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혜강 Feb 23. 2016

엄마 딸이어서 고마워! - 15

## 세상은 변하고 있다. 


"지혜의 상징인 머리를 중요한 의식을 행하듯 언제나 단정히 한다." 



 언제 잠이 들었는지 모르겠다. 좁은 침대에 누워 낯선 어둠이 안고 온 불안에  뒤척이다 그 불안 마저도 익숙해져 잠이 든 것 같다. 기차 안은 서늘한 새벽 냉기가 돌고 있었다. 담요를 목까지 끌어올렸는데도 머물지 못하는 온기가 몸을 움츠리게 했다. 작은 참새는 새벽녘에 무엇에 놀랐는지 짧은 비명을 질렀다. 흔들리는 기차의 허공에 매달려 단잠을 잔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예민하고 어둠을 싫어하는 녀석은 잔뜩 긴장한 채 잠이 들었을 것이다. 비명을 듣고 일어나 꼭 안고 토닥여 주었지만 안쓰럽고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통로와 차단되었던 커튼이 걷히고 사람들은 하나 둘 아침을 준비하느라 기차 안이 어수선했다.  인도 사람들은 머리를 아주 중요하게 생각해 아침마다 머리에 물이나 머리기름을  발라 고운 빗으로 빗어 넘긴다.  그래서 지혜의 상징인 머리를 중요한 의식을 행하듯 언제나 단정히 한다.  이른 아침 등교하는 아이들의 곱게 빗어 넘긴  머리를 보면 부모의 사랑과 정성이 그대로 담겨 있는 것 같다. 우리의 옛 선비들이 이른 아침 일어나  제일 먼저 의관을 정제하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하듯 인도 사람들도 흐트러진 자신을 다듬으며 지혜로운 삶을 다짐하는  듯하다.  반면 땅을 딛고 다니는 발은 가장 천하게 여겨 스승을 만났을 때 오른손으로 스승의 발을 만지거나  자신의 이마를 대고  입을 맞춤으로써 경의를 표한다. 

학교가는 아이들

 3층의 승객은 벌써 일어나 정갈한 모습으로 건너편 승객의 자리에서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아마도 우리가 일어나지 않으니 앉아 있을 좌석이 없어 자리를 옮긴  듯하다. 인도 사람들은 친화력이 좋다. 한 무리의 사람들이 모여 왁자지껄 떠드는 걸 보고 일행인가 싶으면 모두 처음 만난 사람들이란다. 모든 것을 받아들여  자기화해버리는 인도의 문화를 엿볼 수 있는 한 장면이다. 그렇게 모여 떠들다가도 내릴 때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돌아선다. 참으로 알다가도 모를 사람들이다. 


  아침을 여는 웅성거림에 눈을 뜨고도 한 시간을 그대로  침대에 누워 있었다.  

6시 30분! 뉴델리에 도착하려면 아직 4시간이나 남아 있었다. 밤새 요란하게 덜컹거리며 13시간을 달렸는데도 뉴델리는 아직 멀리 있었다.  온몸이 뻐근하고 불편했다. 겨우내 언 땅이 봄기운에 녹듯 몸 여기저기서 뚝뚝 뼈 소리가 났다.  

코일을 담가 물을 끓이고 있다. 

스텝들은 벌써 짜이를 나르기 시작했다.  그때 건너편 승객이 빨간 물통을 들고 오더니 내 앞에 있는 전기 콘 셋을 쓰겠다고 했다. 자기 쪽에 있는 콘 셋에는 이미 휴대폰 충전기가 꽂혀 있다는 것이다. 물론 "노 프라블럼" 이었다. 승객은 빨간 통에  코일을 담가 물을 데웠다. 신기해서 몸을 일으켜 봐도 되냐고 물으니 역시 "노 프라블럼"이란다. 손가락 굵기의 코일을 통에 담근지 얼마 지나지 않아 물이 팔팔 끓기 시작했다. 그는 가방에서 꺼낸 유리컵에 블랙티를 넣고 끓는 물을 부어 차를 마셨다. 순간 아하! 유레카를 발견한 듯 감탄사를 내뱉고는'뉴델리에 도착하면 제일 먼저 코일을 사야지!' 하고 결심했다. 숙소에서 마시려고 집에서 가지고 온 코코아와 믹스커피가 끓는 물을 구하지 못해 그대로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방법이라면 컵라면도 끓여 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무거운 눈을 비비는  참새들을 깨우고 침구를 정리한 후 이층 침대를 내려 의자 등받이로 삼았다.  작은 참새는 그대로 내 어깨에 기대었다. 

