툭툭, 끊어지는 무심한 맛
사람이란 참 간사하다. 폭염을 견디던 때에는 얼른 여름이 끝나길 바랐는데, 막상 아침저녁으로 선선한 바람이 불기 시작하니 뭔가 아쉽다. 아, 물론 폭염이 아쉽다는 건 아니다. 기껏 샤워하고 나와서는 신발장에서부터 땀이 줄줄 흐르고, 매일 새벽마다 땀에 젖은 채로 비몽사몽 에어컨을 켜는 번거로움이 아쉬울 리가 없다.
다만, 한여름이라야 제 맛을 즐길 수 있는 음식들이 뒷전으로 물러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였다. 더구나 나는 즐기는 음식의 종류가 매우 한정적인 ‘편식왕’ 아닌가. 아무래도 그런 아쉬움이 조금 더하지 않을까. 쨍한 햇볕이 바람을 미지근하게 데우고 아직은 여름의 흔적이 남아있을 때, 여름 별미를 하나라도 더 먹어둬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그런 이유로, 오늘 점심은 막국수.
출처 : 한국관광공사 홈페이지. http://www.visitkorea.or.kr/intro.html
내가 졸업한 대학교 근처에 모던하고 깔끔한 곰탕 가게가 있다. 꼬리곰탕과 한우곰탕이 메인인데, 여름 한정 메뉴로 막국수를 팔고 있었다. 막국수를 먹으려고 굳이 곰탕 전문점에 간 건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정작 막국수를 먹자고 드니 ‘막국수 전문점’이 없었다. 이곳이 부산이라 그런 탓도 있겠지만 밀면 전문점, 칼국수 전문점, 잔치국수 전문점 다 있는데 막국수 전문점만 찾기가 어려웠다. 스물셋에 무전여행으로 춘천에 갔을 땐 있었는데. 아무튼 그런 이유로 ‘곰탕 가게 막국수’를 먹게 됐다.
그곳은 건물 전체가 곰탕 가게인데 1층은 주차장, 2층과 3층이 가게 내부로 지어진 필로티 구조다. 주차장 입구 한쪽에는 주차 관리인의 아담한 사무실(?)이 있다. 손님이 몰리는 점심시간이면 그 사무실은 늘 비어 있다. 발레 파킹까지 책임지는 주차 관리인이 정신없이 주차장을 누벼야 하기 때문이다. 2층과 3층은 천장이 높고, 벽면은 대형 유리로 지어 탁 트인 기분이 든다. 딱히 뷰라고 부를 만한 건 없지만, 대학교 캠퍼스와 교차로가 훤히 보이긴 한다. 나는 2층의 창가 쪽 자리에 앉아 막국수를 주문했다.
글루텐 덕분에 인장력을 갖는 밀반죽 면과 달리 막국수의 면은 다량의 메밀에 전분과 밀가루를 섞어 빚은 반죽을 쓰기 때문에 면을 길게 늘이기가 어렵다. 흔히 ‘수타 짜장면’ 달인이 반죽을 치대며 마술처럼 국수 가락을 늘리는 작업이 불가능하다는 뜻. 때문에 막국수는 반죽을 국수틀에 넣은 다음 누르는 압출식으로 면을 뽑는다. 흔히 막국수의 도시라고 부르는 춘천의 ‘막국수 체험 박물관’ 외형이 나무 국수틀인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그래서 막국수의 면은 밀면이나 냉면의 쫄깃한 면과 달리, 무심하게 툭툭 끊어진다. 혹자는 그것이 너무 심심하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리고 사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출처 : 춘천막국수체험박물관 홈페이지. http://tour.chuncheon.go.kr/tourinfo/sights/view/10020
하지만 그럼에도 막국수의 그런 심심하고 무심한 면이 생각날 때가 있다. 굳이 음식을 ‘씹는 일’까지 신경 쓰고 싶지 않을 때. 그냥 무심하게 씹어 넘겨도 괜찮고 싶을 때. 그 이름처럼 ‘막’ 먹고, ‘막’ 살고 싶을 때. 툭툭 끊어지는 막국수가 맛있기만 한 걸 보니, 오늘이 바로 그런 날이었나보다.
