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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경빈 Mar 06. 2019

최선도 배신을 할까

최선과 최적에 대해

최선을 다하고도 실패하거나 패배하는 사람들이 많다. 나도 여지없이 그들 중 하나이고.


다리가 부러져도 학교는 가는 것이 학생의 본분이었던 시절이 있었다. 불과 십여 년 전이라고 하면 그리 먼 과거도 아니다. 어쩌면 지금도 그런 시절을 맹신하는 분들이 계실 것이다. 오직 최선만이 미덕이었던 시절을.


그런 분들에게 “최선을 다했는데도 실패했다.”는 명제는 성립하지 않는다. 실패는 그 자체로 최선을 다하지 않은 증거가 되고 마니까. 넌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하겠지만, 그렇지 않단다. 지금 네 꼴을 보렴. 최선을 다했다면 실패할 수 없어. 그렇게 최선에 대한 맹신과 무시무시한 순환 논증이 만나면, 더 이상의 언쟁은 무의미해지고 만다. 어떻게 해도 나는 최선을 다하지 않은 놈이 되어버릴 테니까. 모든 과정은 결과에 의해 평가되니까.


하지만 단언컨대 최선을 다하고도 실패할 수 있다. 최선을 다했지만 패배하는 경우는 허다하다. 올림픽이나 월드컵, 아니 자국의 흔한 스포츠 경기들을 보면 그 사실은 더욱 명백해진다. 저들 중 누가 최선을 다하지 않았겠는가. 그래도 결국 누군가는 승리하고 누군가는 패배한다. 그걸 두고 함부로 ‘최선의 배신’이라고 부르기엔 애매하다. 애초에 최선이라는 태도는 승리와 성공을 담보하지 않으니까. 


최선이 담보하는 것은 만족감과 당당함이다. 남들과 비교해 좌지우지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을 만큼의 노력을 더했는가에 의해 확인되는 것이다. 결국 최선이란 각자의 한계치까지 도달해내는 일이며, 최선을 다했다는 말의 진의는 정말 할 수 있는 만큼은 다했다는 것이다. 그러니 누가 폄하하거나 비아냥댄다 해도, 딱히 변명할 필요가 없다. 뭐 어쩌라고. 나는 최선을 다했는데. 


그런데 최선의 정체를 오해하면 뒤따르는 실패와 패배 때문에 괴로워진다. 만약 성공과 승리만이 목적이었다면 최선이 아니라 최적의 태도를 취했어야 한다. 얼핏 아이러니해 보이지만, 성공과 승리를 위해 반드시 최선을 다할 필요는 없다. 꼭 필요한 만큼의 노력을, 필요한 시기에, 필요한 방식으로 더하는 것. 그것이 바로 최적의 태도다. 거기에 더해 운까지 따라준다면 금상첨화. 


어떤 사람들은 최선과 최적이 꼭 들어맞아서 “그래, 저렇게 열심히 하니까 성공하지.”라는 말이 절로 나오지만, 또 어떤 사람들은 겉으로 보기엔 설렁설렁하는 것 같은데도 성공하고 승리한다. 바로 후자가 최선을 다하지 않고도 최적의 태도로 일을 성사시키는 경우다. 최선을 맹신하는 사람들은 특히 후자의 경우를 겪을 때 좌절한다. 세상이 불공평하고, 신조차 나를 외면했으며, 최선에게 배신당했다고.  


처음 말했던 것처럼 나 또한 최적의 성공보다는 최선의 패배에 익숙한 사람이다. 그걸 두고 누군가는 미련하다고 하고, 누군가는 우직하다고 한다. 구태여 성공 대신 패배를 선택하려던 건 아니고(당연히 나도 성공과 승리가 좋다. 실패와 패배의 맛은 언제나 쓰고 비리다.), 그저 타고난 기질이나 살아온 방식이 그런 탓이다. 하지만 최선을 다한 뒤에 가슴 가득 차오르는 만족감과 당당함은 분명 값지다. 누구에게든 “그래서 뭐 어쩌라고.”를 내뱉을 수 있는 자격이랄까. 


그러니까 사실 최선은 우릴 배신한 적이 없다. 다만 우리가 최선을 오해했을 뿐. 그렇다곤 해도 늘 ‘최선의 실패’나 ‘최선의 패배’만을 쫓고 싶지는 않다. ‘최선의 성공’이라든가 ‘최적의 승리’도 맛보고 싶다. 그렇게 말하면서도 결국 또 이렇게 최선의 무엇일 뿐인 글을 적고 말았다. 역시 사람은(설령 자기 자신이라 해도) 고쳐 쓰는 것이 아닌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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