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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경빈 Feb 17. 2018

구슬 닦는 서른

친구들, 잘 지내지?

누가 구슬이 담긴 양철통을 엎질렀을까


 서른 즈음엔 학창 시절의 친구들, 대학 친구들 모두 한 달에 한 번 얼굴 보기가 쉽지 않다. 어렸을 적 모습을 회상해보면 도저히 가늠할 수도 없는 가지각색의 직업으로, 사회 곳곳에 흩어져 있다. 마치 유년기 내 방구석, 색색의 구슬을 고이 담아둔 양철통을 누가 엎지른 것 같다. 각자의 경로를 따라 굴러가버린 구슬들의 몇몇은 감사하게도 손 뻗으면 닿을 거리에 있지만, 또 몇몇은 장롱 밑 어둠 속에서 그렇게 각자 빛날 뿐이다. 친구들의 기억 속에 나는 어떤 구슬일까. 얼마만큼 가까운 곳에 있는, 또는 가까이 두고 싶은 구슬일까. 


 비유를 이어가자면, 나와 친구들이 양철통 속 구슬처럼 서로 맞대며 가깝게 지내던 시절엔 우리는 현실보다, 멀리 있는 것들에 대해 얘기하길 좋아했다. 막연한 미래와, 사랑과 우정, 꿈, 청춘이라는 푸른 멍과, 이십 대를 맞이한 설렘, 그 의미에 대해서 얘기하길 좋아했다. 양철통이 엎질러지고, 우리는 이제 서로 꽤 멀어졌는데 우리의 대화는 오직 현실과 가까운 것들로 가득 찼다. 취업과 학자금, 빚과 생계, 자아를 잠식한 자조, 저무는 이십 대에 대한 후회, 삼십 대의 무게, 또 그 의미에 대해서.


나이 서른에 글쟁이로 산다는 것


 군대에 있을 때, 그러니까 7년 전쯤 싸이월드에 썼던 글의 한 문장이 '결코, '그런 어른' 은 되지 않을 것이다.'였다. 꼰대, 자조적 소시민 뭐 그런 게 되고 싶지 않았나보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두려웠나보다. 그냥 되지 않으면 될 일을, 뭐가 그리 두렵고 불안해서 '되지 않을 것이다!'라며 선언하고 비장한 각오를 다지며 호들갑 떨었을까. 그것도 겨우 스물셋에.  정작 그 말을 좌우명처럼 되새겨야 할 요즘엔, '너무 철없이 살았던 걸까. 어른, 이라는 거 될 때가 되긴 한 걸까.'라는 고민을 한다. 제 때에 제대로 된 사람이기가 이리도 어렵다. 


 나는 군 휴학, 전과를 위한 휴학, 그냥 홧김에 한 휴학 등등의 이유로 스물여덟 8월에 겨우 대학을 졸업했다. 때문에 배우고 싶은 걸 배운다는 즐거움도 잠시, 4학년 졸업반 때는 정말 너무 외로웠다. 잘못한 것도 없이(아니다, 대학 8년 다닌 거면 잘못한 건가.) 후배들을 대하기가 미안했고, 막막한 국문학도의 미래를 실감하며 한없이 움츠러들어 있었다. 그렇게 불쌍한 고 학번으로 마지막 학기를 견뎌내던 어느 날, 길을 걷다 복학한 후배들을 만나 잠시 인사를 나눴다. 


 살갑고 편한 후배였다. 순수하게 반가운 마음에 “어!? 경빈 선배!”하고 나를 불렀을 것이다. 그런데 내 입에선, 나도 모르게 "부끄럽지 않은 선배가 되어야 하는데, 참.."이라는 말이 튀어나왔다. 국문학과로 전과했을 때만 해도 글을 읽고 시를 쓰는 것, 진심으로 사랑하는 여자와 오랜 연애를 하는 것이 내 자존감의 척도였는데 졸업 즈음엔 '돈벌이', '취직'이 자존감의 척도가 되어버린 탓이었다. 물론 그 착한 후배들은 전혀 그럴 생각이 없었을 것이다. 자격지심이란 바로 이런 것이구나, 절감했다.


 사실 답답해서 글을 쓴다.


 시도 아니고, 그렇다고 무슨 유려한 문장도 아닌 이딴 글을 쓰는 이유는 오직 답답해서다. 짧고도 허술했던 내 이십 대 동안 내가 몰두했던 것이라곤, 사랑과 글쓰기뿐이었으니까. 이십 대 내내, 고등학교 친구 중 가장 속 깊은 얘길 많이 나누는 ‘권‘과 통화를 하면 대화의 공백이 생길 때마다 서로 한숨을 쉬곤 했다. 그 사실이 우스워서 서로 또 한숨을 쉬고. 언제쯤 우리 대화의 공백이 한숨이 아닌 것으로 채워질까. 언제쯤 나의 새벽은 행복할까. 우리에겐 그것이 청춘의 가장 흔한 질문이었다. 


 친구 ‘권’은 스물아홉에 결국 대기업에 입사했다. 언론 쪽으로 진출하길 갈망했던 걸 알고 있어서, 대기업에 입사했다고 해서 ‘권’의 마음이 그저 후련하기만 하진 않을 걸 알지만, 그래도 나는 내 친구 ‘권’이 자랑스럽다. 쌍욕을 하고, 남 탓을 하고, 술을 퍼마시며 답답해하던 그 시기를 다 견뎌내고 결국 뭔가 해낸 것이다. 나는 답답해서 겨우 글을 썼고, 지금도 겨우 글을 쓰며, 겨우 생활하고 있다. 혹시 내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친구들에게, 내가 답답한 인간으로 보이지 않을까. 그런 걱정도 안 해본 것은 아니다. 


누군가는 구슬을 닦고 있다고


 그래도 나는 글을 쓰기로 결심했다. 아직까진 필력도, 인생의 내력도 얕다보니 누군가가 읽고 배울 만한 글을 적기보다는 내가 읽고 배워야 할 글이 훨씬 많다. 현재를 직시하며 미래를 내다보는 혜안보다는 과거를 곱씹으며 의미를 쫓아가는 일이 훨씬 잦다. 보통의 서른에게, 구슬 같은 건 분명 아무 쓸모없는 물건이겠지. 글을 쓰기로 결심한 덕분에 친구들을 그리워하며 구슬의 비유를 끌어다 쓴다. 오순도순 다정했던 구슬 양철통을 엎지른 것이 시간이라는 걸, 사실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이제 서른 즈음의 우리는 한때 구슬이었던 시절은 모두 잊고, 쓸모의 삶을 살기 위해 고군분투 중이다. 돈을 벌고, 결혼을 하고, 집과 차를 산다. 추억은 추억으로 남겨두기로 한다. 추억에게는 조금 바랜 색과 해진 옷, 적당히 쌓인 먼지가 어울린다고 믿으면서. 그래서 나는 어쩌면 쓸모없을 뻔한 글쓰기로 내 생계를 지으면서, 친구들에게 알려주고 싶다. 여기 누군가는 아직도 구슬을 닦고 있다고. 추억을 소중히 보살피고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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