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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강 Feb 21. 2016

엄마 딸이어서 고마워! -12

##  다시 초심으로

   

"마음이 아닌 머리에서 시작한 일은 언젠가 탈이 나기 마련이다. "



 느슨해도 너무 느슨한 여행이다. 보채지 않기로 한 여행이었지만 참새들 비위를 맞추다 보니 늘어질 대로 늘어져 버렸다. 여행이  늘어질수록 나는 조바심이 나고 신경이 날카로워져 미간에 보기 흉한 깊은 골을 만들었다. 마음이 아닌 머리에서 시작한 일은 언젠가 탈이 나기 마련이다.



 큰 참새는 콜카타의 날씨에 적응하지 못해 계속해서 기침을 하고 가래를 뱉어냈다. 몸이 약한 녀석이라 조금만 걸으면 힘이 들어 얼굴이 벌개지고 벌어진 입 사이로 거친 숨을 몰아 쉬었다. 그런 큰 참새를 기다리는 일은 오래가지 못했다. 욕심 많고 호기심 많은 에너자이저 작은 참새는 언니에 대한 불만을 토해냈고 나 또한 큰 참새를 기다리고 달래는 일과 작은 참새의 투덜거림에  조금씩 가시가 돋기  시작했다.

 오늘은 오후 4시 50분에 뉴델리행 기차를 타야 했다. 체크 아웃을 하고 60루피를 주고 배낭을 맡긴 후 숙소를 나섰다. 빅토리아 기념당을 보고 식사를 한 후 3시  30분까지는 시알다역 (Sealdah R.S.)에 가야 했다. 오늘의 일정이 무사히 즐겁게 잘 진행되기를 기도했다.


 콜카타는 1960년 영국의 동인도 회사가 콜카타에 거점을 조성하고 1911년 델리로 수도를 이전하기 전까지 서구 사상을 가장 먼저 흡수한 도시다. 서구문물의 흡수가 빨랐던 만큼 민족운동이나 종교개혁 등 사상의 발생지이기도 한  곳이라 곳곳에 콜카타의 역사를 거슬러 볼 수 있는 흔적들이 남아있다.

  따뜻한 짜이를 마시고 난 참새들과 빅토리아 기념당을 가기 위해 길을 나섰다.  지하철을 타기 위해 숙소에서 조금 걸어 나왔다. 지하철역으로 가는 길에 있는 인도박물관 담벼락엔 걸인들의 천막 숙소가 즐비하다. 더러는 인력거에서 담요를 덮고 잠을 청하는 이도 있다. 길 위에 서자 마자  달려들어 손을 내미는 걸인들을 만났다. 아기를 안은 여인도 있고 환한 웃음으로 토끼처럼 달려오는 아이들도 있다.

 처음 걸인을 만났을 때 작은 참새는 그들에게 어떻게든 도움을 주고 싶어 했다. 하지만 인도의 걸인들을 볼 때마다 적선을 하다가는 금세 주머니가 텅텅 빈다. 그래서 나름대로 원칙을 정했다. 하루에 20루피를 동전으로 바꿔 가지고 있다가 몸이 불편한 노인이나  어린아이에게 나눠 주기로 했다. 사지가 멀쩡한 젊은 사람들은 왠지 모르게 직업적인 냄새가 나기 때문이다. 원칙은 정했지만 주머니를 여는 것은 어디까니자 참새들의 몫이었다. 참새들이  아무 때나  주머니를 열까봐 은근히 걱정이 되었다. 그런데 주머니를 열 줄 알았던 참새들이 그들을 외면하고 바쁘게 걸음을 옮겼다.