"잘 잤니? 좋은 아침!"

"좋은 아침!"

잠이 덜 깬 목소리로 작은 참새가 인사를 했다. 목이 조금 쉰 듯했다. 

"잠 하나도 못 잤어?"

제일 먼저 잠자리에 들었던 큰 참새의 아침인사였다. 

"제일 잘 자던 걸!"

"아냐  못 잤어."

"그래도 아침 인사는 기분 좋게 해야지!"

"좋은 아침!"

 퉁퉁 부은 얼굴로 큰 참새는 아침 인사를 했다. 어이구! 언제나 철이 들런지 모르겠다. 타인에 대한 배려가 부족한 나의 큰 딸이었다. 아이 둘을 흘리고 3년 만에 얻은 녀석이었다. 쏟아질 듯 커다란 눈을 하고 2.75kg의 작은 아기로 태어나 사랑 듬뿍 받고 자란 녀석인데 너무나도 이기적인 아이로 자라 버렸다. 하지만 나랑 가장 말이 잘 통하고 혈액형까지 똑같은  나의 붕어빵이었다. 가끔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아이를 통해 알게 된다. 


 기차는 쉬지 않고 달렸다. 수도를 연결하는 특급 기차라 콜카타에서 뉴델리까지 23시간 이상 걸릴 것을 17시간 35분에 달린다. 끝이 보이지 않을 것 같은 인도의 긴 기차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낡은 철로 위를 위태롭게 달리고 있었다.  참새들은 아침식사로 나온 토스트도 밀어냈다. 나도 입이 개운하지 않아  간단하게 차 한잔으로 아침식사를 대신했다. 음식을 담은  비닐봉지가 자꾸 늘어갔다. 참새들이 과연 저장해 놓은 음식을 다시  찾을지 의문이었다. 

 작은 참새는 창밖으로 펼쳐진 풍경을 영상에 담느라 분주했다. 인도에  도착하면서부터 동영상을 찍기 시작했는데 한국에 돌아가서 한 편의 여행기를 만들겠다고 호언장담했다. 날씨는 흐렸다. 콜카타의 뿌연 기운이 뉴델리까지 이어질 것 같아 큰 참새가 걱정이 되었다. 

 10시 35분! 멈춰 서야 할 기차는 여전히 철로 위를 달리고 있었다. 연착이다. 인도 기차의 연착은 흔한 일이다. 심지어 도착시간 3시간은 지나야 연착이란 말을 쓴다고도 한다.  3시간쯤은 연착도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도 비싼 특급 기차가 연착이라니! 인도가 기다림의 나라라는 것을 잠시 잊고 있었다. 


 기차는 한 시간 후 뉴델리역에 도착했다. 잠시 좌석 밑에 밀어 두었던 삶의 무게를 꺼내 기운차게 짊어졌다. 참새들도 각자의 배낭을 짊어지고 출구를 찾아 나갔다. 

"공기 좋다"

큰 참새가 크게 호흡을 했다. 다행이었다. 또 한 시름 놓았다. 

"여기가 인도의 수도 뉴델리야! 무사히 뉴델리에 온 걸 환영해."

"엄마도 환영해요"

작은 참새가 이마까지  눌러쓴 모자 사이로 얼굴을 내밀었다.

"다들 수고했어!"

우리는 서로의 등을 토닥여주었다. 


  플랫폼을  빠져나오자 넓은 대합실 바닥에 걸인들이 여기저기 누워 있었다. 우리를 보고 달려와 "마담 마담" 부르며 손을 내밀었다. 

"엄마, 그 음식 저 사람들 주면  안 돼?"

큰 참새가 말했다. 사실 음식을 챙기면서 대합실의 걸인들을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걸인이라도 인도에서 음식을 나눠 먹는 것은 위험한 일이었다. 

"그러자 엄마!"

작은 참새도 언니와 같은 생각인듯했다. 나는  어린아이가 딸린 젊은 여인에게 다가가 음식을 먹겠냐고 물었다. 여인은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봉지를 낚아챘다. 거부하지 않는 그들이 고마웠다. 나머지 음식들은 참새들이 알아서 나눠 주도록 했다. 음식을 버리지 않아서 다행이고 누군가의 한 끼 식사가 되어 감사했다. 


