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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경빈 Dec 29. 2020

따뜻한 눈사람

금요 소품집 14

2020_11_13

 

1. 따뜻한 눈사람     

흩날리며 제각기 내려앉은 눈을 

애써 끌어모아 뭉치는 마음

뭉쳐서 형태와 표정을 만들고 

이름 지어 부르는 마음

하루아침에 녹아 사라질 끝을 알고도

체력과 심력을 잔뜩 기울이는 마음     

차가운 눈으로 만든 눈사람의 추억이 따뜻할 수 있는 건 

시린 손을 견디며 눈을 뭉치던 그 마음 덕분입니다.

     

2. 결번     

아무도 차지할 수 없는 순번

누구에게도 연결되지 않는 회선

중간이 끊긴 채 허공에서 멀쩡한 다리처럼

돌아가거나 뛰어넘을 수밖에 없는,

부재의 방식으로 존재하는 영역

     

3. 상상력     

상상력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능력이 아니다.

세심한 관찰의 기록들이 쌓여 

신비로운 화학 작용을 일으킬 때

상상은 확장되고 다채로워진다.

자세히 보아야 생생히 상상할 수 있다.

     

4. 듣는 사람     

철저히 읽고 쓰는 사람이었던 저는 요즘 듣는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마치 넘어져 상처 나는 일처럼, 들어야 말하고 쓸 수 있겠다는 생각도 합니다. 넘어지지 않으면 제대로 넘어지는 법을 모르듯이 듣지 않으면 제대로 듣는 법도 모르게 되겠죠. 넘어진 적 없는 사람은 다시 일어서는 법을 고민하지 않듯이 듣지 않으면 남에게 들려주는 방법도 고민하지 않게 될 것 같고요.

      

글쓰기와 독서는 저마다의 상처를 이야기하고 듣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건 넘어진 적 있다는 고백이고 다시 일어섰다는 증거입니다. 일부러 노력하지 않아도 자꾸만 넘어지는 날들. 듣는 사람이 되어 넘어지는 일을 두려워하지 말아야겠습니다. 다시 일어나 상처를 보듬는 이야기를 조심스럽게 해보겠습니다. 나의 말과 글이 누군가를 일부러 넘어뜨리는 건 아닌지 살피면서, 넘어졌다 일어선 사람이 하는 이야기에 귀 기울이면서.   

   

5. 무기력     

무기력은 아무것도 하기 싫은 감각이 아니라

가장 즐겁고 중요하다고 믿었던 일,

가장 사랑하던 일이 보잘것없다고 느껴질 때 찾아오는 감각이다.

무기력은 크고 무거운 이불이 되어 존재를 뒤덮고

사람은 그 속에서 웅크리고 앉아 막막한 어둠을 응시한다.     

무기력을 벗어나는 확실한 방법은

목적지가 없어도 이불을 걷어내고 방을 나서는 것이다. 

나아질 거라는 기대 없이도 무작정 움직이는 일이다.


6. 고독     

사랑은 고독을 몰아내지 못합니다.

우리는 함께 있어도 종종 고독할 겁니다. 

고독은 서로의 탓이 아니라 존재의 탓이니까.

그걸 인정하지 않으면 우린 고독에 패배할 겁니다.

더 고독해질 겁니다.     



2021년 1월호 일간 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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