 인도박물관 근처에 있는 PARK STREET역에서 빅토리 기념당과 세인트 폴 사원 근처에 있는 RABINDRA SADAN 역까지 일인당 5루피! 택시를 탈까 망설이다가 참새들의 느슨한 여행에 괜한 심술이 나서 '요 녀석들 오늘은 고생 좀 해봐라' 하는 마음에 지하철을 탔는데 일인당 5루피라는 말을 들으니 볼따구니에 물었던 심술이 잔뜩 부풀어 올랐다. 여름엔 많이 걸어 다닌 터라 지하철이 처음이라는 설렘으로 부풀어 오른 심술에 바람을 뺐다. 파란색 장난감 같은  동전 모양의 지하철 승차권을 끊고 지하철을 기다렸다.

 

 지하철 역내는 깨끗했다. 인도에서 처음 만나는 지하철이 신기해서 사진을 찍으려 했더니 장총을 찬 군인이 다가오더니 인상을 쓰며 찍지 말라고 제지했다. 알았다고 미안하다고 웃어놓고는 심장이 벌렁거렸다.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은 것 같은 낡은 장총의 차가움이 전해지는  듯했다.  

 지하철 안은 폭도 좁고 천장도 낮아 답답했다. 남녀 구분이 없어  빽빽한 승객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어린 참새들이 있으니 성추행이나 소매치기의 위험에 신경이 곤두섰다.  참새들에게 가방을 앞쪽으로 돌리고 여자들 앞에 서라고 일러 놓고는 나는 참새들 뒤에 다리를 벌리고 서서 방어벽을 쳤다. 어쩌다 인도 남자들과 눈이 마주치면 깊게 이글거리는 눈이 무서워 움찔했다. 그래도 쫄면 안된다 싶어 인상을 쓰고 야무지게 입을 악다물었지만 심장은 다시 제멋대로 뛰고 있었다.

 RABINDRA SADAN 역에 도착하여 개표구의 인식기에 달린 구멍 안에 넣으니 문이 열렸다. 우리나라는 개표구를 빠져나와 따로 설치된 반환기에서 승차권을 넣고  보증금을 받는데 인도의 지하철은 개표 인식기에서 바로 반환이 가능하니 편리했다. 1984년 인도의 콜카타에 처음 지하철이 생겼다. 솔직히 인도를 가난하고 더러운 나라라고 막연하게 알고 있을 때는 인도의 지하철을 상상하지 못했다. 막상 지하철을 타보니 어김없이 당하는 가방검사와 단순한 역내가 삭막함으로 다가오기도 했지만 깨끗하고 가격도 저렴해서 기대 이상으로 좋았다. 다음에는 10%  할인되는 충전식  스마트카드를  구입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인도를 또 오겠다고?'

 순간 나도 알 수 없는 나를 생각하곤 혼자 웃고 말았다.


 후글리 강과 초우 링 기 거리 사이에 펼쳐진 마이단 공원 안에는 타지마할을 연상시키는 돔 형식의 하얀 궁전인 빅토리아 기념당(Victoria Memorial)이 자리하고 있다. 1877년  인도 황제 겸임을 선포한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은  1905년 실제로 타지마할을 모델로 하여 조드푸르에서 공수한 순백의 대리석으로 16년에 걸쳐 빅토리아 기념당을 지었다. 지금은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는데 여왕이 어린 시절 사용했던 피아노를 비롯하여 역대 인도를 관리했던 총독의 초상화와 각종 미술품이 전시되어 있다.

 10시에 문을 여는데 30분 정도 일찍 도착하니 시간이 될 때까진 입장권을 줄 수 없다고  했다.  멀리 뿌연 콜카타의 하늘 아래 빅토리아 기념당이 보였다. 공원 입구에 총을 멘 군인 대여섯 명이 서 있었다. 양해를 구하고 공원에 들어가 기다려도 되냐고 했더니 "노 프라블럼" 이란 익숙한 대답이 돌아왔다.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울창한 공원 의자에 자리를 잡았다. 수많은 다람쥐들이 나무를 오르내리며 열매를 나르며 놀고 있고 피부병이 걸린 개들은 여유로운 모습으로 공원을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가끔씩 보이는 원숭이들도 몸을 비비며 장난을 치고 있었다.  철문 밖에는 입장 시간을 기다리는 인도 사람들이 삼삼오오 길가에 앉아 있었다. 마른 흙 위에 펼쳐진 평화로운 모습이었다.