 역내를  빠져나오자 릭샤꾼들이 달려들기 시작했다. 참새들은 미간을 찌푸리며 손을 내저었다. 신호등도 없고 차선도 없는 도로를 무질서하게 달리는 자동차와 릭샤 사이를 요리조리 피하며 걸었다. 누구를 향해 울리는 것인지도 알 수 없는  날카로운 경적이 긴 꼬리를 남기며 좁은 도로를 휘젓고 다녔다. 소리에 민감한 큰 참새는 귀를 틀어막고 혼비백산한 얼굴로 나를 놓칠까 봐 겁먹은 걸음으로 쫓아왔다. 

"아이 진짜 디게 시끄럽네!'

 작은 참새는 앞장서 걸으며 우리가 지나갈 길을 터 놓듯 팔을 휘휘 저었다. 


 뉴델리역과 곧게 이어진 메인 바자르에 들어서니  감회가 새로웠다. 불과 4개월 전에 다녀 간 곳인데 새로운 가게들이 생기고 문을 닫은 곳도 있었다. 여름의 기억이 떠올라 숙소까지 향하는 길은 낯설지 않았다. 

 '내가 다시 이곳에 오다니......' 

 빵빵거리는 릭샤와 차들을 피하고 집채만 한 소들이 싸 놓은 똥을 밟지 않으려 신경을 곤두세워 걸었었다. 소리에 놀라고 시커먼 사람들의 이글거리는 눈에 놀라고 쓰레기와 지린내에 정신이 혼미해져 울먹였었다. 그런데 나는  다시 뉴델리의 메인 바자르 한 복판을 걷고 있었다. 왜 나는 다시 이곳에 서 있는가?



"여자는 약하지만 엄마는 강하다고 했던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마도 여자다." 



 숙소는 여름에 묵었던 곳으로 정했다. 여름에는 에어컨 때문에 900루피를 하던 방이 겨울이라 600루피에 나와 있었다. 델리에서 3일을 묵는다 해도 콜카타의 우중충한 하루방 값밖에 되지 않았다. 그러니 콜카타의 방값이 얼마나 비싼지 알 수 있었다.  다시 배낭을 풀고 밤새 기차 안에서 묵은 피로를 씻어냈다. 작은 참새는  머리도 감지 않고 고데기도 하지 않아 창피하다며 푹 눌러썼던 모자를 벗어던졌다. 그리고는 욕실로 뛰어들어갔다. 

"참새 무슨 일이야?"

"똥 마려워 죽는 줄 알았어!"

"헐~~~"

한바탕 웃고 나서 짐을 정리하는데 작은 참새가 다급하게 나를 불러댄다.

"엄마!"

"응?"

"변기에 똥이 묻어서 안 내려가. 어떡해?"

"헐~~~"

  이럴 땐 자식이 뭔지 모르겠다. 그렇게 씩씩하던 녀석이 한 순간에 아기가 되어버렸다. 

"알았어. 엄마가 닦을게"

"야! 니가 닦아"

큰 참새가  욕실 문 앞에서 징징거리는 작은 참새를 향해 소리를 질렀다. 여자는 약하지만 엄마는 강하다고 했던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마도 여자다. 아무리 둘러봐도 청소용 솔은 없었다. 할 수 없이 비닐팩을 손에 끼고 변기 안에 손을 넣었다. 비위가 상해 구역질이 났다. 휴지를 얼마나 풀어넣었는지 젖은 휴지가 내려가지 못하고 그대로 남아 있었다. 휴지를 건져내고  변기 안을 닦아냈다. 

"얘들아, 휴지는 조금만 사용해. 인도는 물도 귀하지만 휴지를 사용하지 않는 곳이라 변기 안에 휴지를 넣으면 막힐 수도 있어!"

아닌 게 아니라 한국에서 가져온 휴지는 일찌감치 동이 났다. 예상하지 못한 일이라 휴지를 사면서도 선뜻 내키지 않았다.  왜 이렇게 휴지를 많이 쓰는 거지? 집에서 하던 버릇을 그대로 갖고 와서는 무엇이든 휴지로 쓱쓱 닦아 버린 탓이었다. 저 녀석들을 어찌 하면 좋을까? 


 자유롭게 자립적으로 키웠다고 장담했었다. 주위 사람들이 강하고 의젓하게 잘 키웠다고 칭찬을 할 때마다 아니라고 겸손을 떨면서도 내심 흐뭇했었다. 그러나 인도에 도착하자마자 참새들은 아이가 되어버렸다. 시도 때도 없이 "엄마"를 불러댔다. 


