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폭풍을 함께 견디는 일
서른이 되는 동안, 몇 번의 결혼식과 장례식에 다녀왔다. 별 생각이 없었는데 글을 쓰기 위해 계산해보니 결혼식보다 장례식에 다녀온 횟수가 더 많았다. 결혼식의 기억보다, 장례식의 기억이 더 선명했다. 문득, 쓸쓸한 길을 걸어온 기분이 들었다.
객의 입장에서 장례식은 결혼식보다 훨씬 번거롭고 조심스럽고 마음의 피로도가 높은 곳이었다. 성인이 된 후, 처음 혼자 장례식장에 가야 할 일이 생겼을 땐 급하게 장례식 예절을 찾아봤다. 결혼식 예절 정도야 뭐 실수 좀 해도 기분 좋게 웃으면서 넘어갈 수 있지만, 장례식은 실수가 곧 무례함이 되는 곳이니까. 옷차림도 결혼식보다 더 까다로웠다. 내게는 늘, 그냥 평범한 검은 정장이, 평범한 검은 양말과 구두, 검은 넥타이가 없었다. 급하게 정장을 빌려 입고 가거나, 어두운 옷들을 고르고 골라 입고 가기도 했다. 분향을 하고 고인에게 재배를 올리고 나면, 상주와 고인의 가족들에게 조문하는 일이 너무 힘들었다. 그냥 정해진 대사처럼 하라는 말들도 죄다 너무 문어체인데다가 어색했다. 나는 보통 상주와 맞절을 하며 표정으로 마음을 주고받기만 하는 편이었다. 그러고 나서 먹는 장례식장의 수육이나 육개장 맛은 늘 어딘가 비릿했다. 실제로 맛이 비렸다는 뜻이 아니라, 뭔가 ‘생의 비릿함’ 같은 것이 자꾸 목구멍에서 울컥했다. 그렇게 장례식장을 빠져나오면 발뒤꿈치에 그림자처럼 따라붙는 씁쓸함이 며칠을 갔다.
연세 지긋하신 어르신들이 고인인 장례식 외에도 동갑내기 친구, 사촌 형 정도 되는 나이대의 장례식에도 가본 적이 있다. 특히 부모보다 먼저 세상을 뜬 자식의 장례식장은 견디기 힘들 만큼 슬픔이 휘몰아쳤다. 부모가 울부짖는 울음에, 빈소에 차려진 촛불들이 헐떡이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이제 겨우 서른에, 겨우 몇 번의 장례식 조문 기억이 이런 탓에 앞으로 더 많이 가야 할 장례식들이 결코 익숙해질 것만 같진 않다. 애초에 타인의 죽음과 슬픔 앞에서 태연해지는 일이 이상한 일이긴 하지만.
그렇게, 결혼식보다 장례식을 더 자주 갔던 지난 10년이지만 정작 성인이 된 후에 내가 우리 가족이나 친척의 장례식을 겪은 적은 없었다. 친할아버지와 친할머니 두 분께서는 내가 8살, 16살일 때 돌아가셨고 외할아버지는 얼마 전 팔순 잔치를 정정하게 해내셨다. 친척 분들 중에 돌아가신 분이 계셨지만 이러저러한 이유로 내가 참석하지는 않았다. 해서, 나는 성인이 된 후에 고인의 가족으로 조문객을 맞는, ‘성인의 장례식’을 겪어본 적은 없다. 그리고, 할 수만 있다면, 평생 겪어보고 싶지 않기도 하고.
한 달쯤 전, 가장 친한 대학 동기 J의 조부상이 있어 영락공원으로 조문을 간 적이 있다. 일이 있어서 같은 대학 동기인 여자 친구와 낮에 조문을 갔는데, J의 가족 친지 분들이 많이 계셔서 조문객은 우리뿐이었는데도 빈소가 북적였다. J는 너무 슬프지 않은 담담한 표정으로 고인을 보내드리는 일련의 과정을 해내고, 친지분들께 조문하는 우리를 소개했다. 분향부터 재배까지, 조문의 통상적인 과정을 마치고 J와 우리는 위층 식당으로 가서 간단히 음료수를 마셨다. 우릴 생각해서인지 끝까지 담담한 모습이, 나와는 다른 ‘어떤 어른’의 모습 같았다. 어쩌면 고인의 가족으로서 장례식 절차를 밟는 것도 사람이 성숙해지기 위한 통과 의례 중 하나인 걸까.
그리고 일주일 전, J를 포함한 동기 몇 명과 함께 울산에서 거하게 술을 마셨다. 이런저런 얘길 하다가 결혼하면 애는 몇이나 낳을 거냐, 친척 많은 것보다 적은 게 낫지 않겠냐, 아니 그래도 외로운 것보단 복작복작한 게 좋지, 뭐 이런 서른 즈음의 주제들로 이야기는 넘어갔다. 잠자코 이야기를 듣고 있던 J가 불쑥 이런 얘길 꺼냈다.
“야, 내가 장례식을 겪어보니까, 장례식이라는 게 죽은 사람 위로하고 잘 보내드리는 것도 있지만, 산 사람 살자고 하는 일 같더라고. 사실 슬픔이나 후회 같은 감정들이 지금 당장 느껴지는 것보다 후폭풍이 더 무서운 법이잖아. 장례식 덕분에 친척들이 다 같이 모여서, 3일장이면 3일 내내 그 후폭풍들을 겪으면서 슬픔이나 후회를 다 털고 가는 거지. 산 사람들은 살아야 되니까.”
장례식, 고인을 보내드리고 기리기 위한 자리이기도 하지만 어쩌면 산 자를 위한 의식. J도 장례식 내내 할아버지에 대한 슬픔이나 후회, 그리움 같은 감정의 후폭풍을 삭이고 감내해냈던 거겠지.
꼭 누가 죽는 일이 아니더라도, 멀어지고 잊히는 이별은 우리 삶의 기본 옵션이다. 태어나는 순간 죽음이 기본 옵션으로 딸려 왔으니까. 꼭 장례식이 아니더라도, 이별 후에 후폭풍을 견디는 나름의 의식을 치르는 것도 보통의 기본 옵션일 것이다. 미워하고 원망하다가, 오히려 후련해하기도 하고, 어느 새벽엔 술에 취해 “자니..?”같은 메시지를 던져보는, 그런 지루하고 일관적인 레퍼토리가. 조금 덜 주책스럽고, 덜 후회스러운 방법들이 있을지는 몰라도 누구나 각자의 방식으로 이별의 후폭풍을 겪는다.
J의 말을 들으면서, ‘사람이란 결국 스스로가 스스로를 괴롭히고, 다시 스스로를 구원하는 존재’라는 생각이 들었다. 생의 모든 슬픔과 좌절과 우울 앞에서(심지어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앞에서조차도), 사람은 저 스스로 살아갈 방도를 찾기 위해 운다.
다른 한편으로는, ‘사람이란 결국 마지막 이별의 후폭풍을 떠넘기며 떠나는 존재’라는 생각도 들었다. 생이 끝난 뒤의 일은 산 자들이 알 수 없으니 고인이 저승에서 얼마나 괴로운 후폭풍을 겪을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이승에서는 고인이 이승에서 살았던 후폭풍을 산 자들이 떠맡으니까. 서로가 서로의 후폭풍 속에서 울고 위로하면서, 금세 잊지는 말자고 다짐이라도 하는 걸까. 잊고 지내던, 떠나버린 사람들을 다시 떠올려본다. 뒤늦은 후폭풍이 나를 조금은 사람답게 해주지 않을까, 해서.
이 글은 칸투칸 8F에 최초 기고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