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경빈 Mar 08. 2018

고독사

찾아주길 바라는 숨바꼭질처럼

 내가 초등학생이었을 때만 해도 스마트폰 같은 건 없었고, 그나마 핸드폰도 중고등학생쯤 되어야 가질 수 있었다. 동네 오락실이나 PC방이 성업 중이긴 했지만 용돈도 넉넉하지 않은 탓에 주로 친구들과는 야외에서 뛰어놀았다. 축구나 농구도 자주 했지만, 가끔 공도 없고 사람도 몇몇 안 모였을 땐 종종 숨바꼭질 놀이를 하곤 했다. 술래가 되면 어디 벽이나 전봇대에 기대어 눈을 가리고 "꼭꼭 숨어라, 머리카락 보일라."를 몇 번 외쳤다. 숨기 위해 달려가는 다급한 발들의 방향을 가늠하려 귀를 기울이면서, 가끔 몰래 뜬 실눈으로 가볍게 달려가는 발목들을 쫓아가기도 하면서. 친구들이 다 숨고, 문득 뒤통수 너머로 어색한 고요함이 착, 가라앉으면 뒤돌아서 아이들을 찾아다녔다. 빨리 찾아내고 싶었다. 형사나 탐정이 된 것 같은 묘한 흥분감도 일었다.


 그러나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버리면, 처음과는 다른 이유로 친구들을 찾아내고 싶어 졌다. 그 당시엔 그 감정을 지루함이나 짜증 정도로 느꼈지만, 그건 분명한 고독이었다. 몇몇의 숨어있던 친구들도 술래가 너무 오랫동안 찾지 못하면, 인기척으로 티를 내거나 아예 자리에서 일어나 스스로를 알리곤 했다. 그런 친구들도 그 당시의 말로는 "너무 못 찾으니까 재미가 없다. 다시 하자."라고 말하면서 담벼락 뒤에서, 미끄럼틀 아래에서, 스탠드 천막 위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그 친구들도 아마 고독했던 것이다.


 이 나이가 되어서 돌이켜 생각해보니, 숨바꼭질 놀이란 건 결국 고독한 사람들의 놀이인 것이다. 너는 나를 찾고, 나는 너를 기다린다. 아이러니하게도 들키기 위해 숨고, 찾아내기 위해 숨을 시간을 준다. 누군가가 애타게 나를 찾고 있다는 사실은 얼마나 큰 위로인가. 마찬가지로, 내가 찾아 헤매는 누군가가 저기 어디쯤 있을 것이라는 확신은 그 방황을 얼마나 즐겁게 만들어 주는가. 서로가 서로의 고독을 달래는 일인 줄도 모르고, 우리는 서로 숨고 또 찾았던 것이다.


 그러다 보니, 너무 오래 서로를 만나지 못하면 숨바꼭질 놀이의 의미가 사라지고 만다. 서로의 고독을 달래야 하는데, 이래서는 너무 고독해서 견딜 수가 없는 것이다. 결국 하나 둘, 자진해서 자신을 알린다. 왜 이렇게 못 찾느냐고(또는 왜 그렇게 꽁꽁 숨었느냐고) 괜한 핀잔을 주면서. 그런데 그렇게 털고 일어났더니, 아무도 없다면? 숨어있는 친구들도 없고, 술래도 없다면? 고독의 한가운데에서 나 혼자라면.


 중장년층, 노년층의 고독사가 사회 문제로 대두된 건 이미 꽤 예전부터 있어 왔던 일이고, 만성적인 청년 실업에 청년 고독사 기사도 가끔 눈에 띈다. 몇 년 전, 20대 여자가 고시원에서 고독사 했다는 기사를 읽은 적도 있다. 기사에서 다루는 원인은 가난이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언어치료사로 일하던 그녀는 가난했다고 한다. 가난해서 월세가 밀렸고, 보증금도 월세로 다 깎아먹었다고 한다. 집에는 죄송스러운 마음에 말씀도 못 드렸다고 한다. 


 술래가 더 이상 찾지 않으면, 끝까지 숨어있는 자가 술래가 되어 버린다. 그곳에서 나오지 않은 채로 고독을 뜯어먹으며 지내다 보면, 세상에서 잊히고 만다. 잊히다 보면 기어이 죽어버려도 아무도 알지 못한다. 일생이 다 져버리고도 몇 주가 더 지나서, 고독도 썩어서 악취를 풍길 때가 되어서야 누군가 오래된 그 방의 문을 여는 것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