"엄마, 수건"

"엄마, 휴지"

"엄마, 내 속옷"

"엄마, 머리 말려줘"

"엄마, 머리 묶어줘"


 엄마엄마엄마......! 내년이면 열아홉, 열일곱이 되는 녀석들이 제 머리 하나 묶지 못한다는 사실이 기가 막혔다. 하지만 엄마의 부재에 대한 어리광이란 생각도 들고 미안한 마음에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큰 참새는 도착해서 지금까지 제 배낭 하나 제대로 싸지 않았다. 미리  일러두어도 어설프게 쑤셔 넣고 낑낑거리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답답하기  그지없었다.  여전히 나는 기다리는 일에 서툴렀다. 결국은 성질 급한 내가 배낭을 쌌다. 

다음부터는 기다려 줘야지! 다짐을 해도 여전히 나는 기다리지 못했고 여전히 나는 내 방식대로  배낭을 싸야 직성이 풀렸다. 이런 식으로 가다간 또 한 번 여행을 후회하게 될 것 같았다. 


"이제부터는 자기 배낭은 자기가 책임져야 해! 엄마가 도와주지 않을 거야."

"알았어요."

시큰둥한 표정이었지만 참새들은 내가 왜 그러는지 이미 알고 있었다. 엄마는 강하지만 강해야 할 때와 유연해야 할 때를 먼저 구분해야 했다. 엄마도 여자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야 나도 여자 사람으로 아이들을 대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대의 아이라고 해서 그대들의 아이는 아닌 것.

아이들이란 스스로 갈망하는 삶의 딸이며 아들인 것.

그대들을 거쳐 왔을 뿐 그대들에게서 온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비록 지금 그대들과 함께 있을지라도
아이들이란 그대들의 소유는 아닌 것을.

그대들은 아이들에게 사랑을 줄 순 있으나, 그대들의 생각까지 줄 순 없다. 

                                                                           -칼릴 지브란, "아이들에 대하여"


 

뉴델리의 한국식당 "쉼터"

뉴델리의 메인 바자르에는 "쉼터" "인도 방랑기" "라니 카페" 등 한국인이 운영하는 식당들이 많다. 뿐만 아니라 맛있는 한국음식을 맛볼 수 있는 곳이 많다.  잃었던 입맛을 찾고 모국어를 사용할 수 있는 기회가 많아  여행자들이 잠시 쉬어가기 좋은 곳이다. 콜카타에서 맛볼 수 없었던 한국음식을 맛보기 위해 '쉼터'로 향했다. 내 경험으론  가장 한국스럽고 맛있는 집이었다. 참새들은  김치찌개와 떡볶이를 먹어 보더니 환호성을 질렀다. 

"한국보다 더 맛있어!"

 인도 음식에 비해 가격은 조금 비싸다. 공깃밥이 한 그릇에 60루피니까 한국 돈으로 1,200원 정도 한다. 그래도 오랜만에 칼칼한 김치찌개를 먹고 나니 입안이 개운했다. 

'인도에 왔으면 인도 음식을 먹어야 하는데......'

한편으론 걱정도 되었지만 아이들이  무엇이든 먹게 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무엇이든 먹어야 기운이 나고 여행을 잘 마칠 수 있기때문이다. 울렁거리는 속을 달래기 위해 오렌지와 구아바, 수박, 포도, 파파야 등 과일로  입맛을 잃지 않도록 했다. 참새들은 점심을 먹고도 한참 동안 일어나지 않았다. 오랜만에 와이파이를 켜고 친구들과 소통하고 있었다.  

 

"엄마, 여기 USIM 칩 판다네......"

핸드폰을 끼고 있는 큰 참새가 식당 입구에 붙어 있는 안내를 보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엄마는 사고 싶은 마음이 없는데......"

 브런치에 글을 올리려면 USIM칩이 필요했다. 하지만 내가 사게 되면 글을 쓴다는 핑계로 하루 종일 핸드폰을 붙잡고 있을 것  같았다. 그러면 아이들과 대화를 할 수 없을 것이다. 내가 자제를 한다 해도 USIM칩을 나만 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게 되면 참새들은 지금보다 더 자주 핸드폰을 들여다보게 될 것이고 우리들의 여행이 침묵의 구렁 속으로 빠져들 것 같았다. 내 성격을 잘 아는 큰 참새는 포기가 빨랐다. 

