 했다. 

 장담하건대, 2~40대 때 평생 할 사과의 90%는 아마 회사에서 할거다. 그렇게도 바라온 취직 후의 세상은 생각보다 더 어려웠다. 일정 조정을 까먹고는 뒤늦게 업체에 전화해 허공에 몇 번씩 고개를 숙이며 “죄송합니다.”만 연거푸 내뱉었다. 이럴 땐 부끄러움, 상대에 대한 미안함, 죄책감 등의 감정이 밀려왔다. 하지만 가장 혼란스러웠던 건 사과를 강요당할 때였다. 한 번은, 사수가 본인의 일을 잊고는, 부장님께 찍힐 위기에 처하자, 갑자기 나의 이름을 꺼내보였다. 

 “서현 씨한테 보고서 보내라고 했는데, 잊은 것 같네요. 제가 잘 얘기해서 교육하겠습니다. 죄송해요 부장님!” 

 얼떨결에 나는 난생 처음 들은 프로젝트에 대해 죄송하다고 고개 숙였다. 한 번이겠지 싶었으나, 이런 억울한 일은 꽤 일어났다. 매 번 사과를 하다 보니, 어느 순간 난 사과가 제일 쉬웠다. 아니, 난 쉬운 사람이 되어 있었다. 이미 구렁텅이에 빠진 나만 그걸 몰랐다. 어느 날 부장님이 다른 팀으로 옮겨 가시기 전, 친하지도 않던 나를 부르셨을 때야 알았다. 

“서현씨, 미안하다는 말 너무 많이 하지 마. 그럼 자꾸 사람들이 서현씨를 만만하게 보거든? 그럼, 어느 순간 모든 잘못이 오직 서현씨만의 몫이 돼버리는 걸 발견하게 돼. 사람들이 서현씨로부터 위로받게 하지 마.”


그 날, 내 일기장에는 눈물 자욱과 함께 별표 쳐진 예외 조항이 생겼다. 


*예외 조항 : 사과는 오직 나의 잘못일 때만. 잦은 사과는 나를 위험하게 만든다.


말도 안 되는 사수의 타박 후 돌아와 몰래 눈물을 닦는, 이 주임에게 사과법을 전해줄지 일기장을 서랍에서 꺼냈다 집어넣었다, 자리에서 엉덩이를 떼었다 붙였다 반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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