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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경빈 Feb 14. 2018

믿는 일

아는 게 아니라, 믿는 거야

위로는 어렵다.


 나는 낯짝이 너무 얇다. 싫은 내색 숨길 줄도 모르고 좋은 티도 팍팍 낸다. 내 나름대로는 안으로, 안으로 요즘의 막막함과 초조함 따위를 숨겨둔다는 것이, 다 겉으로 티가 났나 보다. 몸무게가 90kg에 육박하는 요즘인데도, 혈색이 안 좋다는 얘기를 듣는 걸 보니 나는 너무 무르다. 무거운 아령을 든다고 마음의 근력까지 저절로 생기는 건 아닐 테니까.


 힘들어하는 친구가 있으면 가서 위로해줘야 한다는 거, 초등학생 때야 당위성을 지닐지 몰라도 사실 그러기가 쉽지 않다. 우선은 내 코가 석자라 누굴 위로할 여유가 없기도 하고, 딴에는 위로한답시고 건네는 말이 오히려 상대방에게 주제넘는 얘기가 될까 걱정스럽기도 하다. 한편으론, '내가 뭐라고...'하는 생각도 들고. 예전에 썼던 시 중에, ‘종’이라는 시에서 이런 얘길 썼다. 


너는 알게 되겠지
다른 누군가를 위로하기는 쉽지만
정작 너 자신을 위로하기는 쉽지 않다는 것을
이 세상의 모든 종은
저 혼자서는 소리 내지 못한다는 것을

종 울리는 소리가 들린다
슬픔 하나 진다.


이 시를 썼던 게 스물 하나였으니까, 그때는 내가 나 스스로를 위로하기는 힘들어도 다른 사람들은 곧잘 위로할 수 있었나 보다. 지금은 나 스스로도, 다른 사람들도 위로하는 게 쉽지 않다. 위로에도 무슨 자격이 있어야만 하는 것처럼 느껴져서.   


그래서, 위로는 더 고맙다


 그래서, 예상치도 못하게 누군가가 나를 위로해주면 더 고맙다. 사람 일이라는 게 그 타이밍이 절묘할 때가 있어서, '나 좀 알아봐 줘!' 할 때는 마음 같지 않더니, '이제 그만할래...' 하고 포기하려 하니 누군가 또 응원을 해준다. 불쑥, 무슨 계기랄 것도 없이 그렇게 누가 나타나서 나를 알아봐 주고, 힘내라는 얘길 한다. 뜻밖의 위로가 신기해서 '누가 가서 나 좀 위로해주라고 부탁이라도 한 건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 정도로. 초라한 나에게 던진 응원이 마치 갑작스러운 선물 같았다. 선물은 역시 예상치 못했을 때 그 감동이 배가된다. 그 말 몇 마디가 고마워서, 한숨을 푹푹 쉬었다. 허기진 한숨이 아니라 속이 벅차서 나오는 한숨.


 아름이랑 소맥 한잔 하고, 우리 대학 생활이 고스란히 담긴 밤의 캠퍼스를 걸었다. 우리는 늘 그랬듯, 걸음마다 자분자분, 풍족한 추억들을 되새겼다. 힘들 땐, 홀로 곧게 서있는 일보다 서로에게 비스듬히 기대어 있는 일이 더 편안하다. 아름이는 내게 지금의 이 막막함이 결코 영원하지 않을 것임을 안다고 했다. 그러니 걱정하지 말라고.


‘아는 것’은 사실 ‘믿는 것’이다.


 사실, '안다'라고 할 수 있는 것들은 모두 과거의 것들이다. 경험적 지식으로, 겪고 나야 비로소 아는 것이다. 물론 겪은 바를 미루어 예측할 수도 있겠지만 그건 엄밀히 말해 ‘아는 것’이 아니라 ‘알 걸..?’ 정도 아닐까? 해서, 아름이와 내가 알고 있다고 말하는 것들은 사실 ‘아는 것’이 아니라 ‘믿는 것’이다. 우리는 잘 해낼 거라고, 이 막막함은 끝날 것이라고, 우리는 더 행복해질 것이라고.


 믿는 것은, 지난 10년 내내 우리가 가장 잘 해온 일이다. 사랑한다고 말한 후로, 아름이와 나는 무조건, 무한정 서로를 믿었다. 나라는 남자는 누가 봐도 잘난 것 하나 없고, 자갈길만 골라 걷는데도 아름이는 그 수많은 잘난 남자들을 놔두고 나를 사랑해주었다. 나도 모를 내 안의 가능성을 믿어준 거라고 할 수밖에. 


 그래. 일단, 믿고 봐야겠다. 새삼 페이스북 가입 때, 종교 란에 '사랑'이라고 기입했던 것이 생각난다. 완전하다는 신은 믿지 못하면서, 불완전한 한 남자 혹은 한 여자를 끝도 없이 믿는 일은, 사랑이 아니면 할 수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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