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대체 내가 무슨 잘못을 했습니까!
매일 오전 열한 시의 계단, 공기, 노크 전 들리는 심장소리.
얼마 전 제주도에서 오른 성산 일출봉 생각이 났다. 이 가파른 계단을 오르면 맞닥뜨릴 정상이 존재한다는 이유가 나를 오르게 했다. 급한 경사의 계단을 보면서도 중간중간 사진을 찍으며 사치를 부렸던 것도 탁 트인 전경이 곧 우리 앞에 펼쳐질 것이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런데 모든 계단이, 모든 정상이 탁 트인 전경을 가져다주지는 않는다는 것을 매일 아침 절실하게 깨닫고 있었다.
2015년의 둘째 날, 출판사에 입사했다. 첫 면접에서 자신의 신학적인 지식과 독서력을 줄줄 읊어대던 그날의 대표는 인자한 사람이었다. ‘책을 많이 읽었다더니, 아는 사람(신학자)이 없네요?’라고 툭 던진 한 마디에 수만 가지 의미가 담겨 있다는 것을 인지하기에 당시 내 처지가 간단치 않았다.
중소기업에 출근하는 직원들의 비애는 여러 곳에서 발생한다. 본연의 업무 이외의 일에 늘 한 다리를 걸치고 있어야 하는 것도 그렇지만, 시스템이 부재한 경우가 많아, 아래로부터 위까지 의견이 전달되기 쉽지 않은 구조라 그렇다. 물론 직원들 간의 유대관계가 끈끈하다면 위에 언급한 부분의 부담은 옅어지게 되는 것이 중소기업의 특징이다.
입사 9년 차 기획 팀장은 대표의 오른팔 격인 사람이고, 대표는 사투리 같은 영어 발음으로 직원들 모두 앞에서 쎄크리테리(?) 즉, 비서라고 인증했다. 중소기업의 비서는 대표가 하라는 데로 일 하는 사람이고, 구린내 나는 부분의 냄새를 앞서 맡아야 하는 자리다. 좋다. 사회생활에 탁월하여 오른팔이 된 것을 시샘하는 사람은 있어도 나무라는 사람은 없다. 그것도 능력이려니 하니까. 우리는 누구나 적당한 눈치와 적극적인 아부를 필요로 하는 직장 생활을 하고 있으니까. 그런데 문제는 그 자리까지 올라가는 과정이 어떠했는가에서 발생하는 경우가 많다. 기획 팀장은 허술한 사람의 대명사였다. 실력으로 그 자리에 오른 것이 아니었다. 실수를 하지 않는 날보다 실수하는 날이 더 많았고, 심지어 본인의 실수로 발생한 책임에서 벗어나 다른 직원에게 전가하기 위해 대표를 이용하기도 했다. 일 못하는 직원을 안타깝게 생각하는 ‘측은지심’의 발로인지, 대표는 기획 팀장에게 끊임없이 속았고, 쉬지 않고 두둔하느라 애썼다. 우리는 기획팀장을 ‘대표 아들’이라고 부르며 그의 과정을 올바르게 보지 않았다.
회사 입사 후 일 년을 넘기는 사람이 드물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체념 상태에서 날아오는 어퍼컷을 피할 도리가 없는 직원들은 하나 둘 이 자리를 떠났다. 인격자의 점잖을 떨다가도 골방에 마주한 사람에게 퍼붓는 이유 없는 비난과 화풀이들을 감당할 이유를 직원들이 찾기는 어려웠다. 어느새 오 년 차 중간에 끼인 영업 마케팅 팀장이 되었고, 영업 동료들은 이 곳에서 내가 버틴 오 년의 시간에 혀를 내둘렀다. 그만큼 지독한 자리라는 소문이 출판계에 파다했기 때문에. 적당한 아부와 적당한 눈치로 버텼다. 스스로를 속여야 되는 일이 부지기수였고, 책임지지 않아도 되는 일까지 책임지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그 책임의 진원지는 99% 기획 팀장이었고 퉁명스러운 항의에 어설프게 웃음으로 때우는 그를 대하는 것이 상한 생선의 냄새를 맡는 것처럼 비릿한 가운데 역했다.
기획자는 책의 초판 계약을 담당하면서, 기존에 계약되어 출간된 책의 재판(개정 재계약, 가격 인상 등) 과정을 담당한다. 기획자가 놓치면 다른 부서 담당자들이 파악한 후에는 이미 한참 늦을 수밖에 없다. 우리 회사의 경우 계약 관련은 대표와 기획팀장 두 사람의 몫이었고, 대부분 다른 직원들은 들여다보기 어려운 속살들을 둘만 공유했다.