 "불쌍하다"

느닷없는 작은 참새의 말이었다.

"인도에서 가장 행복한 건 동물들인 것 같아! 저 다람쥐들 좀 봐. 살이 통통하게 올라서 털에 윤기가 흐르고 잡기 놀이를 하는지 즐거워 보이잖아! 원숭이들도 신이 나서 겅중겅중 뛰어오르고 하물며 저 개들도 아무 데나 누워 제 멋대로  뒹구는데......"

 참새의 말을 들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런데 수많은 사람들이 길가 천막에서 잠을 자고 비쩍 마른 몸으로 구걸을 하고 있잖아! 아까 보니까 어른 다리가 내 팔보다 가늘었어. 어린애들은 또  무슨 죄로 거리에서 구걸을 하는지......"

 "그렇구나! 사람이 동물보다 못한 생활을 하고 있네"

  작은 참새의 말에 공감을 하고 다음 말을 해야 할 것 같은데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이상하게도 인도에 와선 녀석들에게 함부로 말을  못 하겠다. 나 자신도 무엇이 옳고 그른지 분명하지 않아 조심스러웠다. 그리고 참새들이 느낀 그대로를 존중해주고 싶다는 생각도 있었다. 그것이 옳은 것인지 모르겠지만.


"불쌍하긴 뭐가 불쌍해. 그건 니가 불쌍하게 보니까 불쌍한 거야!"


  큰 참새는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 자리를 털고 일어나며 덤덤하게 내뱉었다. 저럴 때 큰 참새는 냉정한 어른 같다.  행복과 불행은 누가 결정하는 것일까?  시간이 되어 작은 참새와 나도 자리를 털고 일어나 일인당 200 루피 하는 입장권을 끊고 안으로 들어갔다.

  

빅토리아 기념당



  넓게 펼쳐진 공원길을 따라 들어가는데 피부병으로 군데군데 허연 살을 드러낸 개들이 우리를 따라 움직였다.  인도의 개들은 인도인들과 다른 냄새를 풍기는 외국인에게 적대적이라던 풍월이 생각났다. 바싹 붙어오는 개들에 놀라 작은 참새가 소리를 지르자 지나가던 군인이 기다란 막대기로 사정없이 개를 후려쳤다. 익숙한 듯 깨갱거리는 소리도 없이 개들은  한쪽으로 물러났다. 개들 팔자가 다 편한 것은 아니라는 생각을 하며 작은 참새를 보았다. 작은 참새가 내 손을 잡으며 저도 같은 생각을 했는지 씨익 웃었다.

 박물관은 굳게 닫혀 있었다. 다리가 아파 계단에 앉아 기다리는데 한 남자가 다가오더니 사진을 찍어도 되냐고 물었다. 갑자기 여름에 델리의 자마 마스지트(Jamma Masjid)에서 겪었던 일이 생각났다.

 '벌떼처럼 달려들 텐데......'

  참새들에게 물으니 괜찮다고 했다. 그 말을 먼저 알아들은 남자가 저만치 서 있던 한 무리의 사람들을 불렀다. 금세 십여 명의 사람들이 참새들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일가족 들인듯한데 참새들을 배경 삼아 연신 셔터를 눌러댔다. 내가 그만 됐다고 하자 나까지 사진기 앞에 세웠다.

 처음의 무리가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흩어지자 두 명의 여자들이 다가왔고 또 서너 명이 핸드폰을 들었다. 이러다간 사람들 속에 파묻히겠다 싶어 그만하라고 손사래를 치며 자리를 피했다.

"엄마, 저 사람들 왜 그러는 거야?"

"참새가 인도 사람들을 사진기에 담는 것과 같은 마음일 것 같아."

"그래도 우리는 같이 찍자고는 안 하잖아?"