물론, 막국수의 이름에는 다른 이유가 있다. 면의 주재료인 메밀은 겉껍데기를 깐 뒤 가루를 내는데 지금 같은 분쇄기가 없었던 시절에는 겉껍데기 채로 대충 ‘막’ 갈아서 반죽을 했고, 그런 이유로 ‘막국수’라고 했다는 것이다. 진회색과 녹색이 오묘하게 섞인 면에 듬성듬성 메밀의 겉껍데기 흔적이 박혀 있는 것도 이렇게 막 갈아 만든 면이기 때문이다. 이러나저러나, 막 먹기 좋은 음식인 것만은 분명하다.
막국수도 시원한 육수로 더위를 식히는 여름 별미이긴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냉육수를 많이 붓는 것보다 작작하게, 약간 ‘물비빔’ 같은 느낌으로 먹는 걸 좋아한다. 부산 밀면의 맵고, 짜고, 달고, 신 ‘갖은양념’ 맛에 길들여진 탓인지는 몰라도 순수한 물 막국수는 좀 밍밍한 감이 있다. 물론 개인의 취향이니 어떻게 먹든 별 상관은 없겠다. 여름이 서서히 떠나가는 자리에서, 다행히도 막국수 한 그릇 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 꽤 만족스럽다.
국물의 벌건 양념까지 싹싹 비우고 한가롭게 창밖을 쳐다보고 있었다. 말한 것처럼, 딱히 뷰라고 부를 만한 게 없어서 하릴없이 주차장을 내려다보는데 눈이 번쩍 뜨일 만큼 멋진 차 한 대가 들어왔다. 깊고 영롱한 블루 컬러의 바디. 방금 막 뽑은 새 차인지, 아니면 막 세차를 하고 오는 길인지 여름 햇볕이 동해 바다에서처럼 어지럽게 반사되고 있었다. 나는 차종까지는 잘 모르지만, 로고를 보니 벤틀리였다. 대충 몇 억쯤 하지 않을까. 운전석에선 30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여자가 한눈에도 고급스러운 민소매 원피스와 선글라스를 낀 채로 내렸다. 와, 저런 분도 점심땐 막국수를 먹는구나. 내 속에선 소시민의 치기 어린 자격지심이 솟구쳤고, 키를 받아 든 주차 관리인의 표정에선 긴장감이 역력했다.
출처 : 벤틀리 홈페이지. https://www.bentleymotors.com/en.html
바로 그 순간부터 약 10분 간, 주차 관리인은 그녀의 벤틀리를 4번이나 옮겼다. 그러니까 거의 10분 내내 주차장을 주행한 것이나 다름없는 수준으로. 주차 칸이 좌우로 비어있는 곳에 벤틀리를 주차했다가, 그 옆에 다른 차가 들어오면 다시 벤틀리를 몰아서 또 주차 칸이 좌우로 비어있는 곳으로 옮겼다. 혹여나 다른 차가 벤틀리를 긁을까, 아니 스치기라도 할까 노심초사하는 마음이었으리라. 시간은 아직 12시 40분. 한창 점심시간이었고, 차는 계속 들어왔고, 주차 관리인은 벤틀리에서 내렸다가 곧바로 올라탔다가를 반복했다. 그리고 결국 가장 안쪽에 마련된 대형 차량 전용 주차장에 벤틀리를 주차하고서야 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나도 모르게 그를 따라 한숨을 내쉰 걸 보니 소시민적 동지애를 느끼고 있었나 보다.
내 자리에서 벤틀리 그녀는 보이지 않았다. 아마 3층으로 갔겠지. 3층이 좀 더 뷰가 좋으니까. 뭐, 뷰라고 부를 만한 건 없지만. 혹시 모르잖아, 3층에선...? 그러고 보니, 왠지 막국수 말고 꼬리곰탕을 먹지 않을까. 막국수는 7천 원이고 꼬리곰탕은 2만 원이니까. 나도 저런 차를 몰 수 있을까. 아니, 사실 저런 차까지는 필요 없는데.
바닥이 훤히 드러난 막국수 그릇을 보다가 퍼뜩 정신이 들었다. 좀 편한 마음으로 여름의 끝을 즐기고 싶어 막국수를 먹으러 온 건데 이게 뭐람. 아무 생각 없이 막 먹고 싶어서, 점심을 먹는 동안만큼은 잠깐이나마 막살고 싶어서 온 건데. 갑자기 앞날이 막막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이게 다 곰탕 가게에서 막국수를 먹은 탓이다. 아무래도 다음엔 꼭 막국수 전문점을 찾아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