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 소품집 13
1. 깊어지는 거리
가장 먼 거리는 보고 싶어도 볼 수 없는
지구 반대편이나 우주의 끝이 아니라
눈앞에 있어도 끝내 닿을 수 없는 한 뼘이다.
내달려도 소용없다는 걸 받아들이고
그 자리에 멈춰 서서 가만히 응시하는 눈빛.
그리움의 거리는 멀어지는 대신 깊어진다.
그 눈빛만큼 먹먹해진다.
2. 주장
건강한 주장은 근거 있는 주장,
존재와 분리되어 자가 진단이 가능한 주장이다.
병든 주장의 배면에는 근거가 아니라 두려움과 초초함이 깔려있다.
자신의 주장이 부정당하면 그 존재까지 부정당한다고 믿는 자들은
때때로 상대방의 주장이 아니라 상대방의 존재를 부정한다.
근거 없이 비난하고 헐뜯고 짓뭉갠다.
병든 자의 병든 주장은 주장이 아니라 발악이고 폭력이다.
3. 방과 밀실
‘나’라는 자아는 스스로에게 가장 안락하고 관대한 방이 된다.
세상이 두렵고 관계에 지칠 때, 사람은 자신의 방에 머물며 회복한다.
그러나 결국엔 수시로 문을 드나들고 창을 열어 환기해야 한다.
방과 밀실이 서로 다르듯, 머무는 일과 갇히는 일은 다르다.
밀실에는 아무도 노크하지 않는다.
4. 강박
정직은 미덕이지만 정직해야 한다는 강박은 괴로움이다.
배려는 아름답지만 배려해야 한다는 강박은 자신을 해친다.
친절도, 선행도, 사랑도 마찬가지다.
억지로 자신을 몰아붙이는 강박은 본래 의도를 해친다.
어떤 호의든 자신을 지킨 후에야 온전할 수 있다.
5. 단풍놀이
나에겐 곧 지나갈 한 계절이
저들에겐 이번 생의 전부다.
존재를 증명할 마지막 기회다.
그러지 않고서야 이 짧은 가을에
저리 열심히 붉을 수가 없다.
6. 무용함
절대 아무 쓸모없어야 한다는 마음으로
글을 쓰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무용한 것에 마음을 다하던 시절이었고요.
우습게도 그 시절의 그 마음 덕분에 나는 자랐습니다.
무용함이 나를 키운 셈입니다.
7. 표현
죽고 싶다고 외치는 동안 죽음은 서서히 멀어진다.
슬프다는 문장을 쓰는 동안 슬픔은 차차 잠잠해진다.
표현할 수 있는 절망은 결국 떨쳐낼 수 있는 절망이다.
8. 의지
의지할 수 있고, 의지해도 괜찮은
그런 사람이 곁에 머물러준다면
아무것도 견디고 싶지 않습니다.
스르륵 쓰러져서 무른 머리를 가만히 기대면
어른은 아이가 되고 악인은 속죄합니다.
가여운 사람은 다른 누군가를 가여워하고
오래 감춰온 부끄러운 속내를 털어놓게 됩니다.
진실로 의지한다는 건 진솔해지는 일입니다.
존재가 투명해지는 일입니다.
9. 반칙
농구의 자유투나 축구의 페널티킥을 볼 때마다
스포츠란 참 친절한 세계라는 생각을 한다.
반칙을 중재하는 심판의 명령에 따라
모든 선수가 치열한 경쟁을 잠시 멈춘다.
정지된 상황에서 공을 던지거나 발로 찬다.
공이 들어가면 군말 없이 점수를 내어준다.
반칙은 난무하지만 심판도, 자유투도, 페널티킥도 없는
이 삶에 비하면 스포츠란 얼마나 친절한 세계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