"친구들에게 피부색이 다른 외국인을 만났다는 자랑하고 싶어서 일거야"

  

 여름에 자마 마스지트에 갔을 때 사진을 찍자고 달려드는 사람들을 보고 잠시 김태희라도 된 듯한 착각에 황홀했었다. 나중엔 동물원의 원숭이가 된 듯 나도 모르게 여기저기서 사진을  찍히고 있었다. 그 사실에 불쾌하기도 하고 달려드는 사람들이 귀찮기도 했다.  그다음부터 나도 사진기를 들 때 조심스러워졌다.


  사람들을 피해 잠시 걷다 돌아오니 입구에 긴 줄이 만들어져 있었다.

"헐~~  이 많은 사람들이 어디서 나타난 거야?"

 큰 참새가 놀랍다는 듯 혀를 찼다.  한쪽에선 단체 관람을 온 학생들의 긴 행렬이 움직이고 있었다. 단정하게 묶은 긴 머리와 파란색 치마에 붉은 스웨터를 입고 팔랑거리는 모습이 예뻤다.

 

박물관 앞에 길게 줄을 선 사람들


 거금을 주고 박물관을 들어가는데도 마치 포로수용소로 들어가는 포로처럼 입구에선 험상궂게 생긴 직원에게 가방을  검사받고 줄을 따라 떠밀려 들어가고 있는 내가 우스웠다.  빨리빨리 줄을 이탈하지 말고 움직이라는 그들에게 욕이라도 한 바가지 퍼붓고 싶었다.

 인도 전역에서 수집한 미술품을 감흥 없이 훑고 지나갔다. 한편으론 자신들의 나라를 지배했던 영국 여왕의 기념당을 그대로 관광상품으로 팔고 있는 인도를 뭐라고 해야 할지 난감했다. 자신들의 관점에서 다시 전시기획을 할 수도 있을 텐데 마치  영국의 인도 지배를 영광스럽게 추억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 저 날카로운 칼날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을까?"

 작은 참새가 영국 군인이 사용했던 무기전시관 앞에 서 있었다.

"맞아! 작은 칼에 손끝만 베어도 아픈데 저렇게 길고 예리한 칼에 찔리면 얼마나 아프겠어! "

창 끝에 검은 피자국 남아 잠들지 못한 영혼들이 비명이 들리는  듯했다.

"미친 거지! 이런 걸 뭐가 자랑스럽다고 전시하고 있어!"

금방이라도 주저앉을 듯한 표정으로 간신히 입을 연 듯 큰 참새가 구시렁거렸다.

 인도 사람들이 이곳을 찾는 이유는 무엇일까?  자신들의 조상을 향해 겨눠졌을 차가운 총구와 날카로운 칼날에서 나는 피비린내를 맡으며 무슨 생각을 할까?

단체 관람을 온 학생들


 빅토리아 기념당을 나올 때쯤 큰 참새의 얼굴은 다시 벌겋게 달아 올라 있었다. 이층 관람을 포기하고 일층 의자에 앉아 있던 녀석은 속이 불편하다고 힘들어했다. 작은 참새는 그런 언니가 못마땅해서 '또 시작이야!' 하는 표정을 지었다. 아픈 사람한테 그러는 거 아니라고 말하는 나 자신도 녀석을 그대로 안아 줄 자신이 없었다. 머리 속에서는 아무 이유 없이 안아줘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녀석의 손을 주무르는 내 얼굴은 이미 무표정하게 굳어 있었다.

 겨우 큰 참새를 다독여 숙소로 돌아오기 위해 일어섰다. 후덥지근하고 매캐한 콜카타의 날씨는 녀석을 너무도 힘들게 했다.  지하철 역까지 걸어가는 것은 무리였다. 우리는 어쩔 수 없이 60루피를 주고 택시를 탔다.