"쉼터"의 김치찌게
"쉼터"의 떡볶이

 

 점심을 먹고 난 참새들은 쉬고 싶다고 했다. 숙소에 들어가 낮잠을 자고 나서 저녁을 먹기로 했다. 그 사이 나는 뉴델리역에서 다음 여행지로 떠날 수 있는 기차표를 예매했다. 뉴델리역에는 2층에 24시간 운영되는 외국인 창구가  따로 마련되어 있어 1층에서 줄을 서서 기다리지 않아도 된다. 외국인 창구에는 많은 사람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번호표를 뽑고 차례를 기다리는 동안 한쪽에서 여직원이 기차표가 있는지 여부를 확인해 주었다. 자이살메르를 가야 하는데 기차표를 구할 수가 없었다. 함께 간 가이드와 상의 끝에 여행 계획을 전면 수정하기로 했다. 어쩔 수 없이 사막 사파리는 여름처럼 푸쉬카르에서 하기로 했다. 자이살메르 꼭 가보고 싶었는데 정말 아쉬웠다.  다음 여행지의 출발 날짜는 기차표가 있는 날짜에 맞춰 수정했다. 그래도 기차표를 구할 수 있어 천만다행이었다. 

 인도에서 기차표 예약은 온라인으로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다. 메인 바자르에도 온라인 E - Ticket를 판매하는 곳이 있다. 발로 뛰고 눈으로 확인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 탓에 몸이 고생이었다. 다음에는 온라인 예약에 도전해 봐야겠다. 인도를 다시 와야 할 이유가 하나 더 늘었다.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숙소로 돌아오니 참새들은 곤히 자고 있었다. 기차표를 해결하고 나니 갑자기 피곤이 몰려왔다. 참새들 옆에 누워 잠시 눈을 붙이기로 했다. 창밖으로 숙소 마당에서 뛰어노는 아이들의 웃음소리와 함께  시나브로 저녁이 익어가고 있었다. 

 한 숨 자고 일어나니 7시가 훌쩍 넘어 있었다. 큰 참새는 화장실에 있었고 낯빛이 좋지 않았던 작은 참새는 벌겋게 열이 오른 채 잠에 빠져 있었다. 이 마을 짚어주자 "엄마"를 부르며 품안으로  파고들었다. 

"많이 아파?"

"아니. 괜찮아!"

"열나는데....."

"그래도 괜찮아!"

 언제나 괜찮다고 하는 나의 아이들!  "괜찮다 괜찮다 괜찮지 않아도 괜찮다" 노래를 하던 내 탓이었다. 아프면 아프다고 떼도 쓰고 울기도 하고 해야 하는데 나의 두 딸들은 가슴이 아프도록 참 잘도 참는다. 작은 참새를 꼭 껴안고 머리를 쓸어주었다. 

"2016년 새해가 얼마 남지 않았어!"


  메인 바자르의 삼거리에 있는 "크리슈나" 인도 식당으로 저녁을 먹으러 나갔다. 2015년을 보내는 뉴델리의 메인 바자르 거리는 화려한 불빛과 함께 들떠 있었다. 우리는 메인 바자르 거리가 잘 내려다보이는 3층으로 올라가 자리를 잡았다. 인도 대중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신인 목동 크리슈나를 생각하며 한국의 백반이랄 수 있는 인도의 정식 탈 리를 맛있게 먹었다. 탈리(Thali)는 '큰 접시'라는 의미인데 큰 쟁반에 쌀밥과 화덕에 구운 짜파티(Chapati), 콩 수프 달(Dhal), 카레, 그리고 간단한 나물이나 절임, 요구르트 다히 그리고  샐러드가 담겨 나온다.  


뉴델리의 "크리슈나"의 탈리


뉴델리 메인 바자르의 밤거리
뉴델리의 메인 바자르 밤거리
뉴델리 메인 바자르의 밤거리

 한국과 인도의 시차가 3시간 30분이라 한국에서 먼저 2016년 새해가 밝았다는 소식을 전해왔다. 큰 참새의 친구가 보내준 보신각의 제야의 종소리를 들으며 2015년을 돌아보았다. 참 많은 일들이 있었다. 내 인생의 제 2막이 시작되었고 태어나서 "처음"이란 말을 가장 많이 쓴 한 해였다. 늘 새로운 오늘을 맞고 있었지만 조금 특별한 "처음'을 경험한 한 해였다. 아이들은 어제보다 자라고 나도 오늘의 시간만큼 자라고 있다. 여전히 기다림을 배우며 나를 찾는 중이다. 나의 모든 것은 언제나 현재 진행형이다. 

 참새들과 가볍게 잔을 부딪쳤다. 

"2015년 잘 보내느라 애썼다.

2016년 첫 단추를 끼우는 작은 참새도 마지막 단추를 끼우는 큰 참새도 모두 모두 힘내라!

우뚝 서자! 아자아자 파이팅!

잘 가라 2015년!"

 우리들의 한 해가 추억 속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작가의 이전글 엄마 딸이어서 고마워! - 14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