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에게

붕대감기 - 윤이형

은재에게

by 바지락


하지만 우리 이제 어른이잖아. 언제까지 무임승차만 하고 있을 수는 없으니까, 나는 최소한의 공부는 하는 걸로 운임을 내고 싶을 뿐이야. 어떻게 운전을 하는 건지, 응급 상황에선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 정도는 배워놔야 운전자가 지쳤을 때 교대할 수 있잖아. 나는 우리 모두가 버스 안에 있다고 믿어. 우린 결국 같이 가야 하고 서로를 도와야 해.“



작년에 처음 이런 의제를 접하고 쓰나미처럼 몰려들어오는 정보들을 향해 서핑보드를 탄 채 몸을 던졌던 건 단지 막연한 분노때문이 아니었다. 우리 모두는 성착취물에 분노하고 불법 촬영을 규탄한다. 그렇지만 모두가 코르셋에 대하여 이야기하지는 않는다. 궁금했다기보다는 공부를 해 보고 싶었다는 것이 더 가까운 표현인 것 같다. 항상 무엇인가 발언할 기회를 얻으려면 시덥잖지 않은 말이었어도 공부를 해야 했고 조사를 해야 했다. 이건 나에게는 무언의 규칙 같은 것이다. 아직도 항상 말하기 전에는 자료를 찾는다. 누군가가 강제로 제시하는 것보다 과시할 수 있는 정보는 훨씬 달고 매력적이다.

중학교 모의 토론에서 날라가지 않게 무거운 검정 천 필통 아래 눌러놓은 A4용지들은 그 요리의 재료이자 촉발제였다. 높이높이 쌓아온 내 자료들에 심지어 고대 말은 발가락이 3개였다는 것까지 쓰여져 있었지만 이것들은 내 데이터에 없었다. 어떻게 이럴 수 있지. 그제서야 내가 알고 있는건 사람들이 원하는 정보밖에 없다는 걸 자각한다. 그리고 그것이 수면 위로 드러나는 순간 숨겨진 빙하는 아무것도 아니었음을 깨닫게 되기 때문에 대다수의 기득권층은 당연히도 그를 숨겨야 했음을. 그 거대한 돌덩이 속에서 왜 자신의 임금이 45%인지, 사회가 화장을 권유하는지, 결혼을 독려하는지 깨닫게 된다. 왜 굽이 높은 구두를, 치마를 칭송하는지 마지막으로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다는걸 깨닫고 다시 중학교 2학년 10반의 모의토론현장으로 돌아간다.

자료 조사는 컴퓨터에 입력되는 것보다 먼저 내 뇌로 들어온다. 나는 항상 그 자료를 모두 외워 갔다. 종이 뭉치는 다른 친구들에게 공유하기 위함이었다. 선생님은 학급 모의 토론을 통한 주장피력과 언어 사고력이 어쩌고,, 향상 같은 거창한 학습 계획안을 부서에 제출했지만 아이들 말장난에 관심이 없었으며 남자아이들은 누구든 여자아이들이 입만 열면 누구나 처음 들을법한 욕들과 성희롱을 뱉었다. ( 지금 생각해보면 흘려 들을 수 있는 수준의 말이 아니었다. ) 남은 아이들끼리 토론을 진행했을때 토론 주제가 아니라 이 이야기를 꺼냈어야 했다고 아직도 후회가 남는다.

책에서처럼 우리는 이곳저곳으로 연결되어 있다. 원하든 원하지 않던 감정은 이곳저곳으로 튕겨 나가서 콩알탄이 되거나 경험치, 배터리가 되기도 한다.

서로에게 보내는 애정어리고 미숙한 감정들을 우리는 받아들이고 '상처입을 준비'가 되어야 한다. 수많은 열매의 단단한 껍질 속에 달디단 과즙을 기대하기보다는 그것들이 어떻게 아물고 감싸는지 견고함에 흠집을 꺾아내자. 뿌리를 파내는건 생긱보다 많은 끈기와 노력을. 용기를 필요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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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까지의 나를 부정하기도 하고 아니라고 믿고 싶지만 그걸 뱉는 순간에 내 솜털 하나까지도 오히려 내 생각이 잘못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데 이는 그만큼 이것이 복잡하고 어려우며 고심이 동반되는 순간이라는 거야. 달디 단 알사탕을 콩알탄처럼 쏘아 대던 우리는 서로에게 흠집 하나 내지 못했어.


충분히 상처받을 준비가 되지 못했던 너와 나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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