 "하지 말았어야 했다. 그러나 이미 늦어버렸다. 허공으로 던져진 말은 높이 치올랐다가 땅으로  곤두박질치고 있었다. 후회는 늘 추락을 동반한다. "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큰 참새에게 짜이 한 잔을 권했더니 마시고 싶다고 했다. 짧고도 고된 나들이를 생각하며 따뜻하고 달콤한 짜이 한 잔으로 마음을 다스리려 했다. 그런데 먼저 짜이를 받아 든 큰 참새가 짜이를 그대로 엎질러 버렸다. 작은 참새의 짜이를 받아 들고 있던 나는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도대체 너는 왜 그 모양이니?"

  하지 말았어야 했다. 그러나 이미 늦어버렸다. 허공으로 던져진 말은 높이 치올랐다가 땅으로  곤두박질치고 있었다. 후회는 늘 추락을 동반한다.  큰 참새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쳐다보았다.

"엄마는 왜 그렇게 하루 종일 화가 나 있는데?"

맞받아 치는 날카로운 말이 좁은 골목을 지나기 전에 내 가슴에 와서 꽂혔다.


 그래 나는 왜 이렇게 화가 나 있을까? 스멀거리는 감기 기운 때문일 거야. 매캐한 콜카타의 날씨 때문일 거야. 아니다.  겨울이라고 하는데 생각보다 후덥지근한 답답함 때문일 거야. 모르겠다고 발 뺌을 하고 싶지만 사실은 알고 있었다. 내 뜻대로 따라와 주지 않는 아이들이 못마땅한 것이다. 오랜만에 좋은 엄마인척 하려고 거창한 여행 계획을 짜고 돈을  들여왔는데 아이들이 움직여 주지 않으니 화가 난 것이다. 그런데도 나는 나를 속이고 그 마저도 아닌  척하고 있었다.


"내가 왜 이 여행을 계획했지?"

 한숨과 함께 또 한 번 하지 말아야 할 말을 하고 말았다.

"엄마가 오자고 했잖아?"

큰 참새도 지지 않았다.  우리들은 여행 3일 만에 이 여행을  후회했다.


 짜이를 어떻게 마셨는지 모르겠다. 작은 참새의 "그만해!" 란 제지가 있었던 것 같다. 나는 성큼성큼 앞서 걸으며 엄마가 아닌 철없는 어른이 되어 나는 지금 아프다고 울고 있었다. 참새들은  침대 끝에 돌아앉은 내 등을 바라보고 있었다.

"엄마! "

큰 참새가 나를 불렀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엄마! 죄송해요"

가슴이 뜨끔 거리고 저 밑에서 뜨거운 것이 울컥울컥 딸꾹질을 하고 있었다.

"엄마! 힘들지? 너무 오랜만에 함께하는 여행이고 너무 오랜만에 우리  케어하려니 조금 낯설 거야!"

작은 참새가 내 어깨를 안으며 말했다. 이게 무슨 상황이란 말인가? 누가 어른이고 누가 애인지 알 수가 없었다. 딸들을 달래야 할 엄마가 딸들에게  위로받고 있었다. 큰 참새는 계속해서 "엄마"를 부르며 고개를 돌려 보라고 했다. 토라진 어린애가 되어 버린  마흔다섯 먹은 여자! 무슨 말이든 해야 했다. 나의 참새들이  또다시 불안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잠깐만 기다려줘! 소리를 내면 눈물이 날까 봐 고개를 돌리고 입술을 깨무는 거야!"

"알았어, 엄마. 기다릴게"

  결국 나는 울고 말았다. 누가 보면 뭘 잘했다고 우냐고 혀를 찰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부끄러운 줄 알면서도 울고 말았다.

