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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경빈 Feb 23. 2018

'역지사지'라는 거

혼자서 여럿을 사는 일

 '앎'이 '삶'이 될 때까지의 시간차


 한 문장이 살에 닿고 난 뒤, 삶의 일부가 될 때까지의 시간차가 새삼, 멀다. 특히, '역지사지' 같은 것. ‘입장을 바꿔 생각해봐야 한다.’는 그 문장은 이미 오래전 유년기에 내 살에 닿았는데, 여태 온전한 삶의 일부가 되진 못했다. 의식하고 노력하지 않으면, 어김없이 나는 나밖에 모르게 되곤 한다. 남보다 내가, 나 스스로와 더 가까운 탓일까. 


 이십 대의 절반이 막 지났을 무렵이 되어서야 나는 아주 미약하게나마 부모님의 삶, 그 험준하고 장대한 산맥의 작은 오솔길 정도를 가늠해볼 수 있게 되었다. 문장이 아니라 삶의 일부로서, 그 역지사지는 지극히 일상적인 감각으로부터 다가왔다. 


아주 잠깐, 당신이 되어보는 일


 이런저런 아르바이트들, 가령 신문배달 같은 것을 할 때. 부족한 잠, 불규칙적인 식사, 쥐꼬리만 한 급여. 겨우 몇 달 동안의 반복에 지쳤을 때 문득, ‘아버지는 이보다 훨씬 더 고되고 즐겁지도 않은 일을 적어도 수십 년 동안 하셨던 거구나.’하는 생각이 드는 거다. 그런 생각이 들고 나서부터는 아르바이트 후 귀갓길 풍경이 괜히 서러웠다. 별 대단치도 않은 일을 하는 내가, 감히 퇴근길의 아버지가 된 것만 같아서.


 또, 아무도 없는 주방에서 달그락달그락, 식기들을 부딪혀가며 조촐한 아침을 준비할 때. 문득, ‘엄마는 매일 이 소리들을 혼자 들으셨던 거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 거다. 당신이 먹고 싶은 음식이 아니라, 가족을 먹여야 할 음식을 만들기 위해서. 그런 생각이 들고 나면, 혼자 앉아 먹는 밥이 막 외로워진다. 별 요리 같지도 않은 요리를 해 먹는 내게, 감히 주제넘는 그런 역지사지의 순간들이 밀려들곤 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10년의 연애가 사소한 것들의 역지사지를 온몸으로 부딪히며 익히는 과정이기도 했다. 연애라는 건, 일정 부분 서로가 되어가는 일이니까. 서로의 농도를 맞춰가는 일이니까. 연애 2, 3년째까지만 해도 정말 치열하게도 다퉜다. 내가 군 복무 중이었던 것도 큰 원인이었지만, 근본적으로 나는 너무 나밖에 몰랐다. 내 마음의 외벽은 폐쇄적이고 단단했고, 내 자의식의 농도는 나 혼자 너무 진했다.


 다행히도 지금은 그 아집으로 똘똘 뭉쳐 있던 마음의 외벽은 다 허물어졌고, 자의식의 농도는 묽어졌다. 기름과 물처럼, 해수와 담수처럼 닮은 듯 달랐던 우리의 존재는 이제 꽤 잘 섞인다. 서로 다른 별이었던 우리는 이제 하나의 다정한 마을 안에 있다. 역지사지가 습관이 돼서, 서로 텔레파시가 통하는 것 같은 일도 자주 있다. 


생활의 비유법, 혼자서 여럿을 사는 일


 나이 서른에 몸으로 부딪히고 부비며 배운 역지사지라는 건, 알고 보면 무슨 미덕이나 예의의 차원이 아니었다. 머리로만 이해한다고 되는 일도 아니었다. 겪으며 절실히 깨닫게 되는 생활의 영역. 요즘 우스갯소리로 역지사지를 ‘으로 랄을 해야 람들이  일인 줄 안다’는 말이, 표현이 거칠 뿐이지 사실 정답인 거다. 역지사지는 생활의 비유법에 능숙해지는 일, 혼자서 여럿을 사는 일이었다. 제 안에 여러 사람을 들여놓을 공간을 넓히는 일이고, 사랑의 부단한 연습. '너가 나라면'이 아니라 '내가 너라면' 이라고 자문해보는 일. 역지사지를 모르고서는 글 한 편조차 진심을 담아 쓸 수 없다는 것도, 이제는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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