보통 개정판(기존 출간된 책의 내용 및 형식을 새롭게 고쳐 내는 형태)의 시기 조율은 필수다. 시기 조율에 실패할 경우 여러 문제가 발생하지만, 기존 개정되기 전의 재고 도서 처리 문제가 대표적인 후유증이다. 기획 팀장이 놓은 밑이 좁은 돌을 내가 의심 없이 밟으면서 퇴사 프로젝트가 발동됐다. 기획 팀장의 개정판 시기 조율 실패로 잘 팔리지 않는 책이 수백 권 쌓이게 된 것이다. 개정판 출간으로 판매할 수 없는 책 수백 권을 떠안게 된 것이다. 큰 이슈가 발생하지 않는 한 잊힌 책을 굳이 소환하는 독자가 많지 않은 까닭에 불가능한 임무가 떨어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매일 오전 열한 시, 오전 매출 보고서를 들고 지층에서 2층으로 오른다. 오래된 단독주택 삐걱대는 스물네 개 계단을 오르는 내내 골방 안 대표의 심정은 안전한가? 에 대한 걱정에 분주하다. 매일 아침 보고는 단순한 수치 보고로 끝나는 법이 없다. 조와 울을 오가는 골방 전사의 심기 관리까지 해야 하는 지독한 일이었기 때문에. 지난 오 년간 매출 상승이라는 본연의 업무보다 대표의 심기 관리에 온통 신경을 써야 했다. 골방에 직원 한 명을 세워놓고 뿜어내는 에너지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지만 그는 이상하리만치 평소 에너지가 없는 모습으로 현현하니, 직원들은 우주의 기운을 모으고 모아 직원에게 뿜어내려고 저리 평온한 모습으로 앉아있는 것이라 여겼다.
그날도 여느 때와 다르지 않았다. 평소와 다른 조건은 바로 직전에 기획 팀장이 대표의 방을 방문했다는 것뿐이었다. 방문을 열자마자 상기된 얼굴과 엄지와 검지에 잔뜩 힘을 준 채로 ‘경고야’를 남발하는 골방 전사와 맞닥뜨렸다. 이유도 알 수 없는 십여 분의 말 폭탄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어 눈앞에 있는 중년 남자를 빤히 바라봤다. 고개를 숙이고 ‘죄송합니다’를 연신 내뱉지 않는 아랫사람에 황당했는지, 날리던 경고를 중단하고 나를 빤히 쳐다봤다. 그래 이제 내 차례구나. 입을 열어 황당함과 억울함을 항변하려 했지만, 일거에 싹둑 잘린 단어들은 파편처럼 바닥에 떨어지고, 그의 데시벨은 더욱 커져 마침내 지하 1층 직원까지 흠칫 놀라게 했다.
그만두겠습니다.
더 이상 아무 얘기도 듣고 싶지 않습니다.
가 보겠습니다.
계단을 오르내리며 오래 꿈꿨던 말을 순간적으로 내뱉었다. 즉흥적이지 않은 고백. 머릿속에 그리던 문장과 일치했으니, 준비한 대사라 할 법했다. 다만 계산에 없었던 눈물이 떨어져 난감했다. 손까지 부르르 떨며 촌스럽게 돌아섰다. 잠깐 앉아보라는 그에게 울컥한 등을 보이고 계단을 내려갔다. 하나, 하나 계단을 내려 갈수록 전투력이 상승한다. 소란에 걱정이 된 직원들이 나와 있다. 이 정도 인원이면 충분하다. 일층에 있는 기획 팀장 방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놀란 눈으로 기획 팀장이 나를 쳐다본다.
도대체 내가 무슨 잘못을 했습니까!
이 땅에 태어나 가장 큰 목청으로 면전에 ‘살’을 날렸다. 들리는 큰 소리에 화가 난 대표가 어느 때보다 재빠르게 일층으로 내려와 내 앞에 섰다.
어디서 소리를 지르나! 선을 넘었소
선은 대표님이 매일 같이 넘어오셨습니다
얼마나 듣기 싫었던 ‘하오’, ‘하소’, 말투였던가. 떨리는 손으로 짐을 쌌다. 직원들이 하나 둘 내려와 말리지만 이미 선은 넘었다. 그 선을 넘기 위해 어쩌면 5년여를 버틴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날 열한 시 나를 격동시킨 것은 이유 없는 화풀이도, 그 어떤 지적도 아니었다. 한 문장에 격동되었고, 그 한 문장이 나를 용기 나게 했다.
왜 매번 그렇게 책임을 전가하나!
아부를 덜 떨어서, 눈치를 덜 봐서 문제였다면 오히려 수긍했을 것이다. 그런데 기획 팀장의 실수를 메우느라 소리 소문 없이 거래처를 오가던 시간들에 대한 정반대의 평가는 더 이상 이곳에서의 시간이 무의미하다는 것으로 느껴지게 했다.
짐을 어설프게 들고 나온 다음날, 기획 팀장은 전체 회의에서 이제 영업 팀장의 차는 누구든 자유롭게 타도된다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다른 직원들이 대표에게 내 퇴사에 대한 재고를 요청하는 자리에서도 그는 빠른 ‘인수인계’를 말했다고 한다. 회사는 이 모든 일은 ‘네 탓이라며’ 몰아 댔고, 나는 이 모든 일은 ‘내 탓이 아니라 네 탓이라고’ 항변했다.
결혼 7개월 차 신혼, 혼자서 모든 것을 결정해서는 안 되는 새신랑은 ‘내 탓’이 아닌 일에 책임을 질 수 없어 회사를 그만뒀다.