아이들과 떨어져 지낸 지 7개월이 다 되어 간다. 따뜻한 아침밥을 해 줄 수 없고 참새들이 나를 필요로 할 때  달려갈 수 없어 언제나 미안했다. 그래서 나는 솔직하지 못했다. 해야 할 말을 할 수 없어 참았고 해야 할 행동을 하면 안 될 것 같아 참았다.  참새들은 참새들 대로 내 눈치를 보느라 불편한 여행을 하고 있었다. 잔소리도 없고  예전 같지 않은 엄마를 견뎌내고 있었다. 우리는 서로를 해한다고 했지만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이지 완전하게 이해할 수는 없었다. 참새들이 감당해야 할 불안과 상처가 너무나 깊었다. 나는 여전히 자라지 못한 어른이었다. 나는 여전히 이기적인 여자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참새들의 엄마였다.  마음을 추스르고 다시 참새들과 마주했다.

"미안해"

참새들을 꼭 안고 부드럽게 등을 쓸어 주었다.

"괜찮아 엄마!"

가끔은 이렇게 아이들에게 위로를 받는다. 철없는 엄마를 둔 참새들은 다른  아이들보다 빨리 어른이 되었다.


  남은 시간을 보내기 위해 거리로 나왔다.  사다르 스트리트 근처에 있는 New A/C Market 은 크리스마스의 아쉬움을 간직한 채  새해맞이에 여념이 없었다. 커다란 금빛 트리를 밝고 올리선 스파이더 맨이 할인행사 옥외광고 판을 붙들고 서서 손님들을 맞고 있었고  좁은 거리의 상점들은 사람들로 넘쳐 났다. 화려한 원색의 상품들과 쇼핑 가방을 들고 환하게 웃는 사람들의 얼굴에서 새해에 대한 희망과 기쁨이 그대로 드러났다. 화려하고 달콤한 초콜릿 케이크를 입안에 문 것 같은 행복이 거리를 춤추게 했다.


 참새들과 조금 편한 인도 옷을 사기로 했다. 한국에서 가지고 온 옷들이 조금 두껍기도 하고 불편하기도 했다.  일바지처럼 생긴 펑퍼짐한 바지와 펀자비 드레스의 윗옷을 각각 150루피에 구입하고 사람들의 물결을 따라 걸으며 길거리 음식을 맛보았다.

 화려한 마켓 거리의 한  쪽에서 구걸하는 여인이 손을 내밀었다. 나는 사진을 찍어도 되냐고 양해를 구한 후 반짝이는 은빛 그릇에 동전을 넣어 주었다. 참새들도 마음이 가는 이에게 주머니를 열었다. 인도에선 적선보다 넓은 의미의 '박쉬시(Baksheesh)'라는 '보시'의 의미를 가진 말이 있다. 나는 걸인들에게 그냥 적선을  하기보다 정당하게 대가를 지불하는 형식의 박쉬시를 행하고 싶은 마음이다. 거리를 돌아서 나오면서  화려함 속에 반짝이는 은빛 그릇을 내미는 초점 없는 그녀의 눈빛이 어른거렸다.

 



사다르 스트리트 뒷편의 뉴마켓의 조형물
뉴마켓 거리
새해 준비가 한창인 사람들
뉴마켓 거리의 구걸하는 여인


  숙소로 돌아와 맡겨두었던 배낭을 찾아 가로수 밑에 줄을 서 있는 노란 택시 한 대에 옮겨 실었다. 160루피를 주고 시알 다역에 도착하니 역 앞에 자리를 깔고 누운 사람들과 지독한 지린내가 먼저 들어왔다. 플랫폼을 확인하고 매점에 들러 간단하게 차와 간식을 마시며 기차를 기다렸다.


 여행 3일 만에 참새들과의 여행을 다시 생각했다. 후회보단 잊고 있었던 초심을 다시 찾았다고 해야겠다. 좀 더 편안하게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여행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된 콜카타였다. "참새들에게 다시는 화를 안 낼 자신이 있어? " 자문해본다. 자신이 없다. 나는 또 짜증을 내고 화를 낼 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제보단 오늘 더  내려놓고 오늘 보단 내일 더 가슴으로 사랑할 자신은 있다. 나와 참새들은 그렇게 어른이 되어 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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